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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40●캄보디아불교(7·마지막회)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9/16 [08:17]
앙코르의 영광, 상좌부 불교 부흥

현대세계불교40●캄보디아불교(7·마지막회)

앙코르의 영광, 상좌부 불교 부흥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7/09/16 [08:17]
▲ 국제불교 총회에 참석한 캄보디아 승가 보수파 종정스님과 필자   

동남아시아의 불교권에서 캄보디아는 국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좌부 불교의 전통만큼은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킬링필드라는 정치적 대 격변을 겪으면서 캄보디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크메르 공화국을 이끌던 론 놀이 해외 망명의 길을 택한 사이, 베트남전이 종식되면서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에 입성했다.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개칭한 크메르 루즈는 혼란한 국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폐제도의 폐지·도시 주민의 강제 농촌 이주 등의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내세워, 기존의 산업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기업인·유학생·부유층·구정권의 관계자, 심지어 크메르 루즈 내의 친 월남파까지도 반동분자로 몰아서 학살했다.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1980년 통계로는 2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1984년 영화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의 저널리스트인 딧 프란과 또 다른 생존자 하잉 응고르가 겪은 일들을 보여준 영화다. 정말 인류에게 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참극이었다.   
▲ 킬링필드 때 희생된 국민 위령탑.     
▲ 위령탑에 봉안된 유골들.  

필자는 앙코르를 둘러본 뒤, 프놈펜으로 향했다. 프놈펜은 캄보디아의 수도다.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서 톤레 샵과 메콩 강을 끼고 있는데 1865년 프랑스 식민지 때 이곳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이 도시가 처음 생긴 것은 1372년이다. 지금은 정치 문화 외교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서 현대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도시다. 프놈펜 인구는 2백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프놈펜은 프랑스 식민정부가 발전시킨 도시이기 때문에 프랑스풍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프놈펜이란 어원은 ‘펜의 언덕 (Penh's Hill)’이란 뜻인데 왓 프놈(Wat Phnom)이란 사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1373년에 처음 세워진 이 사원은 프놈펜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원이다. 해발 27미터 높이에 위치한 언덕에 세워진 불교사원인데, 현재는 비구들은 없지만, 프놈펜 시민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강둑길을 따라서 조금 걸어가니 왕궁이 나왔는데, 캄보디아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왕궁 옆에는 몇 개의 사원이 있었고, 불교대학이 있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부학장인 소반라타나 비구스님을 만나 뵙고 캄보디아 불교에 대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듣고 캄보디아 불교협회도 찾아서 캄보디아의 현대불교계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 캄보디아 불교대학 부학장 소반라타나 비구스님이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내전 전에는 6만 명의 비구들이 있었는데, 킬링필드 이후에는 불과 1천명도 안 되는 그야말로 불교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약 6만 명의 비구와 4만 명의 사미가 있고 정식 비구니는 아니지만, 준 비구니들도 수천 명이라고 했으며 사원은 캄보디아 전국에 4천 개 정도가 된다고 했다. 프라 시아누크 라자 불교대학교 부총장인 프라 텝사따 키 소반라타나 스님은 매우 바쁘게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분으로 영어에 능통하고 캄보디아 진보파 승가의 상가라자 텝봉 종정의 사서실장이기도 한, 그야말로 캄보디아 불교의 미래 지도자라고 하겠다. 스님은 현재 불교대학 부학장으로 재직 중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앞날이 촉망되는 엘리트 비구스님이다.     

캄보디아 불교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불교가 헌법상으로 국교가 되어 있으며 국민 거의95%가 불교신자라고 했다.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독신으로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했으며, 비구로서 단기 출가한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캄보디아를 찾는 기간은 태국과 마찬가지로 신년 명절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국민들의 축제분위기를 중계했고, 비구스님들을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는 등, 그야말로 불교를 국교로 대접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 캄보디아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서 비구들에게 공양하는 모습을 중계하고 있다.     
  
캄보디아 불교는 그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크메르 왕국은 불가사의한 앙코르 왓을 건립했고, 또한 바이욘 불교사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힌두교를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불교를 받아들였고, 결국에는 테라와다(상좌부) 불교가 정착되었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를 겪으면서 불교는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캄보디아의 비구들에 의해서 불교는 지켜졌고, 프랑스로 부터 독립한 캄보디아의 불교는 제자리를 찾는 듯했으나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내전을 겪게 되고 ‘킬링필드’라는 동족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인구 800만 명 가운데 이백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캄보디아의 현대사다.  
▲ 캄보디아 불교협회 사무총장 스님과 필자.    

나는 이번 캄보디아를 11년 만에 찾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는데, 불교가 급속도로 부흥하고 있었고, 특히 상좌부의 전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캄보디아 불교는 태국 라오스 미얀마 실론과 더불어서 상좌부 불교권의 강한 연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캄보디아의 시엠 립과 프놈펜에서 보고 느낀 캄보디아의 불교는 밝아 보였다. 거의가 젊은 비구들로서 나이 많은 비구스님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킬링필드 때 많이 희생당하고 강제로 환속 당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다시는 이런 법난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프놈펜에 있으면서 킬링필드 박물관을 찾아서 희생당한 영령들에게 묵념을 올렸지만, 그 참혹했던 광경과 역사는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해골들이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다. 수많은 서구인들도 이곳을 찾아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노로돔 시아누크 왕이 왕위에 올랐다가 지난 2013년 서거하고 2014년 장례식을 거행할 때, 캄보디아의 비구들 수천 명이 빨리어 염불을 하면서 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은 장관이었다. 캄보디아 왕국의 헌법에 불교는 국교라고 아주 못을 박을 정도로 불교는 캄보디아의 종교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1천 6백만 인구에 비구가 6만 명 정도 되며 사미승 까지 포함하면 10만 명 정도 된다고 캄보디아 불교협회의 한 비구스님이 들려주었다.  
▲ 캄보디아 왕궁 앞에 걸린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 초상화    

나는 이번 캄보디아 불교의 현장을 보면서 캄보디아의 불교가 다시 부흥하는 것을 보니 정말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뿌듯하고 감동적이었다. 많은 비구스님들을 캄보디아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어서 캄보디아 불교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킬링필드 박물관을 찾았을 때는 눈물이 돌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이데올로기의 이념이 가져온 참극은 너무나 충격이 컸고, 한 나라를 수렁에 빠뜨렸지만, 크메르인들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킬링필드 당시에 인구 8백만이었지만, 현재 1천 6백만 명이라고 한다. 젊은 세대들은 킬링필드의 비극을 잊은 듯,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고, 불교가 국교라서 캄보디아 국민들의 마음을 부처님의 자비로 감싸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심성이 착하고 불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크메르인들에게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기를 기원하면서 캄보디아 불교 소개를 일단 이 정도에서 그치려고 한다.
보검: 해동 세계불교연구원장 (www.haedongacademy.org)  
▲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왕궁 앞에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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