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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6) 종교의 본질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4/15 [08:03]
“절대자라는 가공의 존재 내세워 그의 말을 전달한다고 포장”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6) 종교의 본질

“절대자라는 가공의 존재 내세워 그의 말을 전달한다고 포장”

김병윤 | 입력 : 2022/04/15 [08:03]

일반인들이 추상적인 개념의 신을 수용하는 어려움을 갖고 있음을 모든 종교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말을 전달했다고 하는 대리인들을 신의 경지로 올려놓고, 이들을 숭앙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부처, 이슬람교에서의 무함마드, 개신교에서의 예수, 천주교에서는 예수에 더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까지, 힌두교에서는 크리슈나 등을 신격화하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은 신이라는 가공의 존재보다는 한때 실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믿음이 보다 확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이들이 가공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신도들이 그들을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이들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더해 주고 신도들의 믿음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질적으로 지배 계층이 주장하는 신은, 바로 자신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직접적으로 자신들을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절대자라는 가공의 존재를 내세워 그의 말을 전달한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선구자, 예언자, 구세주, 교황이나 목회자들을 앞에 내세워 피지배층에게 자신들이 창조한 신을 맹종하고 신(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라고 주문합니다. 신도나 백성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가공된 재물이나 산출물에 대한 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이 중간에 착복하는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신의 말을 전하는 존재라고 불리는 종교의 창시자의 말을 신도들에게 알린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종교 종사자들이나 이들과 연대하는 지배 계층은 실질적으로 신의 역할을 대리하며, 신도들의 귀중한 재물과 시간을 빼앗고 이승에서의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조직화된 종교는 우리를 내부로 향하게 만들려고 하고, 엄청난 제약을 지닌 세상 속에 속박한다. 이들은 항상 세계를 서로 싸우는 패거리로 나눈다. “참된 종교의 추종자들과 가짜 종교의 추종자들을 판단하여 분리 구별한다. 그러나 이런 표지(sign, 標識)들은 생명, 사랑, 존재 그리고 의식 등으로 경험되는 하느님 경험의 부분이 될 수 없다.” 1)

 

각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예수님이나 무함마드 등이 실존했다고 주장합니다. 믿는 대상의 실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인들에게 신뢰성과 접근 가능성을 높입니다. 이로 인해 실존성에서 밀리고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존재보다, 실체적으로 존재했던(또는 했다고 믿는) 매개자에 대한 믿음과 추종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식의 종교 관행은 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로든 주조한 형상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호와의 지침에도 어긋납니다.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을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이유는, 일반 신도의 믿음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존했다고 믿는 대상을 보며 숭배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경우를 보면 부처가 따로 신을 지정하지 않았고, 본인을 신이라고 하지 않고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신도나 불교에 종사하는 성직자들이 부처를 신격화하고, 다른 무수히 많은 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 비로자나불 등)을 만들어 내 다신교를 숭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천당에 가려면 신이 아니라 무함마드에게 잘 보여야 한다. 종이 주인으로 바뀐 것이다. 결국 선지자가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2)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의미를 찾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의미를 찾는 행위이다. 종교는 외부에 있는 신을 향한 여행이 아니라, 인간성의 중심을 향한 여행이며, 거기에서 우리의 분리감(分離感, 떨어져 개별화 된)의 두려움을 깨치고, 초월, 일치감, 무시간성, 그리고 마침내 영원성의 의미 속으로 들어간다.” 3)

 

믿음과 기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5-8)라며 의심을 품지 말고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라는 말도 있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라 하더라도, 이것의 본질이 객관적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이 어려운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의 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지진이나 화산이 신의 노여움의 표현이라고 믿었던 것이 과학적 규명을 통해 그 본질이 밝혀졌다면, 그동안 믿던 바람의 신과의 관계를 끊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이를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과학은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정확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고, 발전되어 갈 것입니다. 일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내용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완벽한 신의 말이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나 통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만약 경전에 기록된 것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내용이라면 이런 믿음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경전 내용 가운데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경전의 신성함이 퇴색되고 가치가 떨어집니다. 성직자들은 이를 우려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이나 쿠란이 많이 팔리고 널리 배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내용이 진리로 입증되거나 사실로 굳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입증 가능해야 하고 진실에 근거하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천사, 악마, 마녀에 대한 정의는 정확하지 않고 누구도 이들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처녀의 임신, 죽은 후 부활, 선지자나 예수님이 펼쳤다는 기적 등은 입증할 수 없고, 이후로는 그 누구도 이런 것을 재현하였다는 신빙성 있는 사례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것도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도가 없습니다. 설령 진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나타나더라도 정체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철저히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에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될지 모르는 성직자나 종교지도자는 더더욱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철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정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병이 낫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지가 절단된 사람이 사지를 돌려달라는 기도를 하여 효험을 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병이 나았다 해도 신에게 기도해서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나을 수 있는 병이 요행히 치유된 것일 뿐이며, 이렇게 치유된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는 병의 차도나 치유가 신의 가호로 인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는 병이었고 낫고자 하는 의지와 치료법이 잘 맞아떨어져 나타난 부산물일 뿐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낫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니, 포기하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치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깨닫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게 하나님이 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 마음에 든다는 게 결국은 사람들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다.” 4)

 

우리의 기도가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을 위한 기복(祈福)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내부는 물론이고 모든 존재에 공히 존재하는 존재의 본질이며 생명의 원천인 무유를 인지하고 원만한 교제와 서로의 공존을 기원하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는 긍정적인 파동을 타고 기도의 대상은 물론이고 모든 존재에게 고루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상대를 증오하는 것이 되면, 이 또한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게 부정적인 파장을 전달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고 사랑의 원심력을 키워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원심력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구심력이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와 메아리의 반향은 언제든 일어나는 자연현상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만 기도하지 말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1)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239

2) The Laughing Jesus,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ree Rivers Press, 2005: 100

3)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231

4) 일상적 폭력 폭력적 종교, 이종록, 쿰란출판사, 2017: 202-203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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