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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 "길은 여기에 있다" [훗카이도 여행기]

박현선 | 기사입력 2023/01/19 [13:14]

박현선 "길은 여기에 있다" [훗카이도 여행기]

박현선 | 입력 : 2023/01/19 [13:14]

▲ 박현선 {훗카이도 여행기}  © 매일종교신문


눈이 푹푹 쌓여 있는 자작나무 숲을 천천히 걸었다
. 몸뚱이에 힘을 줘가며 추위를 이기고 산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하늘 끝에 닿아 있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100년의 세월은 바람이 되어 지나갔다. 드디어 만난 미우라 아야코 옛집이 보였다. 책 향기로 가득 채워진 서재에서 감동적인 삶과 눈물의 여정은 소리 없는 글이 되어 숲속에 유유히 흐르는 평화의 길을 만들었다. 그리운 이의 발걸음 소리처럼 소복소복 눈 내리는 밤이면, 언 잉크를 녹여가며 글을 쓰고 있을 그녀를 떠올렸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게 그녀는 차로 입술과 목을 축이게 하고, 늘 하신 말씀처럼 한국에 가게 된다면 저는 그 나라를 발바닥으로 밟고 걸어갈 수 없어요.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어 다닐 수밖에 없거든요.” 라고 말씀하시며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지 않았을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머뭇거리다 얼룩진 응어리를 꼭 덮어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렇게 위로를 전했을 것이다. “찢긴 상처도 가슴 저미는 아픔도 이제 세월 속으로 훨훨 날아갔으니 더는 아파하지 마세요.” 라며 살포시 어깨를 내어드렸으리.

 

자작나무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는 시간. 왼쪽으로 가면 JR 시오카리역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니 설령소설의 실제 인물 나가노 마사오 묘지 비석이 보인다. 아야코가 1955년 척추를 공격하는 만성 염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이 준 선물을 들고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나가노 마사오 생애가 기록된 신앙 수기를 전해 받는다. 남편 미우라 미스요는 그녀가 병석에 누워 말하는 문장을 받아 써 내려갔고, 의인의 역사는 설령’(원제는 시오카리 고개) 소설로 재탄생 되었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13여 년 전이다. 국철 아사히카와 운수사업소 서무주임이었던 나가노 마사오는 순회 전도를 다녀오던 길이였다. 탔던 열차가 시오카리 고개 정상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객차의 연결고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풀린다. 그는 반대 방향으로 폭주하는 객차를 정지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탈선 위기에 처한 객차를 몸으로 막아 많은 사람을 구하였다.

 

시오카리역 부근에 있는 나가노 마사오 추모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메이지 42년 2월 28일 밤시오카리 고개에서 마지막 꼬리 객차갑자기 연결이 분리반대 방향으로 폭주한다승객 전원전복을 두려워해 정신을 잃고 소란스러워진다이때 승객 중 한 명철도 아사히카와 운수 사무소 서무 주임나가노 마사오 씨승객을 구하려다 바퀴 밑에 희생의 죽음을 당하며 전원의 생명을 구한다그 회중에서 크리스찬인 그가 늘 갖고 다닌 유서가 발견된다.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모든 것을 감사한다감사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친다.’ 라고 구절이 나오는 유서였다> ”(明治四十二年二月二十八日夜塩狩峠最後尾客車突如連結分離逆降暴走乗客全員転覆騒然となる乗客一人鉄道旭川運輸事務所庶務主任長野政雄氏乗客わんとして車輪犠牲全員その懐中よりクリスチャンたる常持せし遺書発見せらる。「苦楽生死均しく感謝感謝してすべてを)

 

나가노 마사오를 향해 안녕을 고하는 묵상의 순간 의인 이수현의 얼굴이 겹쳐졌다. 죽음의 찰나에서도 거대한 사랑을 실현하여 축복된 죽음을 선택한 한국인이다. 2001, JR 야마노테선 신오쿠보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선로로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은 7. 안타깝게 선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향년 26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담대하게 선로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한 이수현의 심정을 반추해 본다.

저라고 왜! 두려운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늘 마음에 심고 살다 보니,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본 순간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행동이 힘든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희망의 등불같이 남겨지길 바라며 우호적인 한일 관계가 이어지길 천국에서 기도합니다.”

일본인들은 미야기현에 한·일 우호 기념비를 세우고, 신오쿠보역에는 추모 현창비를 세웠다.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선행을 하며 이수현의 용기 있는 죽음을 잊지 않고 있다.

 

, 소설 안에는 인간의 생명줄 같은 희망이 들어 있어요. 나오세요!” 라며 인간을 살리는 소설을 쓰신 미우라 아야코. 폭주하는 열차를 막으려고 바퀴를 몸으로 막아 승객 모두를 살린 나가노 마사오.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음으로 사랑을 실천한 이수현. 그 외, 수많은 의인은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우뚝 솟은 망대(望臺)가 되어주기를 소망했으리라.

 

 박현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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