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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⑭모든 민족과 바벨(2)

주형식 | 기사입력 2022/12/06 [09:02]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⑭모든 민족과 바벨(2)

지상설교

주형식 | 입력 : 2022/12/06 [09:02]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인류가 멸절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위험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새 인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의 힘을 드러내고, 인간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여기서 말이 하다였더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한 입술을 의미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한 언어를 구사하였고, 방언 상의 차이도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단순히 말의 일치를 넘어서 문화와 사상적 일치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바벨은 노아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의 남동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아라랏의 산악지대는 유목생활을 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지를 향해 이동하였는데, 그곳이 성경에서 시날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지대였습니다.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여기서 서로 말하되라는 말은 각자 그 이웃에게 얘기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며, 인간끼리 의견을 모아 일을 결정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결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견고히 굽자라는 말의 문자적 뜻은 굽고 또 굽자라는 말입니다. 또한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라는 말은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시날 평지에서 가마를 이용하여 벽돌을 구워낸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것은 당시 그들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사야 1413절에서 사단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라고 말합니다. 사단의 이 말과 같이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인간들의 이 말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라는 말입니다.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동기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역사가 필로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하늘에까지 닿을 굉장한 탑은 이 탑 건설자들의 명성을 후대에 길이 보존시키면서, 저들의 능력과 지혜의 기념비로써 서 있게 하고자 의도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자기 이름을 벽돌에 새겨 넣었지만, 바벨탑이 무너지고 난 후 우리는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표현에서 탑을 쌓는 두번째 동기를 발견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전을 찾아보려는 소망으로 자신들 스스로의 작업을 통해 탑을 건축하고자 시도합니다. 시날 평야의 거민들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인처럼 그들의 마음은 그분께 대한 반역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이 전체적인 사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계획 입안자들의 이름을 높이고,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저들을 우상숭배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계획되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만 의뢰하고,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이름만을 불러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할 때는 큰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름을 내기 위하여 얼마나 동분서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고 낮은 이 땅에 비천한 아기로 오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있어 증거하고 나타내야 할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는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이 말은 인간의 악한 계획과 수행과정을 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내려오셨더라라는 말의 히브리원어는 와예레드 예호와인데 직역하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다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방법을 신인 동형론적 표현방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의 행동방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정말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성과 탑을 쌓아 하늘까지 닿게 하려는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인간의 잘못된 판단을 확인하시고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려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죄로 더러워진 세상에 내려오셔서 감찰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내려오심은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죄 가운데 그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여기 7절 말씀을 직역하면 내가 당신의 영으로부터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의 얼굴로부터 어디로 도망하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1397절부터 12절 말씀은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앞 절들은 하나님이 주어로 기록되었지만, 7절부터 12절은 시인의 입장에서 시인이 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지만 자신의 가까이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8절 말씀도 직역하면 만일 내가 하늘에 올라간다면 거기에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음부에 펼친다면 보소서, 당신이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편재성이 하늘과 음부라는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음부에 내려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며 환란과 고통 가운데 거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곳처럼 보이는 음부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음부에 있는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그 무엇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가 어떠한 판단과 선택을 하는지를 살펴보십니다. 때로 우리가 잘못된 판단이나 선택을 하는 길로 나아갈 때에는 그러한 선택을 혼잡하게 하시므로 더 큰 죄로 나아가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31,32)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누가복음 126절부터 33절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성육신하실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31절의 예수라 하라라는 말씀의 원어적 의미는 네가 예수라고 불러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이미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수아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헬라어 호 휲시스토스는 히브리어 엘 엘룐의 헬라어 번역인데,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을 의미하므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33절에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다라는 말입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데, “야곱의 집”, 즉 야곱의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영적인 이스라엘, 즉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무리들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의 기만은 최고도에 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 고난과 불행을 목도하셨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보신 광경이 이러하였습니다. 무한히 정결하신 분께서 보실 때에 그 광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일어나셔서 지구의 주민들을 일소하지나 않으실지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대신에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단이 승리할 듯 보이는 바로 그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의 은혜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에 구원의 경륜이 성취될 때까지 결코 방해되거나 철회되지 않을 치료하는 은혜의 홍수를 세상에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바벨탑 사건을 생각할 때,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그냥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으셨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더 큰 범죄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삼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 땅에 내려오셨던 성자 하나님께서 다시 어두운 이 세상에 비천한 아기로 태어나셔서 이 땅과 인생들을 살펴보시고, 그들이 죄악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소망과 등불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애가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나의 인생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나의 동기와 선택과 품성과 행동이 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생애를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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