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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산책- 아브라함의 뿌리 (2)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3/01/30 [16:34]

창세기 산책- 아브라함의 뿌리 (2)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3/01/30 [16:34]

창세기 13장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어두웠던 애굽생활을 청산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2절에 보시면 그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 바로에게 받은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이것은 2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이제 13장에서 벌어질 전개를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조카 롯과 소유권 문제로 인하여 헤어지는 문제가 13장의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13: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이 벧엘에 이르게 됩니다. 이 벧엘은 어떠한 곳일까요? 여기서 전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바테힐라인데, 원어적 의미는 처음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글성경에서 전에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여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그곳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단을 쌓았습니다. 3절 말씀은 처음 단을 쌓던 바로 그곳으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내려갔던 애굽에서 돌아와 처음에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던 장소로 온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아브람의 신앙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자신과 아내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세상의 환경 여건보다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애굽에서 떠나 처음에 장막을 쳤던 벧엘로의 귀환은 또한 타락한 세상 풍조와 인본주의적 사고와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에서 떠나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이 말을 원어 표현 그대로 직역하면 그 땅이 그들의 함께 거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땅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견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이 말은 땅의 비좁음을 의미하는 의인법적 표현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재산을 많이 가지고 돌아왔는데, 조카 롯도 아브람과 같이 부유해졌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아브람과 함께 함으로 얻은 축복입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에서 땅 문제에 대해 말한 최초의 언급입니다. 아브람과 롯이 머문 벧엘 땅은 그들이 함께 거하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좁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는 종종 인간관계를 이간시키고, 분쟁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7절에서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양쪽의 목자들은 서로 말다툼을 하며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아브람과 롯이 헤어진 출발점은 바로 이 목자들 간의 다툼이었습니다.

 

(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한글성경에서는 우리는 한 친족이라”(골육이라)라고 기록되었지만, 원어 표현은 우리는 한 형제들이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가라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히파레드 나인데, 이 말은 제발 너는 떠나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간의 다툼 때문에 롯과의 별거를 명하는 아브람의 결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와의 다툼도 원치 않았고, 목자들 간의 다툼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분쟁의 원인이 되는 재산을 분리하고, 다툼에 대한 해결책으로 별거를 택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람은 우선권을 전적으로 롯에게 양보합니다. 지역의 선택이, 특별히 풍부한 물과 좋은 목초지의 선택이 부를 보장하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당연히 먼저 선택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땅에 대한 우선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는 모습은 애굽에서 보였던 그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 한글성경의 번역은 그가 눈을 들어 단순히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 원어성경은 요단의 온 사방을 보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롯의 행동은 하와가 동산 중앙의 열매를 본즉”(3:6) 따먹었고, 아간이 하나님께 바칠 노략물을 보고”(7:21) 훔치는 범죄를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롯은 장막을 소돔으로 옮기는데, 13절에서 소돔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여기서 죄인이었더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히타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이 말은 놓치다”, “길을 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표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를 가리키는 말이 몇가지 있는데, ‘아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행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아온은 형식보다는 내용 면에서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 사용됩니다. 그리고 페사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13절에 사용된 히타는 구약성경에서 약 580회 사용되는데, 지금 말씀드린 3가지 죄의 개념이 모두 포함된 죄라고 할 수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표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의 하마르티아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런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부자가 되는 길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롯이 비극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세속적 이익에 대한 환상에 현혹되어 롯은 그 곳에서 당하게 될 도덕적, 영적 불행을 간과하였습니다. 그 평야의 거민들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거나,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기적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선택했던 홍수 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6:2). 이와는 반대로 아브람의 선택은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롯과 달리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난 뒤에야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13:14).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는 말 앞에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라는 말이 삽입이 되었습니다. 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종과 횡으로 걸어볼 것을 명령하신 이유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그것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땅을 두루 밟는 것은 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3절에서는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14절부터 17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해 벧엘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헤브론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아브람과 함께 떠났을 뿐인 롯은, 아브람에게는 지나온 여정의 좋은 동반자였지만 현실과 장래가 달린 문제에 직면하자 선뜻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것을 양보한 아브람에게 돌아갑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욕심을 제어하고 오직 당신의 뜻을 바라며 조카의 번영을 기원했던 아브람에게는 미래의 축복을 약속하셨으나, 현상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렸던 롯에게는 그가 본 현상인 것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 있는 그분의 대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상의 도덕적 흑암 가운데서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증인들, 곧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세상에 당신의 뜻을 알리며 당신의 은혜의 기사를 전하실 통로들입니다. 큰 구원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그분을 위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 그분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성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판단하는 표준이 될 것입니다. 끈기 있게 참아내는 시련,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축복, 온유, 친절, 자비,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사랑 등은 품성을 통하여 세상 앞에 비추는 빛들이며 타고난 마음의 이기심에서 오는 어두움과는 대조를 이룰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전쟁기사입니다. 141절과 2절을 보시면 9국가의 왕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정권을 잡은 이들의 권력욕에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1절부터 4절까지의 진행과정을 보시면 소돔왕을 비롯한 다섯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통치에 대해 반역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12년 동안 계속된 그돌라오멜의 통치에 염증을 느껴서 조공을 거부하고 옛 자유를 회복하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이에 그돌라오멜도 동방의 연합군을 조직하여 맹렬한 기세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싯딤골짜기에서 소돔의 다섯 왕들을 일격에 섬멸하기에 이르릅니다.

 

(14: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승리한 군대는 닥치는 대로 재물과 양식을 약탈하는데, 이 때 소돔성에 들어간 군대는 롯을 잡아갑니다. 롯은 소돔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소돔성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따라서 롯이 포로가 된 것은 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경고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6절은 아브람의 생애에 나타난 유일한 군사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아브람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조카 롯이 사로잡혀 한 것입니다.

 

(14:14,15)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혹자는 318명 밖에 안되는 군사를 이끌고 어떻게 강력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에 승리할 수 있었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을 보시면 아브람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야밤에 양면으로 기습공격을 펴는 작전을 펼칩니다. 이 장면은 후일에 300명을 세 편으로 나누어 야밤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 미디안을 무찌른 기드온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아브람의 승리는 주도면밀한 그의 준비성과 효율적인 작전에 기인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승리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브람은 너로 인하여 큰 자손을 이루게 하겠다”(12:2)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집안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는 당시 아브람의 집안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할 때에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지닌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될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연합군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4: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여기 조카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형제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가리켜 조카라 하지 않고 형제라고 칭한 것은 롯의 이기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를 사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사모하며 헤브론으로 나아갔던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이와 같은 정신과 사랑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의 배은망덕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롯에 대한 그의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났으며 그는 그를 구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조카의 소식을 듣고 조금도 지체함 없이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롯과 포로들을 구출하러 갑니다. 어려움을 만난 형제를 도와야 한다는 사랑과 정복자들로부터 포로된 자들을 구출하려는 열정에 자신을 희생한 아브람은 죄의 포로가 된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주형식 목사  © 매일종교신문



주형식 목사
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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