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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강의●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6/04 [09:46]
“예수는 자기를 비워 하느님 나라로 가득 채운 분”

다석 강의●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수는 자기를 비워 하느님 나라로 가득 채운 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6/04 [09:46]

▲ 예수가 여리고에 갔을 때 세리 삭개오가 자기 고장에 온 예수를 보기 위해 올라갔다는 돌무화과나무.     © 매일종교신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섬김에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 가운데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함에 가장 으뜸가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느님과 인류를 섬김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저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에 관한 모든 자연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에머슨이 말하는 자연은 하느님이다. 사람은 하느님이라는 자연 전체의 일부분이다. 전체자연인 하느님을 알아야 전체의 부분으로 한 군데에 있는 사람의 자리를 정(定)할 수 있다.     

현대사상, 고대사상, 동양사상, 서양사상 등 구분을 둘 필요가 없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이전을 율법시대, 이후를 은혜시대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구분도 필요 없다고 한다. 모세 오경에도 지금 세상에서 쓰이는 모든 복음이 거의 다 있다고 본다. 나타내야 할 것은 이미 다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라는 분이 온 것은 이 세상에 무엇을 보이려 온 분이 아니다. 참나의 완성을 위해서 온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에게 ‘주는 것’을 가르쳤다. 이 세상은 주고 가자는 세상이다. 지금이라도 줄 수가 있어야 된다. 떳떳치 못하게 무엇을 바라고 살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안 나는 것이 좋다. ‘우주의 아버지’(하느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이 제상에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로 살아야 한다.     

예수의 실패는 정의(正義) 쪽의 실패다. 내가 정의 쪽에 실패자인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는 것은 마지막 정의(하느님)를 믿기에 정의구현이 불가능한 세상에 정의가 있도록 하려는데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려 한 지 2천 년이 되었다. 아직도 정의는 실현되지 못 했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신앙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만은 못하더라도 큰 인물이라도 나오기를 바란다. 지난날의 그 누구만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불행한 인생처럼 보인다. 전 인류가 이 불행을 지니고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있다. 묵은 것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온고지신의 사제지간(師弟之間)이다. 스승의 말을 녹음해 놓은 것을 듣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참된 사제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새로 인도(仁道)가 서게 된다.     

우리는 짐승인 몸나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거듭나 저 세상에 계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이 뜻을 알면 옆 사람에게도 알게 해서 구해야 할 임무가 있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을 좇겠다는 크리스천의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전도는 새 시대의 무당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가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는 얼나를 깨달아 세상의 빛이 되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적극적인 말씀이다. 속죄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얼나의 빛이 되라는 것이다. 속죄는 너무나 소극적이다. 하느님이 보낸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라 죄악의 멸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얼나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몸나의 속죄가 된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진리 정신은 죽음을 넘어 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며, 죽을 보람으로 죽어야 한다. 예수는 3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과 인류 섬김에 생명 바쳐
참나의 완성을 위해 이 땅에 와
예수는 正義쪽에 실패…‘진행중’
     

하느님 외에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우상(偶像)으로 비친다. 예수나 석가조차도 우리가 표상(表象)으로 보면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석가도 자기의 몸을 보는 이는 붓다를 보지 못한다고 했고, 예수는 자기의 혈육(血肉, 몸)을 먹으라고 했다. 몸의 오관(五官)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영원무한한 얼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만이 우상·아닌 참나이다.     

이적(異蹟)은 진리가 아니므로 홀리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툭툭 털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고 나서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내가 자리한 이곳은 태양의 발바닥 같은 곳이다. 여기 상대계를 뚫고 절대의 나라로 세차게 올라가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20:25~28)라고 했다. 다 같이 하느님의 자녀인데 높고 낮음이 있을 리 없다.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이가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될 뿐이다. 교회에 나가는 목사나 교인이 무슨 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이는 하느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서 남에게 대접받고 칭찬받으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실한 교인도 못되고 또한 하느님의 은혜도 아니다. 칭찬을 안 받아도 좋다. 다만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면 하느님에게 영광이고 민족에게도 영광이 된다.      

석가와 예수의 같은 점은 무엇인가 하면 순리대로 되기를 바라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되는 것을 바라지 말고 절로 되는 것을 바라도록 가르치는데 특징이 있다. 참으로 예수·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바로 알아들었다면 이 죄고(罪苦)의 세상을 건너가려고 언제든지 애쓸 것이다. 아직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재미를 찾는다. 마음이란 언제나 뒤돌아보면 후회가 된다. 회개 한 번 하고 당장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후회는 일생 동안 줄곧 따라 다녀야 한다. 자꾸 후회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누구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이 심판한다. 예수는 자기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이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利)를 남겼는데 천배 만배의 이를 남겼다. 우리도 예수처럼 진리정신을 남겨야 한다. 예수는 비판을 삼갔다. 예수는 이르기를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오 7:1~2)고 했다.     

석탄일(음력 4월8일)은 석가를, 성탄일(12월25일)은 예수를 욕되게 하는 날이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아예 기념일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다는 기념은 틀림없는 우상이다. 석가와 예수가 난 날은 비밀이다. 지금의 석탄일, 성탄일은 실제로 난 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늘의 비밀을 가지고 놀려는 이들은 예수·석가와 상관없는 이들이다. 석가‧예수가 난 날이 비밀로 된 건 큰 뜻이 있는 일이다. 성탄이란 바로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가슴속에서 순간순간 그리스도(얼나)가 탄생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불(成佛)해야 한다.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헛일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오시는 얼나이다. 구경(究竟)은 얼나를 깨달아 생명 전체(하느님)를 이루는 것이다. 얼나로는 시간·공간의 어떤 곳에도 오는 것이 가는 것이고, 가는 것이 오는 것이다. 얼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특별히 한 것이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필립보에게 예수가 대답하기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했다. 여기에 ‘나’는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의 얼(씨)을 가리킨 것이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오신 하느님의 얼(씨)을 믿는 게 구원이요 영생이다. 이 껍데기 몸은 비눗방울 같은 거다. 어떤 것은 일찍 꺼지고, 어떤 것은 좀 오래 있다가 꺼진다. 몸이란 그런 거다.(1960)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참이신 하느님뿐이다. 종교 신앙은 사람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 더러 하느님 돼 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다. 예수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이 때문이고,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마음 그릇을 가지려고 한다면 헤아릴 수 없이 크게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지극히 큰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워 놓으면 천국도 그 속에 들어온다. 그 마음에 하느님 나라가 들어오지 못하면 마음의 가난을 면치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는 예수, 석가, 간디 등이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비워 하느님 나라로 가득 채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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