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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⑤ 사문 정신과 전법륜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01/30 [10:33]
현대적 무소유의 방랑자는 누구인가?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⑤ 사문 정신과 전법륜

현대적 무소유의 방랑자는 누구인가?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01/30 [10:33]

불교의 시작은 사문(沙門)으로서의 싯다르타 고오타마에서 연원한다. 사문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쉬라마나(śramaṇa)이며 빨리어로는 사마나(samaṇa)라고 한다. 인도에서 이런 사문 전통은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싯다르타 고오타마는 이런 시대 풍조에 따라서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고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범아동일(梵我同一)의 불이론을 창시한 9세기 아디 상카라와 그의 제자들./ © 매일종교신문


중국에서 이 쉬라마나를 음차(音借)하여 상문(桑門)、상문(喪門)、사문(娑門)、사문나(沙門那)、등으로 표기하였다. 나무 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이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표기할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나무(南無)남무가 아니라 나무라고 발음하는데, 산스크리트어 나모(namo)’에서 온 말인데,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쉬라마나는 뜻으로 본다면 도사(道士)도인(道人)빈도(贫道) 등으로 근식(勤息) 지식(止息)의 뜻을 갖고 있다. 근식은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고 나쁜 짓을 쉰다는 뜻이다.

 

착한 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나쁜 짓은 악행(惡行)을 멈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출가하여 불도를 닦는 스님을 근식(勤息)이라고 한다.

 

고대인도에서는 출가하여 고행(苦行)금욕(禁慾)을 하면서 걸식하면서 수행하는 자들의 일반 명사였다. 불교에서만의 전용술어가 아니고, 모든 종교나 종파를 망라하여 무소유(無所有)의 고행수도자(苦行修道者)를 일컬었다.

  인도 아쌈 구와하티 까마캬 힌두 사원의 연례 암부바치 멜라 축제에 참가한 사두들(산냐시, 출가 고행 수도자) ./

© 매일종교신문

 

인도 종교 시스템에서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출가하여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전통은 비 바라문교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런 출가 고행 전통은 힌두교에서도 보편화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힌두교의 산냐사(Sannyasa)는 힌두교도의 4단계 삶에서 네 번째 단계로서 출가자를 말한다. 학습기, 가정생활기, 삼림거주기 보다도 더 영적 추구 단계로서 가정생활이나 은퇴 단계를 뛰어넘어서 세속적 및 물질적 추구를 포기하고 구도적 삶을 바칠 선택권으로서 출가 고행 무소유의 삶이다.

 

이런 출가 고행 무소유의 삶을 사는 자를 산냐시(Sanyasi, 남성)라고 하며 여성은 산냐시니라고 부른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힌두교 출가 고행 수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마에 비쉬누 마크가 있는 힌두교 출가 고행 여성 수행자 산냐시니(사드비)./© 매일종교신문

 

쉬라마나(śramaṇa)는 기원전 1,000년 중반부터의 다양한 금욕적인 전통을 가리킨다. 쉬라마나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자유로운 형식의 전통이었다. 처음 쉬라마나라는 용어는 종교적 모델 측면에서 그들을 바라문과 대조하기 위해 때때로 사용되었다.

 

쉬라마나 전통의 일부는 베다의 인식론적 권위를 거부함으로써 힌두교와의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 반면, 쉬라마나 전통의 일부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출가 고행 수도하는 산냐신으로서 힌두교의 일부가 되었다. 말하자면 비 바라문의 전통을 힌두교가 수용한 셈이지만, 이들은 아쉬람 보다는 자유롭게 형식과 틀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영적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힌두교의 산냐시는 본래 숲이나 외딴 암자에서 생활했으나, 현대에는 주로 도시의 노숙자로 생활한다./ © 매일종교신문

 

힌두교의 고대 및 중세 문학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영적, 문학적, 철학적인 사색과 명상을 추구하는 출가 고행 무소유의 삶을 사는 자들로서 숲과 외딴 암자에서 생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기 전부터 힌두교에 이런 출가 고행 무소유의 산냐시가 출현 한 것이다. 자이나교는 말할 것도 없지만, 힌두교에서도 비 브라만교의 고행수도 전통이 일찍부터 유행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자이나교에도 이런 고행수도자들이 있음을 보는데, 이들은 힌두교의 산냐시들처럼 사원에 소속되지 않고 떠돌이 고행 수도자들은 없는 것 같다. 비록 옷을 벗고 다니지만 대부분이 소속 사원이 있다.

 

인도불교가 오랫동안 인도 땅에서 사라지는 동안, 오리지널 쉬라마나처럼 유행하는 불교 고행수도자는 없다. 불교의 유행승 전통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그 맥이 계승되고 있다.

 

  쉬라미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 불교 암자./ © 매일종교신문

 

불교의 고행수도자들은 힌두교나 자이나교처럼 극단적인 고행수도자는 없다. 그것은 싯다르타 고오타마가 깨닫고 나서 극단적인 고행을 하지 말고 중도적인 수행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교의 고행수도자의 전통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에 숲속의 수행자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중앙아시아나 동아시아에서도 이런 고행수도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선종불교에서 이 전통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도 인도-중앙아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고행수도자의 전통과 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현대에 와서는 선원(禪院)의 선승(禪僧)들에게서 이런 전통을 찾게 된다.

 

선원의 모든 선승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무소유의 사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선원의 선승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같은 전통의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중국불교나 일본 불교보다도 한국불교가 인도불교의 고행수도자 전통을 더 충실하게 지키면서 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선원에서 참선하는 선승도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법륜을 굴리고 있다고 보지만, 적어도 전법륜(轉法輪)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소극적인 전법륜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불교가 제대로 역할과 기능을 하려면 종단차원에서는 적극적인 전법륜(轉法輪) 체제와 제도를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신자 수가 감소하고 출가자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하소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체제개편 즉 제도개혁이 절실한 것이다.

 

모든 출가자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고행수도만 할 수는 없다. 고행수도의 무소유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21세기 현대 산업문명사회에서 종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법륜을 잘 굴리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매일종교신문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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