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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와 법정 스님 그리고 공덕주 김영한’

이옥용 | 기사입력 2022/03/31 [21:28]
이옥용의 ‘화평세상 5분 영상’ 준비 길상사 답사, 취재기

‘길상사와 법정 스님 그리고 공덕주 김영한’

이옥용의 ‘화평세상 5분 영상’ 준비 길상사 답사, 취재기

이옥용 | 입력 : 2022/03/31 [21:28]

이옥용의 화평세상 5분 영상준비 길상사 답사, 취재기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도 한쪽에 묵혀 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활짝 열어 나누기 전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 법정스님 -

 

법정스님과 공덕주 김영한님은 가고 없지만 그 분들이 남긴 글과 길상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 분의 흔적을 다시한번 되새겨보자는 의미를 가지고 취재하였습니다.

 

서울 도심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吉祥寺)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길상사는 1997년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사찰의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명(妓名)은 진향(眞香)으로 성북동 기슭에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해서 부를 얻었지만,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기생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는 8.15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영한은 말년에 길상사 시주와 함께 시인 백석과의 일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게 됐습니다.


김영한은 자신이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이를 부인했고,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의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면서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길상사 창건 법회에서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길상사가 백석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나,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청산학원대학(靑山學院大學·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유학 3학년 때 주소를 도쿄 길상사 1875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청산학원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정확한 주소가 다시 알려졌습니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과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싯가로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 스님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데 대해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준 것이니 이를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2010311(음력 126) 법정 스님도 길상사에서 입적했습니다. 길상사 제일 안쪽 건물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진영(眞影)과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지난해 입적 10주기를 맞이해 스님의 누더기 옷과 바루, 1967년에 사용한 세숫대야, 첫 삭발을 기념하는 거울과 삭도기, 친필 원고 등도 새롭게 전시됐습니다.

  

이곳을 자주 찾는 한 방문객은 스님은 말과 글과 행동이 모두 일치하시는 분, 존경하고 마냥 그리워했는데 요즈음은 매주 한번 길상사에 나와서 스님의 책을 통해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입적한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법정 스님의 정신적 유산은 이렇듯 그를 따르는 대중의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이들은 스님의 자취를 찾아 길상사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 머문 강남구 봉은사, 전남 순천 불일암, 해남 우수영 생가, 수행자로 첫발을 내디뎠던 미래사 효봉암 등으로 순례길에 나선다고 합니다. 갈 수만 있다면 스님이 머물렀던 강원도 오대산의 오두막과 미국 LA에 있는 고려사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불일암은 원래 고려 시대 16국사 중에 7대 자정국사가 세운 자정암 자리에 법정 스님이 1975년 중건한 암자입니다. 스님은 이곳에서 17년간 머물렀습니다. 1992년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불일암을 떠나 오대산 오두막으로 옮겼습니다. 거처를 옮긴다고 선언하자 불일암 방문객이 줄어들었고, 이후 스님은 겨울이면 추운 강원도를 떠나 따뜻한 불일암에 들러 잠시 머물다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법정 스님의 유명한 말씀 무소유에 대해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참고로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한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입니다.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에서 입적했으니 이것도 인연일까요?

 

절 치고 평범한 절은 없다고 하지만, 길상사는 본래 요정이었기 때문에 절의 풍경부터 다른 전통적인 사찰과는 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산책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오히려 편안한 측면도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 정치가 벌어지던 밀실이 지금은 누구나 참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특히 법정 스님의 순수사회운동인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서 건강한 사회를 위한 사회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길상사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나무와 숲, 맑은 공기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길상사는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인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길상선원, 적묵당, 침묵의집, 관음보살상, 범종각, 일주문, 북카페, 선열당, 길상보탑, 설법전 소강당, 스님들의 처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길상사에는 불교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요정이었던 길상사 금당은 불상과 주변물 정도만 가져다 놓았을 뿐 더 이상 꾸미지 않아 다소 썰렁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절 주변에 비교적 규모가 있는 건물을 새로 새우는 것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길상사 공덕주 김영한은 1916년 병진(丙辰)년 음력 1225(1917118)생으로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을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본명은 김영한, 기명은 진향(眞香), 호는 자야, 법명은 길상화(吉祥華)입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자야(子夜)’가 바로 김영한으로, 김영한의 저서 내사랑 백석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하면서 백석을 기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길상화 김영한은 우리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16살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해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서 김영한은 17살에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했습니다. 여창명인(女唱名人) 김수정의 안내로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하규일의 넷째 양녀로 들어가 하규일로부터 3년간 가무를 배웠습니다. 후일 김영한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김영한은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고,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합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해관이 투옥되자 서둘러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면회가 안된다는 말을 듣고 함경남도 함흥 땅에 주저앉게 됩니다.

 

1936년 오로지 은인이던 해관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 같은 곳에 나가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해관 선생님의 특별면회를 신청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함흥권번에 들어갔습니다.

 

시인 백석과의 관계는 김영한의 주장이며, 객관적 근거는 없다는 게 학계의 주장입니다. 어디까지나 김영한의 말에 의한 것으로 1936년 가을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첫 날, 백석(당시 26)과 김자야(당시 22)는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백석이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 했고,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영되었으며, 경남 통영 출신의 란(박경란)이라는 여성을 좋아했던 백석이 김영한을 보자마자 좋아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영한은 "‘당시(唐詩)선집을 사왔을 때, 백석이 그 책을 읽고 '자야(子夜)'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시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백석이 일본 청산학원대학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백석은 이와 관련해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백석의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등을 가사로 만들며 자야와의 사랑을 담은 것으로 그렸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고 합니다.

 

김영한은 "백석이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내가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1938년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1953년 중앙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영한은 중국의 베이징,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한달 동안 여행했다고 합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징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평북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한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는데, 실제 그 기간에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이혼했으며,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아내 리윤희와는 이후 50년간 해로하게 됩니다. 이와관련, 김영한은 "백석은 다섯 여인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 산골짜기의 한식당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각은 훗날 길상사가 됩니다.

 

그런데 등기부에 따르면 자야(김영한)가 길상사 땅을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조봉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조봉희는 박헌영의 이부(배다른 아버지)의 누나이며,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126일 입적)"실소유주는 우리 아버지이며, 6.25 혼란 이후 자야가 꿀꺽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53~4년 몹시 혼란스러울 때 자야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고, 그 도움으로 대원각을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노년에 김영한은 1987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채와 대지 23,140(7000여평), 당시 싯가 1,000억원이 넘었습니다.

 

처음에 법정 스님은 그 청을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 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였고, 1995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했습니다.

 

19971214일 법정 스님은 길상사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자신의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길상사 건립 당시 김영한은 “1,000억에 달하는 돈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 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영한은 "나의 유해를 눈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1114일 육신의 옷을 벗었습니다. 하루 전날 김영한은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마치고 유언에 따라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고 묘지는 따로 없습니다.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녀의 공덕비와 백석의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107일에는 기제를 모셔 그녀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지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습니다.

 

한 시절 밀실정치의 현장이었고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였던 요정, 대원각을 소유했고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가난한 시인을 사랑했던 여인 김영한. 서울에서 가장 유명해서 최고의 권력자들과 돈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세상을 희롱하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평생을 어렵게 모은 재산을 무소유를 보여주신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던 그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법정 스님이 오대산 오두막에서 생활하다 폐암 증세가 심해져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고 입적할 때까지 치료한 병원비가 약 6,100만원이 빚으로 남아 있었는데,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가 대신 지불 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재벌 집안의 안주인이신 분도 무소유의 의미에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분들이 참 훌륭하신 모습으로 우리들의 귀감입니다. 비워두면 채워주는 세상 이치를 실천하는가 봅니다. 법정 스님, 김영한 여사, 홍라희 여사 같은 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법정스님에 대한 영상을 준비하기 위해 취재하면서 같은 삶을 살면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이렇게 감성을 주는 글을 쓸 수가 있을까 감탄하며, 왜 많은 사람들이 법정스님이 가신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리워하며 그 발자취 흔적 찾아나서며 그 가 남긴 주옥같은 법문들이 중생들의 마음의 위로와 기쁨과 위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은 유언으로 남긴 화두에 필자는 큰 혼동과 고뇌에 빠지게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보시 중에 법보시가 제일로 필자는 알고 있고, 부처님께서 두 사람이 동행할 때는 따로 가 법문을 가르치라고 하셨는데, 성철스님과 법정스님께서는 평생 수행에 깨달음을 통해 얻은 주옥같은 말씀들을 마지막 유언에서 흔적을 지워달라고 하셨는지 필자는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유언의 화두를 안고 그 숙제를 풀기위해 얼마나 마음의 고행을 해야 그 답을 얻을 수 있을지 고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글의 필자는 유튜브 화평세상 5분 영상을 통해 신앙세계의 각종 주제를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동시에 종교계 상황과 문제점들을 전해주고 있다. 이글은 법정스님에 대한 이옥용의 화평세상 5분 영상을 준비하기 위해 길상사를 답사, 취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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