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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우란분경의 효사상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10/26 [08:43]
이 세상에 생존하는 남녀가 모두 전생에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우란분경의 효사상

이 세상에 생존하는 남녀가 모두 전생에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10/26 [08:43]

이 세상에 생존하는 남녀가 모두 전생에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

 

우란분경은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경전이다. 인도의 효 사상과 함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유교의 효사상과 도교의 사상이 습합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분류된다. 이 경은 효를 통한 포교의 방편을 설하고 있다.

 

만약 부모님께서 삼보를 믿지 않으시거든 점차 삼보를 믿게끔 해드려야 은혜를 갚는 것이 되며, 만약 부모님께서 일찍이 계행(戒行)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능히 점차 계율을 지킬 수 있도록 해드리고, 만약 부모님께서 물건을 아끼고 남에게 보시를 하지 않거든 기꺼이 보시를 할 수 있게 해드리며, 만약 부모님께서 지혜가 없거든 지혜를 갖도록 해드리는 등 이와 같은 일이라야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고 하셨다.”는 붓다는 효를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그 스스로 실천을 하고 있다.

 

붓다 자신도 생모인 마야부인의 해탈을 위해 여름 석달 동안 도리천에 승천하여 설법하셨다고 한다. 또한 부친이신 정반왕이 중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내세의 인민이 흉포하여 부모의 길러준 은혜를 갚지 아니할 것을 생각하시고, 지금 불효한 이들과 내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예법을 세워야겠으므로 당신 스스로 부왕의 관을 메려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사천왕이 부처님 대신 관을 멜 것을 간청하여 결국 부처님은 몸소 향로를 들고 상여 앞에 서서 장지까지 가셨다고 한다. 즉 모든 불보살만 하여도 부모에 효도함을 근본으로 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마침내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부왕의 명에 따라 도리천에 오르시어 삼 개월 동안 설법하시어 어머니에게 깨달음을 얻게하여 은혜를 갚은 효의 실천으로 정각을 이루었음을 가르치고 있다. 승보공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인도사회 효사상과 유교의 효사상, 도교의 사상이 습합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

 

해마다 음력 칠월 보름이 되면 사찰마다 조상천도재를 베풀어서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이와같은 의례는 우란분재며 우란분재는 우란분경봉분경에 근거하고 있다.

 

불교의 효는 표층적으로 보면 사회 보편윤리로서의 효 관념을 존중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자식을 낳고 양육하여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의무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심층적인 차원에서 불교가 제시하는 효의 본질은 부모를 붓다의 법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우란분경은 현재 원전이 전해지지 않는 경전이다. 인도사회 효사상과 유교의 효사상, 도교의 사상이 습합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연구되고 있다.

 

위경(僞經, 혹은 疑經) 즉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으로 보는 입장이 없지 않다. 위경은 거짓경전이며 의미가 없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종교 교의는 그 시대 사회의 인민을 구제할 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인데, 문화체계가 다른 교의가 이문화(異文化)세계를 만났을 때 원래의 교의에 의거하여 새로운 해석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위경이기 때문이다. 

▲ 목련이 부처님 도움을 받아 모친을 구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봉선사 벽화  


우란분경은 목건련의 지극한 효성을 배경으로 탄생한 경전이다. 우란분재의 또 다른 특징은 머슴들의 휴가날이기도 한 백중(百衆) 또는 백종(百鍾)날이다. 이날은 불교식 풀이를 하면 100가지 음식으로 차려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려 저 세상으로 간 선망부모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법회다. 백종은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 놓고 천신(天神)을 하는데서 유래했다.

 

종묘(宗廟)에는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하는 일도 있었다. 농가에서는 이날 머슴을 하루쉬게 하고 돈을 준다.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산다. 그래서 백중장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에는 백중와살이라는 산신이 있어 백중을 고비로 익은 오곡과 산과를 사람들이 따가면서 허전하여 샘을 내는 바람을 일으킨다고 해서 산신제를 지내는 일도 있다.

 

우란분재는 단순히 불교에서 조상을 위한 망혼제 성격을 가진 하루행사가 아니다. 도교와 우리민족 고유신앙이 함께 행해진 날이다. 다만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불교에서만 명맥이 이어지면서 불교 행사로 정착되었다. 우란분절은 부처님오신날’.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과 함께 불교에서 중시하는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다.

 

김호성은 인도에서 성립되었으며 중국에 전래되면서 가필되고 내용이 늘어났으며 불교의 출세간적 가치와 바라문교나 유교의 세속적 가치와의 갈등과 그 타협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이다.

 

종교 신크치티즘적(습합) 모습이 다분하게 나타나 있다. 본 연구는 종교학에서 말하고 있는 신크리티즘(습합)적 성격뿐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효에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체중생을 부모와 같이 여기는 동채대비사상이 불교적 효행의 본질

 

불교인들의 이상적 사후세계라 할 수 있는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7종염불을 권하고 있다. 자비하신 붓다께서도 오역죄와 정법을 효와 함께 비방한자는 제외하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모시며 자비심으로 실행하지 말고 열 가지 착한 업을 닦으며 극락정토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제일은 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부모님께서 삼보를 믿지 않으시거든 점차 삼보를 믿게끔 해드려야 은혜를 갚는 것이 되며, 만약 부모님께서 일찍이 계행(戒行)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능히 점차 계율을 지킬 수 있도록 해드리고, 만약 부모님께서 물건을 아끼고 남에게 보시를 하지 않거든 기꺼이 보시를 할 수 있게 해드리며, 만약 부모님께서 지혜가 없거든 지혜를 갖도록 해드리는 등 이와 같은 일이라야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 지극한 공양과 의식을 통해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 선망부모를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이야기와 교훈을 담은 상주 남장사 감로도(250×336㎝, 견본채색, 보물).    

 

단순히 물질적 효뿐 아니라, 부모들이 가르쳐 충고하면 눈을 부릅뜨고 말대꾸하며,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거역하며 반역하느니라, 비유하면 원수와 같이하여 자식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모의 은혜도 모르고, 스승과 친구의 의리는 사람까지 포함했다.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신의 직업에 성실한 것은 최상의 행복이다.”라며, 효를 인간이 누리는 지극한 행복으로 정의한다.

 

육도집경43,섬도사본행 부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면

 

붓다가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생에 모든 부처님을 받들고 지극히 효행을 하였기 때문에 덕이 높아지고 복이 융성하여져서 마침내 하늘 중의 하늘로서 삼계에 홀로 서게 되었으니라, 그때 섬이란 자가 바로 나였으며 국왕은 아난이었고 섬의 아버지였던 자는 지금의 나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였던 이는 나의 어머니이고, 하늘의 제석은 미륵이었느니라

 

윤회는 돌고 도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바퀴가 돌 듯, 지금의 인간관계가 전생, 혹 내생에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생에 부부, 부자, 형제, 자매일 수 있다. 지금의 인연만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섭섭하게 할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한번의 죽음으로 모든 인연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의 죽음 앞에서 예를 갖추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 효는 유교와 관련 이전에도 강조되어 왔다. 대보부모은중경과 불설우난분경을 비롯 육방예경, 불승도이천위모설법경, 본사경, 사십이장경, 대승본생심지관경, 불설효자경, 아함경, 불설부모은난보경, 범망경, 육도집경, 관무량수경, 대반열반경이 있다.

 

불교의 효 사상은 현세적인 물질적 정신적인 부모봉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속의 고통과 괴로움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삼세적 효행이다. 더 나아가 효행 대상이 나의 부모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나의 부모와 같이 여기는 동채대비사상으로 불교적 효행은 그 가치와 완성을 이룬다.

 

불교의 효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윤회를 통해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가 자식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다생의 반복을 통해 일체의 남자는 아버지요, 일체의 여자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 효는 시공간을 넓혀 시간상으로는 일세에서 삼세로 나아가고, 공간적으로는 에서 모두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 효학의 이론적 배경도 현재의 나와 내 부모라는 관점을 넘어서서 삼세에 어우러져 있는 나와 내 부모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확보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효의 관점은 일세에서 삼세로, 한 가족에서 다중의 가정으로 나아간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불교에서는 나의 현세 부모에게 당연히 효를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삼세의 부모에게 효를 행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일체중생들도 전생에는 나의 부모였으므로 효의 마음을 만인에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은중경의 첫 장은 붓다께서 길을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썩은 뼈들을 보시고 그 뼈 무더기에 절을 올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뼈 무더기가 전생의 조상이거나 억겁의 시간에 걸친 부모일 수 있으므로 절을 하노라 하시는 것이다.

▲ 부모은중경의 ‘검은 뼈와 흰 뼈’를 비유한 해인사 사찰벽화   

  

붓다가 길가의 썩은 뼈 한 무더기에 절하는 모습은 곧 불교의 연기사상을 가르쳐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생존하는 남녀가 모두 전생에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전생의 인연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의 부모뿐만 이 아니라 모든 어버이가 모두 다 부모이니,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출가하여 선업을 쌓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점은 출가가 부모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기에 효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는 시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준다. 출가는 나의 현재 실존의 부모에게 행하는 일회성 효의 실천이 아니라 모든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큰 효의 시작이기에 이는 큰 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소중한 불교의 진리를 부모에게 가르쳐서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극락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에 출가는 불교 윤리에 있어서 최고의 효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효 인식...일체중생도 전생에는 내 부모, 효의 마음을 만인에게 행해야

 

우리는 출가자들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세속에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비 현실참여 인식이다. 그러나 불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는 현실문제에 대해 나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출가자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육친적 인연을 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붓다는 출가자는 부모봉양의 의무에서 자유스럽다는 가르침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 붓다는 여러 겁에 걸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그것이 쌓여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즉 모든 불보살만 하여도 부모에 효도함을 근본으로 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마침내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그러므로 서두에 거론한 바와 같이 붓다는 부왕의 명에 따라 도리천에 오르시어 삼 개월 동안 설법하시어 어머니에게 깨달음을 얻게하여 은혜를 갚은 것이다. 혜능은 땔감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도비는 다른 해골을 빌어 장사 지냈다.

 

이 모두가 효와 도를 다한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지장은 스승을 섬기고 아버지를 섬기는 데도 공손하였고 상조는 스승에 효도하기를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고려 시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충렬왕이 국존으로 추대 후 자신의 곁에서 머물 것을 간청한다. 스님은 노모 봉양을 이유로 낙향을 청하고 있다. 어머니가 96세로 별세하였을 때 일연은 어머니의 산소를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부도를 설피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부모님이 나의 몸을 낳으시고, 스승은 나를 바른 길로 나아가게 인도하였다. 스님들도 어버이와 스승 섬기는 일을 소홀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불경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르면서 행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에 삼학을 행하고 남으로 하여금 배우지 않게 하면 이는 스스로에 그치는 불효가 된다. 또한 생각하는 길을 열러 사람을 인도하되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지 못하게 하면, 이는 얕게 알고 깊이 파고 들지 않는 것으로 불효가 된다. 진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알았으나 수생하여 증명하지 못한 것도 또한 불효이다. 참으로 효의 뜻은 밝히기 어렵다. 어떻게 말해 효를 설명할 수 있는다. 모든 중생이 최고의 즐거움을 표현할 없는 과()를 증명하기를 바라는 것이 붓다의 뜻이므로 불자가 되어 붓다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직도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승을 알아 행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법을서 효를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붓다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에 서로 부모였다.”고 붓다는 효를 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답고 올바른 불제자로서의 도리인 것이다. 육바라밀,십바라밀을 널리 행하고 중생계에 수순하여 그 뜻을 성취시키는 것이 모든 중생을 섬기는 것이 된다. ··혜 삼학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한결 같으며, 언행일치로 벗과 사귀는데 반드시 신의로 하는것과 같다.

 

경전에서는 모든 남자가 나의 아버지이고, 모든 여성이 나의 어머니인지라, 나의 생명이 부모에게 생명을 얻었기에 육도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 것이다. 불교에서 효는 시공간을 넓혀 시간상으로는 일세에서 삼세로 나아가고, 공간적으로는 에서 모두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 효학의 이론적 배경도 현재의 나와 내 부모라는 관점을 넘어서서 삼세에 어우러져 있는 나와 내 부모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떼 확보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효의 관점은 일세에서 삼세로, 한 가족에서 다중의 가정으로 나아간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불교에서는 나의 현세 부모에게 당연히 효를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삼세의 부모에게 효를 행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일체중생들도 전생에는 나의 부모였으므로 효의 마음을 만인에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은중경의 첫 장은 붓다께서 길을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썩은 뼈들을 보시고 그 뼈 무더기에 절을 올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뼈 무더기가 전생의 조상이거나 억겁의 시간에 걸친 부모일 수 있으므로 절을 하노라 하시는 것이다.

 

붓다가 길가의 썩은 뼈 한 무더기에 절하는 모습은 곧 불교의 연기사상을 가르쳐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생존하는 남녀가 모두 전생에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전생의 인연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의 부모뿐만 이 아니라 모든 어버이가 모두 다 부모이니,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출가하여 선업을 쌓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능히 살생치 않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광효이다. 스스로 생하여 남에게 권하면 그 공이 배가 되는 것이다. 큰 계가 곧 효가 됨이 여기서 밝혀지는 것으로 다생의 부모에게 갚고자 한다면, 큰 원력을 일으켜 대계에 의해 대효흫 행하지 않으면 족히 갚아질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지장경 중에서 보게 되는 것으로 대사(大士)의 원력이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도탈시키는 것이므로 대효,대원,대계로서 이 이상 더할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 말세 승속들은 모름지기 노력하여 효를 행하므로 만분의 일이라고 자애로운 덕을 같아야 함에 철저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효를 행하는 사람으로서 어버이가 살아계시면 모름지기 지극지심으로 받들어 모시어 착함을 행하도록 하고, 염불하여 극락세계(서방)에 나사게끔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반드시 몸으로 착함을 지어 복이 따르도록 하여 갚아야 한다. 혹은 경전을 독송하여 모든 공덕을 닦아 회향할 일이다. 그러므로 오탁에서 벗어나서 길이 육취를 여의어 무생법인을 증득하도록 하여 물러서지 않는 경지에 오르도록 해애 한다. 세상 사람들의 말하는 효와는 달리 그야말로 출세간의 대효가 되도록 하는 것이 이 연효소(演孝疏) 지음의 뜻이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효를 행하지 못하여 후회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죽은 뒤에도 부모를 구제한다는 불교적 효도관의 우란분경

 

우란분은 거꾸로(접두사 ava) 매달리다(어근 lamb)’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아왈람바나(avalambana)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왈람바나(avalambana)는 불교혼성범어에서 울람바나(ullambana)로 쓰였고, 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오람파나(烏藍婆拏)와 우란분(盂蘭盆)이다. 그리고 죄를 짓고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받는 조상들의 혼백을 구해주고 풀어낸다고 의역한 것이 구도현(救倒懸)과 해도현(解倒懸)이다. 우란분의 은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은 원통형 그릇을 가리키는 중국어인데 여기에 음식을 담아 승려들에게 공양하면 그 공덕이 回向하여 지옥에 떨어지거나 아귀가 되어 도현의 고통, 또는 그 정도의 큰 고통을 받고있는 선조를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우란분재의 본래적 의미이다.

 

우란분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된 용어라는 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고대 이란어인 아베스타(Avestan) ‘우르반(urvan)’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우르반은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우르반을 모시는 프라바르디간(Fravardigan) 축제가 있다.

 

이 축제에서 참가자들이 소나무 가지를 태우는 의식이 있다. 이는 소나무가 타는 향기가 조상의 영혼들을 모이게 한다는 믿음에서 조상들이 집으로 돌아와 공양을 받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도 지역의 민간신앙이 반영된다. 또 자자(自恣, Pravaraṇa)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자자는 불교에서 3개월 동안 안거수행 후 마지막 날에 수행승들이 서로 자기가 범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승려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청한다. 우란분재는 3개월 여름 안거 후 승려들이 모여 자자를 하는 날 열렸다. 이러한 점에서 우란분재의 어원과 자자를 연결 지었다.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은 사진의 축법호가 번역하였는데,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효자 목건련이 전생의 업보로 지옥에 떨어져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를 구제하는 과정을 설하고 있는 경이다. 지옥에 떨어져 헤매시고 있는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부처님께 묻자 부처님께서는 안거 해제일인 음력 715일에 쌀밥에 다섯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시방의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우란분재를 베풀면 그 공덕으로 어머님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의 어떠한 계급을 망라하고 715일에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우난분경의 이야기는 죽은 뒤에도 부모를 구제한다는 불교적 효도관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불교의 효는 불법에 귀의를 통해서 성취

 

우란분경은 인도와 중국을 거쳐 형성된 짧은 경전이다. 한국사회에서 우란분경은 조상천도를 넘어 세상에 나오기전 생명에 대한 천도에 의식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란분경은 조상에 대한 추선으로 시작되었다.

 

붓다의 상수제자인 목건련의 최후는 가장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의 신통력을 질투한 외도들에 의한 전신이 문드러지도록 구타를 당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몇가 지 의문을 가졌다. 신통제일 목련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과 상수제자가 수행자답지 않은 최후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붓다는 그는 전생에 눈먼 부모를 부인과 공모하여 살해한 과보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쌓아놓은 업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업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신통제일 목련조차 피할 수 없었다. 우란분경을 통해 신통제일 목건련의 어머니가 전생에 저지른 악의 행위는 신통제일, 붓다의 십대제자 목련조차 구제할 수 없다. 업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우란분경은 지극한 효는 단순히 물질적 보은과 함께 불법에 귀의할 것을 설하고 있다. 불교의 효는 불법에 귀의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으로 이경은 단순히 효의 실천을 전법를 통해 성취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포교의 한 방편경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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