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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21세기 무속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10/12 [13:14]
무속에서의 신과 의례. 그리고 기독교 불교에서의 무속적 요소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21세기 무속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下)

무속에서의 신과 의례. 그리고 기독교 불교에서의 무속적 요소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10/12 [13:14]

<연재순서>

() 무당과 굿의 정의-성직자, 그것도 하늘의 위엄을 통해 신탁을 전하는 대리자

()무당의 입무과정(入巫過程), 굿의 행태와 기능

()무속에서의 신과 의례. 그리고 기독교 불교에서의 무속적 요소

 

무속에서는 깊은 관계를 가진 신이 굿에 등장한다. 굿은 보통 열두거리라는 과정으로 되어 있고, 이 열두 거리 안에 신들이 모셔지는 것이다. 한거리라 하여도 많은 신이 모셔지는 것이지만, 이들 신은 대개 같은 종류나 부류에 속하는 신들로 기능이 비숫한 것이 상례이다. 가령 대감거리라 하여도 터줏대감, 걸립대감 등 명칭이 다양하지만 실제의 기능면에서는 매우 비슷하다.

 

열두거리 신을 살펴보면-본량(本鄕), 불사(佛事), 성주(成造), 조상(祖上), 대감(大監), 창부(倡夫), 별상(別相), 호구(戶口), 산신(山神), 말명(馬命), 가망(感應), 제석(帝釋), 걸립(乞粒) 등이 있다.

 

대감과 성주-집이 위치한 터나 집과 관련

산신-이 집이 속해서 모시는 무락신

말명이나 가망-그 집안의 죽은 사람인 조상신이 있고 또 단골 무당이 죽은 것은

제석이나 별상, 호구신-어린이나 어른들의 수호신.

창부신- 놀기를 좋아하는 신 등이 있다.

 

이 신들은 굿이 잔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신들은 자기들이 임재한 집을 비롯해서 지역에 한정되어 있거나. 아니면 자기 조상이라는 혈연적인 테두린 안의 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속에 신은 우주를 만든 창조신은 없다. 하느님이 존재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다르다. 무속에서는 선신도 악신도 없다. 별상이나 호구는 인간에게 병을 주는 신이지만 모셔진다. 다시 말해서 굿에서는 선신 뿐 아니라 악신도 모시고 잔치처럼 베풀어 먹고 즐겁게 놀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병을 주는 악신마저도 부려서 함께 즐기게 하는 것이다. 싫어하면서도 모시지 않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모시는 신들이다. 

▲ 은산 무복.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의 무복.     


무복(巫服)-굿 할 때 옷만 보고도 어느 거리굿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무복이란 굿을 할 때 무당이 입는 옷을 말한다. 따라서 무당이 일상복으로 입는 것이 아니고 굿이라는 의례를 행하기 위하여 입는 옷을 말한다. 무당들은 흔히 신복(神服)이라고 한다. 신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무당이 굿을 할 때 입는 못만 보고도 지금 어느 거리굿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례로 장군신이 내렸을 때에는 장군처럼 위엄을 부리고, 동자신이 내렸을 때에는 10세 미만의 동자와 같은 행동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선녀가 내렸을 때에는 선녀의 교태를 부린다. 100kg이 넘는 거구 사내가 어린아이 목소리를 내고 사탕을 먹고, 여인의 교태를 부린다. 맨 정신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당사자도 부끄러울 짓이 굿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제물(祭物)-장장 중요한 것은 떡, 그 다음은 고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굿의 중요한 제물은 말할 것도 없이 떡이다. 비리 정치인, 공무원들이 받는 돈과 관련 떡값이라는 말이 있다. 굿 판에 가면 굿 도중에 떡을 돌리는데 이 떡을 복떡이라고 하고 떡을 받을 때에는 떡값으로 어느 도 돈을 내놓는 것이 예의처럼 되어있다. 그 떡값을 생각하고 떡값이란 말이 나온 이라 생각한다.

 

굿판에서 사용하는 떡으로는 시루떡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전병류와 계피떡류도 있다. 시루떡이라 하여도 흰 쌀가루만으로 쪄서 만든 <백설기>가 있고, 팥 고물을 가지고 켜를 안쳐서 만든 <시루떡>이 있다. 시루떡을 꺼내기 위해서는 열십자로 긋고 꺼내게 되어있는데 이런 모습을 두고 일부 신학자들은 우리민족은 고래로 성호를 긋는 전통이 있어 하느님을 마지하는데 별 저항감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둥근 시루 속에 떡은 이 방법 외에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일이라 견강부회(牽强附會)란 생각이다. 흔히 팥을 두어 만들기 때문에 <팥 시루떡>이라고 한다. 고사나 굿에는 팥 시루떡이 중심이 된다. 백설기는 제석(帝釋)이나 삼신을 위한 떡이라 하여 어린아리를 위한 특별한 의미가 있어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집안 가족끼리만 먹는 등 시루떡과는 의미가 다르다.

 

떡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기다. 특히 소고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돼지고기를 즐긴다. 불교에서는 육류를 금하기 때문에 제물로 사용하지 않지만 유교 제사에서는 중요한 제물로 사용한다. 그러나 유교와 무속에서 고기의 사용 의미는 전혀 다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즐겨먹는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무속에서는 인간들이 가장 맛있다고 하는 부분이 아니고 신이 즐거워하는 부분이 제물이 된다. 예를 들면 소의 다리나 머리가 중요한 제물이 된다. 우두(牛頭)나 우족(右足)은 반드시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어도 신이 즐겨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두위에 소머리(돼지)를 세우고 삼지창 사이에 소(돼지)다리을 걸면서 신이 강림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도 필요한 것, 돈이 돌아야 흥

 

제수란 말이 금전이나 돈에 대한 운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무속에서 돈은 중요하다. 신의 세계에서도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신에게 돈을 바친다. 지전(紙錢)이라 해서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를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굿을 할 때 지전이나 현금을 걸어 놓는다. 때로는 지전을 때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게 하는데 간혹 진짜 돈을 태우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하겠다는 돈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지전을 사용하는 것은 불교계에서도 종종 보인다. 생전예수제를 치를때 엽전형태의 지전을 사용하기도 하고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돈을 확대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단위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동그라미 숫자를 그려놓고 있다. 굿에서 무당이 얼굴이나 치마끈, 가슴, 잔등에 돈을 달고 춤추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이 돈은 <별비>라고 하는 것인데, 기분을 돋우기 위한 일종의 <>과 같은 것이다. 굿 값이라고 해서 몇 백에서 천 만원을 받고 굿을 하게 되는데 이때 무당은 굿을 청한 사람에게 일정한 돈을 돌려준다. 굿을할때 다른 무당,악사 들에게 줄 <별비()>로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다.

 

굿판은 돈이 돌아야 흥이난다. 그 흥이 굿판의 모습이다. 그래서 굿을 하면서 수시로 악사는 물론 구경꾼에게 돈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즉흥성을 가미한 그들만의 암호가 존재하고 있다. 주로 무당이거나 관련인사들이 받게되는데 가끔 무당이 실수를 하여 엉뚱한 사람(구경꾼)에게 건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다시 받아낼 수 없어 주면서 공수를 빙자한 영업용 덕담을 건낸다. 거기에 걸리면 안된다. 받은 것은 받은 것이다. 그 액수도 기만원에 불과한데 굿을 하면 하는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굿판은 철저하게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귀신도 먹여야 부린다.’는 말처럼 돈이 철저하게 개입되는 것이 무속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관계자들이 섭섭한 수준의 이야기다. 

 

무속의 역사성

 

우리들이 무속에 대한 두 가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무속이 매우 오랜 우리민족의 원시종교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주 오랜 고대로 소급하면 소위 제정일치의 무당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결국 단군이 무당의 시조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제사장으로써 무속인이 지금과 같은 천민의 주준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 설득력은 많이 떨어진다. 

 

개신교에서 발견되는 무속적 요소

 

개신교에서 보이고 있는 기복적인 면이 무속으로부터 받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기복적인 면은 세계종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복신앙을 무속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무교적인 모습은 그보다 기도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한국의 개신 교회를 보면 새벽 기도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어느 정도의 무교(혹은 불교)적인 모습이 보인다. 서양의 교회에서는 새벽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데 한국의 무교나 불교에서는 같은 모습을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확실하게 무교의 영향을 볼 수 있는 개신교의 모습이 몇 있는데 우선 목사, 그 중에서도 부흥사들이 가끔 애용하는 산 기도라는 것이 그것이다. 일부 목사들은 자신의 영력(기도빨)이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산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 집중적으로 기도를 한다. 이 모습은 무당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빼다 닮았다. 무당들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과의 영적인 유대 관계가 느슨해지고 영적인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면 곧바로 제물들을 장만해 기도 처로 이름난 산을 향한다. 자기와 인연이 있는 몇몇의 기도 처를 순례한 다음 돌아와 굿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굿을 진적 굿이라고 부른다. 진적 굿은 무당이 손님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 하는 굿이다. 그쪽 말로 하면 영빨을 세우기 위해 신령님께 올리는 굿이 진적 굿인 것이다. 어떻든 현대판 서양적 무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기독교의 부흥사들은 무당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능력을 새로 갖춘 부흥사는 종종 부흥회를 열게 되는데 이 부흥회의 모습이 보는 각도에 따라 매우 무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부흥회에 참석하는 기독신자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엑스터시 상태에 들어가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방언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를 보면 그것이 무당이 공수를 받기 위해 거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부흥회가 진행되는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보면, 우선 찬송가를 몇 십 분이고 부르는 순서가 있다.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노래를 오랫동안 부르면 마음이 서서히 고조되어 엑스터시에 가깝게 가게 된다. 이어서 목사의 기도가 잠시 진행된다. 이때에도 목사는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등 매우 단순한 설교를 한다.

▲ ‘통성 기도’에서 예배장의 열기는 더없이 고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망아경 속에 빠져드는데 이런 모습은 무당이 굿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다음이 부흥회의 하이라이트인데 이 순서를 보통 통성 기도라고 부른다. 이 순서에서 신자들은 손을 들어 아래위로 흔들면서 큰 소리로 기도를 시작한다. 큰 소리이기 때문에 통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예배 장은 와글와글하는 난장판으로 바뀐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복 받치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다 곧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신자들이 내뱉는 방언이 시작된 것이다. 예배장의 열기는 더없이 고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망아경 속에 빠져든다.

 

이런 모습은 무당이 굿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느 시점에서는 굿처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굿으로 보인다. 큰 굿이 그저 기독교의 외양만 취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개신교의 부흥회를 '크리스천 푸닥거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부흥회는 기본 골격이 완전한 굿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가장 큰 목적은 신령으로부터 공수를 받아내는 것이다. 무당은 이 공수를 받기 위해 노래와 춤으로 신령을 기쁘게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격렬한 가무를 통해서 망아경을 스스로 유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과정이 앞에서 본 부흥회에서도 발견된다. 기독교 신자들은 찬송가를 격렬하게 부르고 몸을 흔들어 가면서 큰 소리로 기도함으로써 스스로 망아경을 유도하는 것이다. 망아경을 도출하는 데에는 노래와 춤이 필수적인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터지는 게 방언이다.

 

무당에게 공수가 있다면 이들에게는 방언이 있다. 공수와 방언(신의 소리를 듣고 제3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방식도 중간에 동역자가 있어야 한다.) 공수가 안 터지면 굿에 영험이 전혀 없듯이 부흥회에서도 방언이 안 터지면 예배의 의미가 영 퇴색한다. 방언이 안되면 심지어는 기돗발이 안 먹혔다느니 은혜를 못 받았느니 하면서 크게 애석해 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야 만족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술도 필름이 끊길때까지 23차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적당히 하고 끝내는 게 없다. 

 

무속과 불교

 

서울 지방 굿에서 가장 불교적 색채가 중요한 것은 불사거리와 지노귀굿이다. 불사맞이 또는 천궁맞이라고도 하며 안마당이나 마루에서 무녀가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바라 들고 춤을 추는 거리이다. 흰 장삼에 고깔을 쓰고 염주를 목에 걸어 불교적 복색을 하고 굿을 한다. 바라를 독주하면서 <> 타령을 부른다.

 

불사맞이와 함께 불교적인 것으로 재석거리가 있다. 이것도 불사맞이와 거의 같은 성격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석거리로 대치되는 경우도 많다. 재석거리에서도 무녀가 제금(바라)을 들고 독주를 하거나 한다. 또 중 타령을 부르고 계금 위에 밤을 얹고 <바라타령>을 부르면서 <바라()를 판다.> 사람들이 밤을 사먹는다. 이를 <바라를 산다.>고 한다. 이 밤을 사 먹으면 특히 어린아이들은 수명 장수한다고 하는 신앙적 의미가 있다.

 

불교적 특색이 강한 불사맞이나 제석거리에서는 주로 어린이의 수명장수를 기도하는 신앙에 특징이 있다. 도교의 영향이라고 보이는 칠성신도 수명장수와 밀착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칠성신이 순수한 도교의 신이라 하기보다는 이미 중국에서 불교화한 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적 색채가 강한 신이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수호신으로 되어있다. 불교사찰 안에 있는 칠성각이나 산신각이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수명장수 즉 어린이 수호신으로서 기능을 하는 점에서 불교와 무속이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제석 신을 모시는 거리에서 소놀이굿을 하고 있으며 또 제석 항아리가 농경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적 신인 제석신이 풍요를 비는 농경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잇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적 신이 어린이의 수명장수와 농경의 풍요 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는 것이 <고사반>이다.

 

무속세계에는 지옥이란 관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가 되면 뜬귀나 잡귀가 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관념은 아무래도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노귀굿의 핵심은 무녀가 사자가 되어 망자를 데려와 가족과 대면시키고 대화를 나누고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또 죽음에 대한 확인이고 최후의 이별을 위한 송별잔치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망자는 가족과 함께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 마음 놓고 저승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불교적 세계관은 죽음을 확인하는 내용이고 죽음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서 무속의 세계관을 보완하는 것이다.

 

동해안 지방의 굿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부산 지방에서는 <산오구>라는 굿이 유행하고 있다. 산오구란 죽기 전에 도를 닦는 불교의 예수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의례를 지노귀나 오구라하고, 산 사람을 위한 굿이 <산오구>이다. 주로 노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하는 굿이다. 개인적으로 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여러 노인들 (주로 할머니들)이 계의 형식으로 돈을 모아서 집단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산지방에서 산오구가 잘 행해지고 있다. 산오구굿의 내용이나 형식은 거의 오구굿과 마찬가지이지만 노인들을 가마에 태워 돌거나(전정 밟기) 많은 노인들이 집단으로 행렬을 지어 마당을 돌다가 극락 춤을 추는 것이 다르다. 이러한 산오구는 불교적 영향이 강한 지역에서 행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예수제를 생전에 올린 사람은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는 불교적 신앙에서 영향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부 지역의 무속에 비하여 동해안·경상도 지역의 무속은 훨씬 불교적인 영향이 강한 것 같다. 우선 굿 당 자체의 장식이나 신당의 구성이 불교적이다. 신단을 불화나 조화로 장식할 뿐만 아니라 팔 보살을 그린 신화를 여기저기에 걸고 맨 중앙에는 극락 문을 그려 붙인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탑등을 만들어 걸어 두었으며, 굿 당에서 밖으로 줄을 매고 바깥 기둥에 보신개라는 술이 달린 장식을 하고, 용선을 절어 장식한다. 신단에는 경가위패를 꽂는다. 불교사원의 영단과 비슷하다. 또 많은 거리마다 불교 경문을 외우고는 한다.

 

불교적 특색이 강한 굿(석 또는 거리에 해당함)으로 별신굿 가운데에 시준 굿이 있고, 오구굿의 문굿이 있다. 시준이라 세존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석가세존>을 의미하는 불교적 신명임에 틀림없다. 서울 지방의 무녀의 불사맞이와 마찬가지로 무녀가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염주를 목에 걸고 바라를 들고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오구굿의 문굿은 경북지방의 넋 건지기 굿에서는 <문답설법>이라는 것을 행한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영산맞이>를 하고, <바리공주> 무가를 부르고 나서, 영혼을 씻서 저승으로 보내는 절정에서 용선에 위패를 실어 저승길로 보내는 상징적인 의례를 한다. 영산맞이는 남무들만이 장삼을 입고 꽹과리를 치면서 염불을 외우고 춤추는 불교적 거리이다. 이러한 의식을 한 다음에 위패를 저승으로 보내는 거리가 잇다. 이것이 오구굿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고리짝으로 만든 <신태집>에 위패를 담아서 긴 헝겊 위로 바깥 기둥 쪽으로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고 나가면서 무녀들이 용선가를 부른다. 이런 상징적 의례를 통해서 사령이 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극락을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극락이라는 것은 그저 좋은 곳을 뿐 지옥에 대한 대립적인 구조의 세계는 아니다. 즉 굿을 통해서 가는 <저승>이라는 신의 세계이다. 극락의 불교적이라 하여도 무속세계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교는 무속의례에 형식성을 제공하여 주었을 뿐 기본적인 신앙세계에는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박혁거세-차차웅

 

동국이상국집-상국은 제상이란 말이다. 동쪽나라 제상의 문집이다. 巫老편에 무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황해도 무녀의 모습인데 무녀가 뛰는데 대들보에 머리가 닿을 정도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고있는 무당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죽음, 사후세계의 문제가 서툴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사를 받는 주체는 남자형제, 부모다. 남자를 자손으로 두지 못한 부모는 영원히 제사란 제도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아이를 두지못한 부부 역시 사후 자신이 제사란 의식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사회다. 이런 영혼의 문제를 무속은 보완해주고 있다. 살아생전에 미리 굿을 통해 생전 사후를 돌아보고 남자 자손이 없이 돌아가신 부모를 둔 여자형제들은 진호기라는 의식을 통해 제사를 드리는 것 이것이 무속이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내릴 수 있었던 원인이다. 결국 유교의 조상숭배가 무속의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무속을 천시하고 천대하던 유학자들도 집에서 치러지는 굿에서 마냥 뒷짐지고 있을 수 없는 과정(거리)이 있다. 그것은 조상거리다, 조상의 혼백을 불러내고 그 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되면 주위 눈치를 의식해서도 동참하게 된다. 무속인에게 심한 소리를 들어도 그 소리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그것이 아니라 지금 형체는 없지만 자기의 부모가 나타나 자신을 꾸짓는 것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승려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불사거리에서 무속인이 가사장삼을 몸에 걸치고 고깔을 머리에 쓰고 불사거리를 할때면 웬만한 강심장, 도력이 깊은 승려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라도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무속이 우리사회에서 어느정도 공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아침 매이저 신문사들에서 발행하는 스포츠 신문 하단 광고를 보면 된다. 적어도 몇 개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상단에도 어김없이 오늘에 운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잡지 그 비싼 지면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수용와 공급 그리고 자본력을 말해주는 간접자료라고 생각한다.

 

예수교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동어반복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할 시간을 주지않는다. “믿습니까” “믿습니까를 수차 강요하고 찬송한다. 예배식전 행사로 조용히 기도하고 자기를 돌아볼 성찰의 시간을 주기보다. 찬송(노래),통성기도를 통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리고 전자했듯 동어반복을 하면서 인간의 원초적 카타르시스, 맹아적 현상에 함몰시킨다. 전혀 자신을 생각할 수 없게 하고 믿음을 반복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신자들은 아멘이란 말로 응답하는 이들의 모습은 무속에서 무녀가 신자들게 공수란 명목으로 말을 인정하게 강요하는 것과 같다. 공수란 이름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으로 포장하여 의심의 소지를 싹뚝자르는 것이다.

 

집안에서 주부들은 사제다. 일년에 한번 고사를 지낼때 그 주체는 주부다. 그의 지시에 따라 장독대, 화장실, 벽장(다락) 등등에 떡과 막걸리는 놓고 손으로 빈다. 그때 그 집의 가장을 위해 집안의 중심 마루 제일 높은곳에 올려놓는다.

 

현대 남성들은 특히 자신만의 공간을 잃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방이란 공간이 있어 손님을 맞고 그곳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했는데 지금은 부부의 공동공간, 자녀들의 방이 생기면서 가장의 공간은 사라졌다. 기껏 마음 붙일 공간인 마루, 응접실도 자녀와 부인들에게 TV채널권 빼앗긴 채 지내고 있다. 그래도 매달 호기를 부리던 월급날의 마지막 알량한 자존심도 사라지고 남자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지 알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무속인들을 다중인격자라고 분류한다. 한 몸에 여러 가지 모습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우리 주변, 본인 스스로 생각해 볼때 하루 몇 번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였는가 그 기폭이 짧았던 아니면 횟수가 적은 문제는 있었지만 다중적 성격, 모습을 보인 경험을 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채 다중인격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유교적 생활과 불교적 사유,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무속인을 찾는 다중적 신앙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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