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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강의●평화를 이루자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08 [13:05]
‘절대평화’ 얻으려면 잊었던 본성 회복해야

다석강의●평화를 이루자면

‘절대평화’ 얻으려면 잊었던 본성 회복해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08 [13:05]


인생의 평안을 생평(生平)이라 한다. 사람들은 생평을 보자고 평생을 떠든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말을 한다. 인생의 생평, 인류의 평화는 전 인류가 두고두고 말하며 내려왔다. 꼭 무슨 권력이나 재물을 얻어서 생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누가 와서 생평하게 하여 주지 않나 하고 수십 세기 동안 기다려 온 것이다. 몇 천 년 동안 무슨 능력을 얻겠다는 것이고 전보다 더 깨닫겠다는 그 소리가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생평의 옳은 이치와 그른 이치를 연결해 보여주는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노여움(anger, 瞋)을 타고났기에 삼독(三毒)이 내 속에 들어 있다. 이 삼독을 이겨나가는 일은 올라감이지만 삼독에 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격의 나(얼나)를 깨달아 힘껏 솟아나야 한다. 그래서 불교, 예수교에 다 같이 십계명이 있다. 삼독을 쫓아버리고 솟아나게 하려는 계율이다. 사람에게는 남을 해치려는 수성(獸性)과 남을 도우려는 영성(靈性)의 두 마음이 있다. 옳은 길에 와서는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남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요 석가의 정신이다. 이 영성(얼 나)에서 나오는 사랑의 마음을 길러야 한다.
 
사람들은 평안한 것을 구한다. 철없이 평안한 것을 구할 때는 무생물인 돌멩이나 흙덩이로 있어 아무 일 없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 꼼짝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안하다는 것도 구하는 일이 없어져야지 구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평안하다, 평안치 않다고 말 할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사람이 언제나 평안한 것을 구하는 것을 보면 평소 평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평(不平)하면 맞대거리를 하는 것같이 소리가 난다. 평안케 해달라는 소리다. 이것이 기도이다. 우주도 불평하여 평화를 구하느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철없을 때는 몸뚱이 하나 평안하기를 구한다. 좀 자라서는 마음이 평안하기를 구한다. 사람은 평안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 종교, 사상, 문화란 다 무엇인가? 다 우는 소리다. 불안한 걸 울어서 평안케 해 달라는 것이다. 각자의 철학신조라는 것은 이렇게 구하고, 이렇게 울면 평안이 오리라는 것을 그 사람의 소견으로 믿는 그것이다. 불평을 받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그 소리가 그럴듯하면 여기에 찬동하거나 그 기도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따지면 모든 것이 다른 것은 없다. 영원한 생명인 참나(얼나)를 발견할 때 불안이 사라지고 구원받은 느낌을 얻게 된다.
 
인류, 生平 위해 수십세기 기다려
우주도 평화 구하기 위해 ‘기도중’
 
우리들은 끓임 없이 불안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의 본바탕인 본성(얼나)이다. 우리가 잊었던 본성(얼나)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하느님)와 같은 영원한 자리를 일생을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일 것이다.
 
남녀 유별하니 남녀의 교제를 황망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성별(聖別)이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이 온다. 외물(外物)에서 구하는 것부터 구별하면 위로 올라가는 올바른 정신이다. 당길심 있게 시간적으로 띄우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성별을 한다. 결코 급하게 쉽게 사귀는 따위의 경솔을 저지르지 않는다. 곱게 보인다고 곧 바로 가까이하지 않는다. 곱고 좋다고 가까이 하면 위태하다. 성별해야 구속이 온다.
 
혼자 사는 독생자(獨生子)가 아주 편하다. 죄에 들어갈 염려도 없다. 자기 혼자 독립해 사니 인애(仁愛)로 마침내 마치게 된다. 구하는 것도 없고 맛보는 것도 없다. 호기심도 나지 않는다. 인애로 독생을 해야 한다. 성별을 자꾸 하면 절로 혼자 살게 된다. 당치않은 값으로 소용된 물건을 무리해서 살 필요가 없다. 이는 안사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이다. 호기심에 이끌려서 재미가 있을 듯해도 그런 것도 이 세상에 있나 하고 그냥 지나간다. 미인의 코에서는 콧물이 안 나오고 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안 나는가? 그 살가죽에서 떨어지는 때는 때가 아닌가? 석가는 미인도 똥자루, 핏자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진선미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혼자서 제 콧속에는 코도 없고 제 창자에는 똥이 없는 것처럼 해도 안 된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오로지 인애에서 독생하기를 바라야 한다. 자기의 꿈을 독생에 두고 성별해서 구속받아야 한다.
 
악이라는 것은 많고, 큰 것이 아니다. 크고 많은 것은 아직 선이다. 악이 크고 많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악을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좀 성가시면 극형인 사형을 쓰고, 좀 여유가 생기면 사형 폐지론이 나온다. 늘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것은 아니니 사형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불살생(不殺生)의 사상이 그러한데 이 사상을 가진 사람도 일이 자기에게 닥치면 그렇지 않게 된다. 자기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면 금방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다. 강도도 아니고 도둑질을 했는데 죽이려고까지 하느냐고 말하면 “이런 놈을 살려 둬?”라고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유명한 이야기로 성 프란치스코가 나간 사이에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왔다. 한 제자가 그 도둑을 잡아서 프란치스코가 돌아왔을 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프란치스코는 도둑을 잡은 제자를 칭찬하기는커녕 그 도둑을 잘 대접한 다음 얼마 보태어 주기까지 하여 보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 도둑을 기른다[養賊]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도둑맞고 도난신고를 하지 않으면 경찰에서는 양적[養賊]을 했다고 한다.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에 시비도 이렇게 다르다.
 
악한 세력은 아직 많고 크지 않아
罪苦의 세상 알면 건너기 힘써야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파지(眞理把持)는 비타협이다. 비타협은 참 어렵다. 의를 위해서는 싸움을 해야 한다. 다만 미워하여 대적하지 않으나 아첨은 하지 않는다. 악인이 형통하여 오만한 것을 보고 미워하게 되면 원칙을 따지게 된다. 속된 사람은 자꾸 무엇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비타협을 지나서 아첨을 하게 된다. 강도놈이 들어오면 달라는 것을 다 주고는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악에게 아첨을 한다. 비타협은 악에게 아첨을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은 무엇이며,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당한 일은 무엇인가? 악인을 미워하지 아니하되 악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겨루는 것이 의의 싸움이다. 거기서 오는 핍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이 지구가 우리 인류를 얼마 동안 더 실어줄지 모르겠다. 인류 자체가 분열한다면 얼마 못 갈 것이다. 무한이라고 하면 무한일 것이고 유한이라면 얼마 안 된다. 그런 동안에 인류가 꿈을 꾼다. 이왕이면 좋은 꿈을 꾸어야 좋지 않겠는가?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사랑으로 친교(親交)해야 하듯, 나라와 나라 사이도 서로 도우며 인교(隣交)해야 한다. 서로가 배를 앓고 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는 인교해야 한다. 나라 사이는 조금만 잘 돼도 배가 아프고 해를 입힌다. 밤낮 그 짓 때문에 나라 사이에 공평과 자유는 찾아 볼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공평 자유 하듯 나라 사이도 공평자유 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때나 중국 전국시대의 소진(蘇秦‧합종책 제창)과 장의(張儀‧연횡책 제창) 같은 이가 지나간 뒤에는 번거롭고 시끄럽기는 예나 이제나 같다. 올림픽경기에서 세계 제일이면 어떻다는 것인가? 운동경기를 그렇게 굉장하게 하여도 이 지구 위에 전쟁은 그칠 날이 없다. 체육은 향상될지 모르나 전쟁은 언제나 그 타령이다.
 
말씀 설법을 들을 때 이론으로는 이 세상은 죄(罪)요 고(苦)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면 또 재미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건 바로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어 기도할 때는 자신을 사도 바울처럼 죄악의 괴수라며 그래서 눈물로 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자신을 보고 너는 죄인이요 음탕한 자라고 하면 성을 낸다. 그리고는 버젓이 산다. 참으로 세상이 죄악의 고해(苦海)라고 느낀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말 못하는 것을 대신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예수, 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바로 알아들었다면 이 죄고(罪苦)의 세상을 건너가려고 언제든지 애쓸 것이다.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니 이 세상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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