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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유입⑤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5/23 [08:48]
한국 천리교의 분파와 현황, 교리

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유입⑤

한국 천리교의 분파와 현황, 교리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05/23 [08:48]
<연재순서>  
1. 기성종교보다 못하다는 의미의 ‘신흥종교’, ‘유사종교’,‘사이비종교’로 불리는 신종교
2. 일본 신종교의 흐름-막말유신기의 천리교와 금광교 이후를 연구대상
3. 일본 사회 가장 유력한 행동적인 종교 세력인 40개 신종교
4. 일본 신종교의 국내 유입경로와 천리교
5. 한국 천리교의 분파와 현황, 교리  

현재 교회 1만6천개소, 교사 16만 9천명, 신자 2백62만명의 일본 교세

천리교본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소속교회가 거점이 되어 포교활동을 행하고 있다. 교회조직은 종적 계통이 강하며, 횡적으로는 교구가 있지만 그다지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문서전도를 포함하여 개인의 포교활동이나 교회단위의 포교활등은 대부분 종적 계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밖에 의료․체육․출판을 통하여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에 이르러 새로운 많은 신종교 집단의 대두에 압도되어 포교의 성과는 크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기관지로서는 주간 “천리시보” 및 월간 “천리시보”․“기”가 각각 7만 5천부, 월간 “길동무” 및 계간 “거친 동료”가 각각 2만부씩 발행되고 있다. 교단조직은 교조의 혈통을 이른 진주에 의해 통리되며, 그 아래에 본부의 임원으로서 내통영․외통령․본부원이 있다. 교회에 있어서는 본부직속의 대교회, 그 아래에 분교회가 있다. 따라서 교단 통치는 진주-본부-대교회-분교회-신도의 도식이 되며, 분교회장 이상은 모두 세습제이다. 종교법인은 대표역원인 표통령은 진주가 임명하며, 임기는 재임중으로 한다. 책임역원 11명은 표통령이 선정하고 임기는 재임중이다.

사업은 게가로 불리는 병원이 있는데 의학․신앙․생활의 3방면에서 구원하려는 종합병원이다. 천리대학을 비롯하여 유치원․소․중․고에 이르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천리대학에는 일본최초로 한국학(조선학)과가 설치되어 일본에 있어서 한국학연구의 센터(조선학회와 “조선학보”)가 되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의 한국포교와 무관하지 않지만, 부속도서관에는 당나라 법장화상(643-712)이 신라의 의상조사(625-702)에게 보낸 편지 「기해동의상조사서」와 조선초기의 화가 안견의 작품인 「몽유도원도」 등의 귀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육영재단․아동보호시설․출판사․연구소 및 교인의 양성기관인 천리교교가 있다.

관련단체로서는 길의 교직원 모임(천리교관계 교직원의 모임, 기관지 “과연의 사람”), 천리교학생회, 천리시보사(인쇄), 양덕사(편집 출판), 동경천리교관(문화센터) 등 여러가지가 있다. 교세는 교회 16,558개소, 교사 169,312명, 신자 2,622,652명이다. 참고문헌에는 “천리교사전”(1977, 도우사), “교본천리교교조전”(1956, 도우사), 소요순자 “일본의 근대화와 천리교”(1969, 평론사), 촌상중양 “근대민중종교사의 연구”(1963, 법장관), 천리교교회본부편 “천리교년감”(매년 발행, 도우사), 안의치 “천리교용어사전”(1962, 양덕사), 준전태삼 “천리교 존명의 교조․중산미희”(1985, 강담사) 등이 있다.

1903년 부산서 포교 시작, 해방때 국고 귀속-영락교회가 해방전 천리교 건물

천리교는 그 성립이 이르고 교세가 신장됨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도 컸던 관계로 분파가 적지않게 일어났다. 자료에 의하면, 이 밖에도 1944년 회전히데에 의한 세계도심회본부즉 현재의 세계도심교단, 1946년 좌전팔중에 의한 성정도교단, 1950년 강본쓰에에 의한 일본신성강, 1961년 상출 후사에에 의한 천진교, 그리고 1962년 홈미치에서 대서옥 외에 의한 미륵회 즉 현재의 홈부싱이 파생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리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 「구로시다로」가 부산에 와서 포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971년 4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천리교포교소」를 설립, 활발한 포교를 했으나, 8․15해방 직후 왜색종교로 몰려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9월 21일 미국 조선주둔 24군사령부 종교담당 책임자 ‘밋첼’ 중위는 천리교를 일본제국과 천황가를 받드는 일본의 국가신도의 한 분파로 규정하고 11월 12일 폐쇄와 함께 대한민국에 있는 ‘재단법인 천리교 조선유지재단’에 속한 건물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영락교회가 해방전 천리교 건물이었다.     

1948년 「천경수양원」이란 이름으로 재출발, 1965년 신도 60만명 전성기    

1948년 「천경수양원」이란 이름으로 군정청 공보처에 등록하고 재출발을 시작했다. 1952년에는 「대한천리교련합회」로 개칭했고 초대 교통에 김진조가 부임했다. 1963년에는 「재단법인대한천리교」로 다시 이름을 바꿔 문공부에 등록했다. 1964년 제2대 교통에 최재한이 부임하면서 활발한 포교활동이 전개되었다.

1965년경에는 신도가 50여만명에 달하는 번창을 가져왔다. 1974년에는 최명진이 교통이 부임했고 1983년에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 1가 121-3에 본부를 옮겼다. 1987년에 6대 교통으로 김기수가 피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 천리교는 교조의 근본정신에 따른 한국적 천리교를 만들려는 「대한천리교」와 일본식 천리교인 「한국천리교련합회」의 두파가 형성되어 있다. 「한국천리교련합회」는 1996년 「천리교 한국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변경했다.

일본의 천리교는 명치 이후 신도 천리교가 되어 신앙상징이 교조 당대의 감로대가 아니라 일본 신도의 상징물인 쇠거울(神鏡) 「야따노가마미(팔경)」를 예배의 목표물로 삼고 「리노마루」를 그린 빨간 부채를 들고 「하오리하까마」를 입고 천조대신의 부모신을 모시고 있다. 이같은 신앙은 그간 한국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1985년 신앙상징물을 신경 대신 감로대로 바꾸고 기타 신도적 요소를 모두 제거시켜 버렸다. 이유는 일본의 민족신앙이 아닌 세계종교로서의 천리교를 믿고 교조의 근본정신에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 경기도 의정부시 회룡역 인근에 있는 천리교 본부.     


“일본 민족신앙 아닌 세계종교로서의 천리교를 믿고 교조의 근본정신에 돌아가자”

 그런데 여기서 반발하여 1987년 일본식 천리교를 고집하면서 마산 진해 지역의 천리교인들이 독립하여 진해시 여좌동 「한국천리교련합회」를 조직 독립해 나갔다. 현재 교세는 두 파를 합하여 8개 교구 5백여 교회와 1천여의 포교소가 있으며 신도수는 약 45만명에 달한다.

최재한은 1927년 16세로 일본에 와 한센씨병으로 고생한 끝에 1947년 천리교에 입신했다. 그는 한동안 큐슈(九州)북부 및 히로시마(廣島)의 재일교포 지역에서 포교한 후, 1955년 한국에 밀항, 눈부신 포교성과를 올렸다. 이 최재한이 죽은 1988년까지 원남성교회에서 17개소의 교회가 발생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최재한 이후, 재일 한국인들에 의한 모국방문과 포교가 줄을 이었다.     

현재 한국의 천리교 신자 가운데, 이처럼 재일교포의 귀국에 의해 설립된 교회 계통에 속한 신자들이, 패전 이전부터 존속했던 교회의 계통에 속한 신자들보다도 수적으로 더 많다고 한다. 패전 후 한국 천리교의 교세확대는 최재한이 설립한 원남성교회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 1960년대 및 70년대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내 천리교 가운데 대한 천리교의 성직자(교직자)양성기관인 대한천리교 수강원은 천리교 한국교단의 유일한 용재(용재:교역자) 양성기관이다.

현재 서울 용산구 청파동을 비롯하여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대구, 진해, 광주, 제주 등지에 수강원이 있으며 3개월 간에 천리교의 교리와 기본적인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한다.

수강원에서 청강할 수 있는 자격은 남녀 만 17세 이상의 신자로서 학력 불문하고 합숙생활을 원칙으로 하는데 3개월 동안에 천리교 교의원전, 교전, 교조전, 신악가해설, 종교사 예전, 신무 등의 교과과목을 이수한다. 수업방법으로 오전에는 주로 강당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적인 신앙정진에 전념한다.

수강생들은 교육을 통해 제전악기․연습도 하고 특히 신상(질병), 사정(고민) 등으로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는 불우한 사람들의 갱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며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즐거움을 베푸는 사람으로의 인격수양을 한다.

수강원을 마친 후에는 교역자(천리교에서는 용재라 함)가 될 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산재해 있는 1천여개의 천리교 포교소의 포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현재까지 대한천리교 수강원 수료생은 3만여명을 헤아린다.

천리교가 기구조직은 교통을 정점으로 하여 교의회가 있고 그 아래 교정집행기구로서 교무원을 두고 있으며 교무원 산하에 8개 교구가 직할시, 도 단위로 있다.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수강원이 있고 그외 교정기관으로 감사위원회, 심사위원회, 번역위원회, 징계위원회가 있으며 유지재단으로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복지후생을 맡고 있다.

특기할 것은 천리교의 봉사활동을 ‘히노끼싱’(양기생활)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나날이 살아가고 있은데 대한 감사와 즐거움에서 어머이신님께 바치는 일체의 인간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버이신님이 즐겨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스스로 행하는 행위가 어버이신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즐거운 생활 양기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리교 신도들은 매달 거리에 나가서 청소도 하고 교통정리, 유원지에서의 어린의 보호활동 등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교주격인 교통은 4년만에 한번씩 최고의 결심의 기구인 교의회에서 선출되며 교단을 대표하는 직위로서 초대 교통은 김진조, 2대 교통은 최재한, 그리고 최명진씨가 3∼4대 교통직을 역임했고 1983년 8월 13일자로 제5대 교통으로 취임한 김기수씨 지난 1987년 4월 18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대한천리교본부를 제외한 한국천리교련합회등 유사단체들은 日本의 국수적 신앙의 대상인 신각봉안하는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기수는 1904년 제주도 출신으로 1920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1925 서울법정학교 법학과를 수료하고 1933년에 천리교에 입교하여 천리교 교의강습소 제33기 수료를 했고 해방 후 성동구에서 천리교 혜성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대한 천리교단의 모체가 되는 천리수강원 결성에 참여하였고 1954년 대한천리교 교정부장, 1955년 대한천리교 수강원장이 되었으며 1983년 8월 13일에 재단 이사장 및 교통(교통)으로 피선되어 1984년 1월 14일에 취임식을 가졌다.

대한천리교 조수현 교통은 86년 한국천리교연합회로 갈라져 수차 재산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1993년 2월 11일 교단본부(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소재)을 전격 접수하면서 업무 개시와 동시에 ▷ 일본본부 간섭 배제로 자주교단 운영 ▷ 천리신앙의 한국 토착화 ▷ 교단의 민주체제 전환 등을 내세우고 일본과의 종숙관계 단절을 주장하고 있다. 1993년 2월 기준 3개교파 2백 60여개 교회에 50만신도(자체집계)가 있다.

천리교의 교리적 특색과 한국 무속과의 연관성

천리교의 교리적 특색으로는 천리교는 어버이신 천리왕님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천리왕님이라 함은 온 세계의 인류를 비롯하여 세상만물을 창조하여 주재(主宰)하고 섭리하는 어버이신님을 찬양하여 기념(祈念)해 받드는 칭호이다. 즉 천리왕님은 없던 세계, 없던 인간을 창조해 주신이 우주의 본원(本元)이 되는 어버이신님인 동시에 영원히 변함없이 만물에 생명을 주시고 자라나게 하는 실재(實在)의 어버이 신이다. 

어버이 신님이 남긴 유품으로 교전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붓을 잡고 친필로 1711수와 신악가(神樂歌)등 어버이신님의 계시 말씀을 직접 써 남겼다. 

인간의 질병이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천리에 맞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고, 인간의 마음의 성인(成人)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죽은 후에 있는 어떤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出直)하는 내생(來生)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생을 믿는 이상, 물론 이 전생(前生)도 믿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생은 전생, 금성, 내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인간은 창조주이신 어버이신님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 신의 자녀이며, 우리 인간의 주체가 되는 영혼을 그 본성에 있어서는 매우 맑고 깨끗한 명성을 지닌 것이다.

<은혜> 
1. 어버이신님의 은혜(神恩)
2. 나라의 은혜(國恩)
3. 어버이의 은혜(父母恩)
4. 스승의 은혜(師恩)
5. 사회의 은혜(象恩)  
 
천리에 맞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고치게 하여 115세의 정명(定命)까지 살게하며, 또 더 나아가서는 병들지 않고 죽지않고, 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겠다고 일러 주시고 있다. 그러나 미끼는 1887년 1월 26일 90세 나이로 죽었다.    

마호메트가 40세에 천사를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종교생활을 시작했듯 천리교의 창교조 미끼여사도 41세에 신을 만난다. 두 사람 공히 배우자가 있었으며 나름 정상적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상인으로 살면서 접한 외래문물과 성장과정에서 느꼈을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나이든 주류적 삶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유일신 사상이 전제되고 있다.    

미끼 역시 신장대를 잡았다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은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무녀를 불러 진호기라는 의식을 치른다. 쌀을 놓고 그때 대나무를 잡는다. 꼭 돌아가신 분과 관련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된다. 대나무를 신장대라고도 하는데 그곳을 통해 망자와 접신하게 된다. 접신자의 입을 통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살아서 섭섭한 이야기를 못다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화해의 장을 펼쳐진다. 소반 위에 쌀에는 무당이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보인다. 그러면 무당은 그 모양을 통해 새가되고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었다는 진단을 한다. 이때 잡는 사람말은 신장대를 잡고 불,징 그리고 무당의 유도신문에 자신도 모르게 대나무가 움직였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인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장이 잘 내리지 않으면 무당은 주변에 기독교인이 있는지 유무를 확인 후 혹 기독교인 있다면 자리를 피해줄 것을 주문한 후 재차 시도한다.     

부흥회가 사람들을 극도로 흥분시키고 주변사람들이 은총을 받고 감사의 예물을 내놓으면 그 궁중심리에 의해 비자발적 참여를 하듯 신장대를 잡은 사람도 이와같은 유사한 분위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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