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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61) 혼(魂)에 대하여

정영부 | 기사입력 2022/12/29 [09:20]
혼의 정의

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61) 혼(魂)에 대하여

혼의 정의

정영부 | 입력 : 2022/12/29 [09:20]

이번 회는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6()에 대하여혼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참고로 제6장의 목차와 그중 이번 회에서 다룰 부분은 다음과 같다.

 

6. ()에 대하여

6.1. 혼의 정의

6.2. 영과 혼의 탄생시기와 환생횟수

6.3. 혼의 구성

6.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혼

6.5. 자율신경과 혼

6.6. 양자역학과 표준이론

6.7. 혼의 장기(臟器)

6.8. 혼의 물성(物性)

6.9. 유학(儒學)마음에 대한 담론

6.10. ()에 대하여

6.11. 강시(僵尸)

6.12. 의식상태별 혼의 활동

6.13. 집단무의식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혼()사람의 몸 안에서 몸과 정신을 다스린다는 비물질적인 것으로 얼, 혼쭐, 넋이라고 하기도 한다로 풀이되어 있다. 또한 영()죽은 사람의 넋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영혼(靈魂)의 뜻 또한 죽은 사람의 넋이라고 하여 사전만으로는 영과 혼 간의 차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독교(개신교)에서 발행한 사전(1)에서는 또는 영혼의 개념이 명확히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대개 혼(2)사람과 짐승 등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정신적인 영역이고(2:19) (3)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로 하느님의 부름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영역이라고 한다. 또 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육체와 함께하고 또한 육체를 대표하면서(16:26) , 영과 함께 사람의 전 인격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전체적으로 통일된 개념은 아니다. 우선 위의 뜻풀이는 영육이원론이 아닌 영혼육의 삼원론을 주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의견을 전제한 의견으로 기독교 전통설인 영육이원론(4)과 맞지 않는다. 또한 혼이 정신이라든가 인격을 형성한다는 등의 풀이 또한 정신을 영의 범주에 넣고 혼은 생기체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음을 감안하면 삼원론 전체의 의견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혼이나 영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입을 다무신 부처님의 무기(無記) 때문이다. 다만 훗날 유식(唯識)학에서 윤회의 주체로서 몸의 각 기관에서 모인 감각의 합으로서 이 발전한 아뢰야식이 상정(想定)되었으니 이것이 혼에 해당된다.

 

또한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는 하급의식을 루아흐와 네샤마라 하여 혼 정도로 보며, 기에서 성()과 정()이 모두 유래하였다는 기일분수론(氣一分殊論)의 성리학에서는 혼이란 무극(無極)에서 기원한 마음의 혼()’생기의 백()’ 정도로 파악한다. 힌두교나 도교 또한 혼이란 기에서 기원한 마음이며 신지학도 이와 유사하게 혼을 정묘성이 다른 에테르()로 구성된 여러 를 가진 마음으로 본다. 기타 혼은 영의 육적(肉的) 그림자인 知情意라는 주장(5)이나 혼을 사람이 가진 활력 또는 생기라고 보는 유물론적 사고방식 등 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6)

 

영혼학에서 혼이란 하느님의 생명에너지인 기가 육체와 더불어 진화하여 몸에 생명을 부여하는 한편 마음의 작용을 맡고 있는 비물질로서, 이승과 저승의 각 세계를 윤회하며 진화를 계속하여 마침내 영이 되려는 존재로서 몸을 살아있게 하는 생기체와 마음의 합이다. 또 영이란 혼이 진화하여 열반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든 영생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만으로 혼과 영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이처럼 혼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7)이는 주로 인간의 구성요소가 육체만으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육체 외에도 혼이 있다고 믿는지, 육체 외에도 영과 혼을 더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등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기인하지만 같은 이원론이나 삼원론이라 하더라도 혼을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종교와 사상별로 심지어 한 사상 안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혼과 영의 구분과 求道

 

사람은 생활 중에 혼과 영을 느끼고 구분할 수 있다.(8)혼과 영을 구분하는 것이 영혼학의 시작이다. 혼과 영 상호간의 관계와 둘 간의 작용을 적절히 파악하여야 영이 혼을 다스리고 끌어 나가는 최초의 기반이 마련된다. 이 과정이 없이 마음을 다스려 참자아를 구현하고 구도의 성취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망이다. 知彼知己 없이 어찌 百戰에 임할 것인가.

 

다음 글은 생활 중에 혼과 영을 구분하고 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 준다.

 

혼이란 무엇인가.

혼은 불분명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평소의 자신 곧 마음이 혼이다.

다만 그 마음이 불분명하고 복잡할 뿐이다.

마음은 이중 삼중 인격 같고 기억도 뒤죽박죽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약하여 다치기도 쉽지만 불같이 화를 내어 남을 해치기도 잘한다.

수시로 변하지만 왜 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에 잠겼다가 조증(躁症)으로 들뜨고 강박에 시달리거나 공황에 빠진다.

정신이 마음인지 이성이 마음인지 감정이 마음인지 욕망이 마음인지. . 모르겠다!

지성은 어떤가? 지혜도 마음인가? 기억이 마음일지도?

설마 마음은 남들 말대로 두뇌의 전기 작용일 뿐인가?

정말 마음은 알 수가 없구나.

오죽하면 이구동성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겠는가.

마음이 불분명하고 복잡한 이유는 혼의 태생 때문이다.

그는 윤회하되 轉生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나마 두뇌의 기억과 섞여 구분이 어렵고 꿈이나 변성의식에서 조금 드러난다.

前生에 한 사람의 혼도 아니었다. 전생의 전생 또 그 이전 생에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개체성이 강하여 자의식이 분명하고 혼의 죽음인 소멸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소멸할 수도 있어서다. 소멸도 여러 번 당해 봤다.

몸을 떠나면 영영 죽을까 봐 몸에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몸의 종이 되어 몸의 편안과 장수 그리고 그 번식을 위하여 분투한다.

짐승이었던 때가 멀지 않을수록 더하다.

이리 살면 안 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한 줌 흙인 몸을 위해 살다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그의 단 하나 희망은 영()이다.

그를 이끌어 줄 이도 영이고 그가 장차 되고 싶은 것도 영이다.

그러나 모든 혼에게 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이 없는 혼은 영을 갈구한다. 스스로 수행하고 공부하여 양심(良心)을 키워 영을 기대한다.

그러나 마침내 영이 짝지워지면 그 영을 싫어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든다.

종살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은 혼 대신 자아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그의 자유를 빼앗고 귀찮은 일을 시키며(9)

혼이 오랜 세월 좋아라 하던 일들을 못 하게 말린다.

커진 양심도 성가신 판에 上典主人 노릇 하려 드는 영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영이 단 하나 희망이라면서도 막상 은총으로 주어지면 그 모양이니 혼은 사실 희망이 별로 없는 존재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나서시고 부처님이 오셨을까.(10)

영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영도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존재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은 아직도 길고 긴 발전과 진화의 도상에 있다.

그들이 험한 이승에 온 것은 공부하고 발전하고 진화하려는 뜻이다.

발전의 중요한 도구요, 수단이며 자신의 왕년(往年)인 혼이 여기 있어서다.

영도 대부분 과거에 혼이었다.

혼을 가르치고 조종하고 다스리고 이용하고 혼과 상부상조하고 혼을 영으로 이끌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라. 너 자신을 알라. 마음을 가라앉히라. 몸과 마음을 다하라. 마음을 바치라.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은 말이다. 이는 다 영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도 잘하여야 할 일이다.

그래야 하느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해 봐서 알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혼아. 네 영을 만나 보렴. 어렵게 만난 네 영과 잘 사귀렴. 영에게 네 자리를 내주렴. 그게 다 네 복이고 네 살길이다.

영을 만나서 잘 사귀고 내 자리를 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 대신 자아(自我)의 방에 영을 들이려면 어찌하여야 하는데?

가부좌하고 조용히 앉아 흘러가는 강을 지켜보렴.

지켜보고 지켜보아 마침내 생각을 그치렴.

참선이 그것이고 명상이 그것이란다.

그 어느 때 네가 생각을 멈추고 上善若水로 강물 따라 흘러가면

그런 너를 지켜보는 이가 영이란다.

 

()이 약하면 선()도 약하다.

그 선이 약하디 약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이 없다.

영이 없으면 양심이 대신한다. 그러면 꿩 대신 닭이 된다.

그러나 닭이 꿩은 결코 아니다.

에 들어 나타나는 것이 양심이라면 더욱 분발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생에는 영을 만나리라. 꿩을 얻으리라.

그래서 꿩이 되리라.

3장의 영혼육 삼원론편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혼은 기의 생명력에서 연원하여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대서사(大敍事) 끝에 인간의 몸에 이르러서 지금 마음으로 드러나 있다.

 

<註釋> 

1) 라이프성경사전, 혼 참조

2) 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프쉬케

3) 히브리어로 네샤마또는 루아흐’, 헬라어로 프네우마(πνεύμα Pneuma)’

4) 영육이원론이라고 주장하나 표준이론에서 영은 그 정의상 영생하는 존재로서 천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죽어서 구원받아야 영이 되는 기독교 영육이원론의 영은 아직 영이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의 영은 아직 혼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표준이론으로 보면 기독교 영육이원론은 사실 혼육이원론이다(8.2.3.1. ‘기독교 인간론의 내용참조).

5) 윤홍식(1974~)은 연세대학원 철학석사로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단체인 홍익학당의 대표다. 도마복음, 예수의 숨겨진 가르침, 산상수훈 인문학등의 저서가 있다.

6) 부록7 ‘사상별 영과 혼의 정체참조

7)혼이란 무엇인가 

()

 

혼은

억겁을 진화하여 온 생명인가?

()가 뭉치더니 체()와 더불어

우주의식의 대자연 그 품안에서

창발하며 자라난 신의 걸작인가?

 

아니면 혼은

()의 그림자인가?

깊고 어두운 이승의 골짜기에 떨어진 영이

희미한 추억의 불빛을 쫓아 헤맬 때는 길고 낮게 드리워졌다가

플레로마(pleroma)의 빛 아래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것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장작불이나 올림픽의 성화처럼

태양으로부터 빛을 타고와 이승의 덤불에 점화되더니

수많은 장작을 거치며 타오르고 타오르다가 지금은

찬연하고 우뚝하게 타오르는 봉화요 성화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혼은

영이 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하여 타고 다니는

()인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헌신짝 버리듯이

영영 버려져 홀로 썩어 가는가?

 

옛다 모르겠다

혼은 영이 세상을 경험할 때의 모습일 뿐이다

학생이었다가 군인이었다가 아빠였다가

어느 때 영이

졸업하고 제대하고 명종하면 도로 꽝이 되는 그것이다.

 

8) 3.1.2. ‘영혼육 삼원론인 이유참조

9) 시편 103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

부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나서시고 마호메트가 도래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의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은 아니다. 사람이 원죄 때문에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느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며 이 세상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뜻을 따라 살기를 즐겨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동물적 본성일 뿐이다. 따라서 전적부패(全的腐敗, Total Depravity)를 전제로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무조건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없다. 하느님의 은총이 혼의 진화를 향한 투쟁을 보시고 이를 긍휼히 여김으로 인한 것은 맞으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오픈된 것이다. 또한 그 은총은 무제한적인 것이다. 소위 제한 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가 아니다. 칼빈이 주장하듯 하느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혼들만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 아니고 혼들이 영으로 진화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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