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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5) 여호와 vs. 하나님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4/12 [07:29]
구약성경 기반 여호와나 알라는 신이라 불릴 수 없다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5) 여호와 vs. 하나님

구약성경 기반 여호와나 알라는 신이라 불릴 수 없다

김병윤 | 입력 : 2022/04/12 [07:29]

어느 누구도 신에 대해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문제아일 뿐이다”(수피 여류작가 라비아). 1)

 

만약 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교의 전유물이거나 특정 교파를 편애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생명체와 무생물체를 구분하여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모든 존재를 손으로 빚었든, 배앓이를 하고 내놓았건, 스스로 만들었다면 특정 존재를 다른 존재와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구분하여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만물의 창조주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속성을 보이는 존재는 신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용사(전사)(출애굽기 15:3)며 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받는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라”(나훔 1:2-3).

 

여호와는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2) 구약성경에 기반한 여호와나 알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창세기 첫 번째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엘로힘(gods, 신들)6일째 되는 날 아담과 이브를 동시에 만들어 놓고, 지구를 인간으로 채우고 제압하라(fill the earth and subdue)’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공존과 조화의 도모가 아닌 인간 중심적 발상입니다. 이는 마치 무지한 백성을 짓밟아 제압하는 독재자의 방식으로 모든 다른 생명체를 다루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신으로 숭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 본위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멸종시키고 자연환경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생명체들이 각자 치열한 자연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생존 방식을 통해 익힌 소중한 지혜를 빌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잃어 우리의 미래는 더더욱 암울해지고 있습니다.

 

흔히 기존 종교에서 묘사되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것 중 일부만 편애하고 나머지 존재를 배척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자신이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창조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자라는 자격이 상실됩니다.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신,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모두 죽여버렸다가 다시 번식하게 만드는 변덕스러운 신, 그런 신은 이미 신이 아닙니다. 또한, 신이 특정 민족을 위한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그 민족이 그 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진정한 신이란 모든 존재를 똑같이 사랑하거나 또는 모든 존재에 대해 하염없이 무관심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나 구약성경에 기반하여 형성된 종교유대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신천지 등에서 신을 공포의 대상이나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기반한 여호와나 알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신이라는 존재가 구약성경의 여호와와 달리 직접 훈육하거나 인간사에 개입하는 내용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예수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 알려주거나 간섭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 사후에 예수가 마치 여호와와 같이 개개인의 일에 개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언급한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고는 그런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보면 하느님의 역할은 여호와의 역할과 확실한 차이를 보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자기 뜻대로 우리를 죽이거나 마음대로 우리를 구제하는 악의적인 주인이 아니다. 그는 [인간애를 보여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3)

 

이것은 결국 예수가 언급하는 신은 여호와와 같이 따로 외부에 존재하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고, 예수의 내부에 존재하며 그와 함께하는 일체입니다. 힌두교의 신 아르주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거나 부처가 해탈을 이루어 신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예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고 이를 설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이 될 수 있으며, 결국 일체가 됨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5장에서 옛 현자들이 말한 것 이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계속적으로 반복하였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험한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22), 이혼(31)과 모든 맹세를 금지하고(34), 복수를 비난하고(38), 고리대금업을 저주하였다(42). 또한, 그는 관능적인 욕구는 간음과 같다(28)고 말하였다. 그는 보편적인 용서를 바랐다. 순수한 예배, 사제나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가 없는 종교, 마음의 느낌과 하느님의 모방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즉각적인 양심의 교감을 이루는 것이 예수가 앞에서 열거한 법칙의 결과일 것이다.” 4)

 

기독교에서는 이승의 업보에 따라 사후에 영원히 거주할 곳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처음부터 모든 존재가 천당에서 살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신의 지식과 능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괜히 불편한 이승에서의 삶이라는 중간 단계를 하나 더 만들어 놓고, 누구는 천당에 보내고 누구는 지옥에 보내고 하는 번거롭고 복잡한 절차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신이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존재에게 불완전한 이승에서 사는 수고를 감내하도록 하거나 지옥으로 보내 영원히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런 존재는 사랑의 신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천당과 지옥은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고, 이승에서 살면서 그런 상태를 경험하며 사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존재라면, 모든 존재가 이승에서 어려운 삶을 경험하는 단계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본인과 함께 천당에서 모자람 없이 서로 도우며 살도록 배려했어야 합니다.

 

신이라면 이승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승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저승에서는 피곤하지 않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기득권층과 성직자들이 자신들만의 편익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신도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마음껏 부리려고 사후세계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장할 수 없는 저승에서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담보로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천당에서 이루어질 신의 보답을 당근으로, 지옥에서의 고통을 채찍으로 활용합니다.

 

만약 신이 자비롭고 인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진정으로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천당에 있다는 무궁무진한 보화들을 이승에 내려보내 그곳에 살고 있는 인류나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종교에서 숭배하는 신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이렇게 쉬운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사후세계에서의 보상이라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약속만 남발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믿는 신이 전지전능하고 박애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 공염불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춘 존재가 천지창조를 하여 만물을 만들었다고 하면, 이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고, ‘그다음은이라는 끝없는 질문이 반복되는 귀납적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전지와 전능은 상호 배타적이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의 전능을 발휘하여 어떤 식으로 개입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꿀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이 미리 안다는 것은 개입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5)

 

인간만이 신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나 특정 국가의 국민이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만연했던 민족 중심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자애를 베푸는 존재라 불리는 신이 만물을 만들었다면, 그는 모든 인간, 나아가 모든 존재를 구분 없이 똑같이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체 중에 특히 인간만 따로 편애하는 것은 인간만 창조했다는 것이 되고, 다른 존재는 다른 누군가가 창조하였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논리로 비화될 수 있고, 이것이 진실입니다.

 

신은 진리여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하지 않으면 절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이 아닌 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존재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진리인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는 주장은, 공상이나 무지의 소치가 빚어낸 잘못된 인식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우화일 뿐 어떠한 설득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나 모든 현상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기적이나 부활 등을 빌릴 필요가 없는 상태가 진정한 진리며, 이를 신의 섭리(攝理)라 칭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진리는 자연법칙이고 그것이 바로 신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자연법칙 속에서 진리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섭리라는 단어에는 아프거나 병에 걸린 몸을 잘 조리하다라는 뜻뿐만 아니라,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혹은 우주 삼라만상에 숨어 있는 신의 뜻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자를 보면 손 하나와 귀 세 개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섭리는 마음의 손을 치켜올려 육체에 달린 두 개의 귀가 아니라 오랜 묵상을 통해 하심(下心)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세 번째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영감이다.” 6)

 

방법론적 측면에서 우리는 메시아라는 용어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왕이나 사제 혹은 다른 특정 인물로서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7) 구원은 과연 어떤 중개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왕이나 재판관이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들이 이승의 사회 제도와 같은 것이 저승에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파생된 개념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만 하고, 그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결정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신도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런 과정은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완벽한 존재가 신이어야 한다면, 신학자들의 당연한 의무는 신의 완벽한 속성을 찾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이나 발견이 이루어지면, 이에 따라 보다 합리적이고 완벽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다시 묻고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막고 무조건 자신들의 구시대적인 견해나 논리에 기반을 둔 불완전한 신을 믿도록 강요하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연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나 국가 그리고 인간 본위를 초월하는 진정한 신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에 따른 교리를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출처:

1) The Laughing Jesus,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ree Rivers Press, 2005: 201

2)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7: 50

3) The Life of Jesus, Ernest Renan, BiblioLife, 1863: 106

4) The Life of Jesus, Ernest Renan, BiblioLife, 1863: 110-111

5) The God Delusion, Richard Dawkins, Bantam Press, 2006: 101

6) 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21세기북스, 2015: 272

7)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임마누엘 토브 외 12, 임미영 박사 엮음, 쿰란출판사, 2008: 107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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