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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30) 영(零)의 의미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4/29 [08:16]
한 인생 마치며 떠나는 순간, 인생살이 더하기 빼기의 합은 결국 零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30) 영(零)의 의미

한 인생 마치며 떠나는 순간, 인생살이 더하기 빼기의 합은 결국 零

김병윤 | 입력 : 2022/04/29 [08:16]

양자가 있으니 전자가 있고,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이 있어 서로 상쇄되어 영()이 됩니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고 양성자와 전자는 똑같은 크기의 양전하와 음전하를 갖고 있으며,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와 전자의 숫자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원자 내의 양전하와 음전하를 상쇄하면, 전하의 양은 영()이 됩니다. 그리고 물질은 그에 상응하는 반물질이 존재하게 되고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둘이 상쇄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호킹 박사는 우리의 의지(意志, will)와 같은 연속적인 세계를 기술하는 모든 자연법칙은 보존되는즉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양의 에너지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에너지 보존의 법칙저자 주). 빈 공간 속의 에너지는 시간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상수를 갖는다. 우리는 특정 공간의 에너지를 같은 부피를 갖는 빈 공간의 에너지를 차감함으로써 계산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진공에너지를 상수 0으로 설정할 수 있다. 형체(body)의 에너지는 0보다 큰 양수(陽數, positive). 우주 에너지 총량이 항상 0이어야 하고 형체를 만드는데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어떻게 삼라만상(森羅萬象, whole universe)이 무로부터 창조될 수 있을까? 중력의 법칙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중력은 인력(引力, attractive force)이므로, 중력 에너지는 0보다 작은 음수(陰數, negative). 결론적으로 빈 공간은 안정적이며, 별이나 블랙홀과 같은 형체들은 무()로부터 그냥 생겨날 수는 없지만 삼라만상은 무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1)

 

기존 종교의 이론가들과 그리스 철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이승에서의 삶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저승에서 이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대교도 전통적으로 지구에서의 삶이 우리의 완전한 인간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 후의 삶이 있다고 믿는다. ‘다음 세상이나 올 세상은 왜 나쁜 일이 선량한 사람에게 생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나, 우리 삶과 세상의 신비 뒤에 숨은 이유가 모두 드러나는 보다 완전한 세상또는 진리의 세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2)

 

하지만 모든 개개인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며 각각의 경험에 점수를 매겨, 이들을 더하고 빼면 그 합은 영이 될 것입니다. 마치 존재가 반대 존재와 공존하며 만나면 영이 되듯이, 이승의 삶에서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넘침과 모자람의 모든 크기를 더하고 빼면, 마치 진동의 마루와 골의 높이와 깊이가 서로 상응하여 이 둘을 합하면 영이 되듯이, 영이 됩니다. 그 높이나 깊이의 크기가 다를 뿐이지 이 둘을 합하면 언제나 영이 되는 속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의 구성 요소가 진동이기 때문에 이 계산법은 어느 존재에게나 통용됩니다.

 

만일 이승에서의 불공정이 저승에서의 보상이나 처벌로 무마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이승에서의 불합리한 처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이승에서의 불공정이나 불평등은 개선될 수 없습니다. 제도가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그대로 수용하고 불평하지 말고 살라는 주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후세계를 상정하고 이승에서의 불공정과 불공평을 참고 살라는 식의 가르침이 사실 구약성경에 근거한 종교들의 적폐였습니다. 예수나 부처는 이런 불합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승에서 모든 존재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받고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무유라는 것과 관련하여 중국의 철학자 장자(기원전 369?~286)가 일찍이 天門者無有也. 萬物出乎無有. 有不能以有爲有. 必出乎無有. 而無有一無有. 聖人藏乎是’(장자, 경상초 23:12) “천문이란 무 자체이며 만물은 이 무()에서 생겨난다. [모든 형체를 지닌] ()는 본래부터 [형체를 갖추고 있었던] 유가 아니고 무[라는 장연의 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모든 것이 무이며 유는 하나도 없다. 성인은 이런 경지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3) 앞의 두 구절은 하늘의 문은 무유다. 만물은 무유에서 생겨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무유는 하나의 단어로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통합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고, 없는 것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공은 색의 가장 원초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유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이 공존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반대의 속성을 갖는 것과 함께 존재합니다. 어둠은 빛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높은 곳은 낮은 곳이 존재하기 때문에 높다고 인지되는 것이며, 추위 또한 더위가 있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얻는 것은 잃는 것이 있기에 의미를 갖게 되고, 가졌기 때문에 잃게 됩니다. () 또한 악()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인정되며, 행복 또한 불행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생명체가 생을 마치면서 다른 존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다거나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나, 존재를 이루는 물체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있음과 없음이 합해져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있음이라는 상태는 특이점으로, 그 크기는 너무 작은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있음은 없음과 같은 수준의 것이며, 그것은 원자보다도 훨씬 작은 것입니다. 이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쇄된 상태의 모습이며, 이는 영()과 같은 상태로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파생되는데, 파생된 존재는 그 반대의 존재를 동반하고 있으며 이 둘이 합쳐지면 원래의 상태인 영으로 돌아가는 속성을 갖습니다. 양자와 전자, 빛과 어둠, 젊음과 늙음, 여름과 겨울 등 모든 존재가 그에 상응하는 반대의 존재와 합해지면, 없는 상태 즉 영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든 우주의 만물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순환을 반복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이런 진리를 깨우치고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쳤습니다. “이 질문(모든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간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 그리고 세대를 갖는[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모든 것에 적용해 보면,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더욱 쉬어질 것이다. 모든 것은 반대 속성으로부터 생성된 그에 상응하는 반대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선과 악, 정의와 부정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며반대의 속성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반대 속성이 있다. 나는 이것이 모든 반대 속성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예를 들면 위대해지는 것은 약소해진 이후여야만 한다. 그리고 약소했던 것은 한때는 위대한 것이어야만 한다. 약함은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빠름은 느림으로부터 나온다. 악화는 나아짐으로부터, 보다 정의로워짐은 보다 부정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반대 속성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것이 그 반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확신한다.” 4)

 

위기(危機)와 통쾌(痛快)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위험과 기회는 공존하고 위험이 커질수록 기회 또한 커지며, 아픈 통증이 지난 후에 쾌감이 옵니다. 이것 또한 더하기 빼기의 합은 영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합니다. 사업을 이루는데도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을 해야만 그 수익이 커지며, 참고 견딘 고통의 크기가 커질수록 자신이 이루는 성과 또한 커져 큰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여름이 있으면 겨울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볼록한 부분이 있으면 상응하는 오목한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에 상응하는 반대되는 성향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한 쪽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험한 정도의 강도와 세기에 버금가는 정도로 반대쪽의 강도와 세기를 느끼게 됩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보지 않고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큰 부를 갖지 못한 사람이 커다란 빚을 질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치 음과 양이 합하여 영으로 돌아가듯이, 자연은 이 모든 더하기와 빼기의 균형을 맞춰 영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한 인생을 마치며 마지막에 떠나는 순간 되돌아보면 인생살이 더하기 빼기의 합은 결국 영이 됩니다.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자연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얻고 즐기고 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자신의 노력에 비해 단기간에 얻은 것이 많다고 한다면, 사는 동안에 그에 상응하는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기간의 길고 짧음이 영원히 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기가 성취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일 뿐입니다. 만약 어떤 성과를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시간과 돈의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과 돈의 투자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무너지고, 백일몽(白日夢)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 뿐입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물이나 명예를 추구하려는 뜻이 없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노력과 실천으로 성과를 일궈내야 합니다. 마치 농부가 수확을 위해 씨를 뿌리고 지속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논하면서 항상 행복을 느끼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이라는 골의 깊이를 경험하지 않고, 행복이라는 마루의 높이를 논할 수 없습니다. 능력의 한계, 도전과 실패, 질병이나 상실 등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큰 기쁨이나 행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의 참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각 개인은 단지 자신이 누리고 싶은 파장의 크기를 설정하거나 선택할 뿐입니다.

출처:

1) The Grand Design, Stephen Hawking, Bantam Press, 2010: 179-180

2) The Talmud, A. Parry, Alpha Books, 2004: 258

3) 장자, 안동림역주, 현암사, 1993: 578-9

4)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84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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