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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화와 전설을 폄하하는 집단지성을 꾸짖는 삼국유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1/02 [08:38]
삼국유사와 승 일연의 생애

우리의 신화와 전설을 폄하하는 집단지성을 꾸짖는 삼국유사

삼국유사와 승 일연의 생애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1/02 [08:38]

  
삼국유사 첫머리에 기이편(紀異篇)을 실은 뜻    

책의 서문은 책 전체 내용과 취지를 유추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삼국유사의 서문도 책 내용, 기록하게 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첫 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록)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登)에게 교접하더니 염제(炎帝)를 낳았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황아와 교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卵] 하나를 삼키더니 설[契]를 낳고 강원(姜嫄)은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充)를 낳았다. 요(堯)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이 된 뒤에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건국신화는 박혁거세가 자색 알(혹은 푸른 큰알)에서 태어났다. 후백제 견훤이 큰 지렁이와 교혼하여 태어났다. 무왕의 어머니가 못의 용과 교통하여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괴이하거나 신기하지 않다. 우리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괴이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중국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는 당시 지성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8백년 전 일연스님이 지적했던 사대적 근성은 현재 우리사회에 흔적처럼 남아있다.     

우리의 신화와 전설을 폄하하는 집단지성을 꾸짖는 삼국유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누락된 내용을 편집한 책이 아니고 중국의 이야기에 관대한 동의를 하면서 우리의 신화와 전설에는 스스로 폄하하는 집단지성을 꾸짖고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족보 그리고 승려들을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각 성씨 본(本)을 살펴보면 토종 본(本)보다 중국에 근원을 둔 본(本)이 다수를 차지한다. 승려들 역시 중국을 다녀온 유학승. 중국 승려에게 인가를 받은 것을 제일로 생각한다.     

그런 불교계 풍토에 반발한 것이 원효의 이야기다. “해골 물 마시고” 돌아왔지만 의상은 중국을 다녀왔다. 의상은 누구로부터 수학을 하고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상보다 원효의 책은 경(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견주어 크게 주눅들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나타나 있다. 고조선 부분은 민족 운동가들과 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환인이냐 환국이냐 대웅전 문제가 그것이다. 환국이 일제에 의해 역사 왜곡으로 환인이 되었다는 고려대 소장 임신본 붓글씨 조작설이다. 대웅은 단군의 어머니와 관련된 큰 곰이라고 한다.
(「여고동시」가 아니라 「여요동시」다.)     

고조선의 건국은 중국 신화의 시대 요순의 요가 즉위한지 50년이다. 변방의 작은 나라 고조선의 역사는 장구하며 하나의 독립국임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깊고 독자적 문화를 가졌다는 자부심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이곳이 붓다의 고향이라는 주장도 거침없이 하고 있다. 몽고 침략으로 불타 없어진 황룡사에는 가섭이 설법하던 자리가 남아있다는 「가섭불연좌석」 이 그 증거다.    

삼국유사의 저술지 인각사는 한때 수몰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것을 하이텔 한국사 동호회(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제공했던 종합인터넷망 공식명칭은 한국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신자인 김종민 씨가 토론방을 통해 여론을 일으키고 불교 동호회 송형근(편집자 주;당시 한양대 전자공학과)이 「인각사수몰반대운동본부」(1997년 6월 21일 경향신문)를 결성하는 등 이들의 노력으로 인각사는 수몰위기에서 벗어난다.    

존재도 몰랐던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읽히게 된 이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의 속명은 견명(見明) 밝을 명(明)에 볼 견(見)이다. 자는 회연(誨然) 호는 목암(睦庵) 그의 어머니 꿈에 해가 몸을 감싸며 낳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9세에 광주 무량사에 들어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연(一然)이란 불명은 그의 나이 50대 중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해왔다. 본명의 어두움과 밝음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한다.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생각은 삼국유사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삼국유사는 민족의 고전으로 줄곧 읽힌 책이란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13세기 일연에 의해 만들어져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경주 부윤(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중종 7년(1512) 임신년(壬申年)에 복간 한 덕분이다. 그는 한 지방 관리로서 민족의 역사를 후대에 알려야겠다는 뛰어난 사명감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한꺼번에 새롭게 판각을 할 수 없어서 구각판(舊刻板)을 사용하기도 하고, 한 곳에서 전부를 새길 수 없어서 여러 읍에 나누어 일을 진행하였다. 이후 단 한번도 인쇄되지 않았던 책이다.     

20세기 들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700년 만에 재 조명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350 여종의 번역서가 나오고 30여종이 더 많은 것이 그리스 로마신화가 1위다. 그 다음 춘향전이 180종이 나왔다. 춘향전은 영화소재로 하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어느 정도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고전인데 이 책보다 두 배 정도 더 읽힌 책이다.     

존재를 몰랐던 이 책이 최근 우리들 사이에 읽히기 시작한 이유는 사실 미스터리다. 더 나아가 20여년 넉넉잡아 30여년 전만해도 삼국유사는 우리들 속에 단순히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국사시험 선택형 문제의 하나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늘 고민스럽게 했던 제목이다. 그런 책이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    

700년만에 재조명 되며 가장 많은 350종 번역서 나와    

많은 번역서 가운데 최남선을 비롯하여 권상로, 이재호, 이병도 등의 번역정도 였는데 어느날 돌아보니 350여 종에 이르는 번역서에 만화까지 다양한 장르에 책이 출판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책이 출판될 것이다. 30여 년 전 삼국유사연구원이란 단체를 만들어 명함을 가지고 다닐 때 거의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았다. 전문적 연구할 가치가 있는 분량이 되는지 그런 세월이 지나 이 자리까지 와보니 저 자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다양해진다.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우리보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했다. 1904년 동경대학에서 배인본(排印本)을 출판했다. 이것은 간다본과 도쿠가와 본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책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조선에 귀한 서책을 가져가는 속에 두 책이 포함되었고 그 중 한권을 도쿠가와에게 선물하게 된다.     

일제때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을 지낸 문정창이 “일제가 20만 권의 책을 불태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책으로 지공예 작품을 만들기 위해 훼손하고 양재물에 넣어 먹 글씨를 지워 종이를 구하던 우리 조상과 다르게 책을 귀하게 여긴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20만권을 태웠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표현이 더 설득력이 있다.    

1916년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순암수택본’을 인사동 골목에서 발견하여 일본에 가져가 1926년 교토대학에서 영인본을 내놓았다. 이마니시류가 당시 인사동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역으로 그가 동경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추론하게 된다.

경주 부윤(府尹) 이계복(李繼福)의 삼국유사 발문(跋文)    

우리 동방 삼국(三國)의 본사(本史)나 유사(遺事) 두 책이 딴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本府)에만 있었다. 세월이 오래 되매 완결되어 한 줄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겨우 4, 5 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여러 역사책을 두루 보고 천하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 그리고 모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오히려 그 견식을 넓히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이 책을 다시 간행하려 하여 완본(完本)을 널리 구하기를 몇 해가 되어도 이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찍이 이 책이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 사람들이 쉽게 얻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이것을 고쳐 간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실전(失傳)되어 동방의 지나간 역사를 후학(後學)들이 마침내 들어 알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실로 탄식할 일이다. 다행히 사문(斯文) 성주목사(星州牧使) 권공(權公) 주(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完本)을 구해 얻어서 나에게 보냈다. 나는 이것을 기쁘게 받아 감사(監司) 안상국(安相國) 당과 도사(都事) 박후전(朴候佺)에게 이 소식을 자세히 알렸더니 이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이에 이것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켜서 본부(本府)에 갖다가 간직해 두게 했다.    

아아! 물건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폐해지고 폐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일어났다가 폐해지고 폐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치의 떳떳한 바이다. 이치의 떳떳함으로 일어날 때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전하는 것을 영구하게 해서 또한 후세의 배우는 자들에게 배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황명(皇明) 정덕(正德) 임신(任申) 계동(季冬)에 부윤(府尹) 추성정난공신(推誠定難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주진병마절제사(慶州鎭兵馬節制使) 전평군(全平君) 이계복(李繼福)은 삼가 발문을 씀.

 
위대한 문화군주 중종때 비로소 재발행    

이계복이 살던 1500년대는 조선 문학의 르네상스기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영·정조대 특히 정조 시대를 그렇게 보는데 사실 정조집권기는 지식인들이 숨 막혔던 시절이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당시 유행하던 신체문(新體文)이라는 문체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정성을 잃고 잡문체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순수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걸 지시한 사건이다. ‘반정(反正)’은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정조는 서학 금단책의 일환으로 문체반정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했다.     

삼국유사를 재 발행했던 중종시대는 1506년에 음력 9월 2일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집권 후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신진사대부를 등용개혁을 주도한 개혁군주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기묘사화를 통해 권력욕을 드러낸 군주다. 이 당시는 언론출판에 관한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것이 유학자가 승려가 쓴 책 그것도 황당무계하고 귀신 신 나락 까먹는 소리가 있는 책을 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 중종은 위대한 문화군주라고 생각한다.     

정조를 잠시 설명한다면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저술후 반성문을 쓰고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열하일기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운 오랑캐에게 배워야한다는 박지원의 주장이 담긴 이 책은 <인쇄판본>이 없는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인쇄마저 할 수 없는 책이 <열하일기>이었다.    

중종 당시 다양한 책들이 나왔다. 정조 때라면 상상할 수 없었다. 삼국유사류의 책을 출판했다면 귀양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왕이 무관심했다는 사실이고 이계복이 출판해주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비슷하다. 몽고의 침략과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 경험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에 와있다.     

민속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의 지속성을 알려주는 책    

삼국유사를 민속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의 지속성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단군의 이야기 속 신단수는 동네입구에 존재했던 성황당으로 발전되었으며 지금은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황당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본다. 개신교회들의 기도원들이 주로 산에 위치해 있는 사실도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부모를 통해 신앙의 대물림되는 경우와 이성 친구를 통해 믿음을 선택하고 친구, 혹은 여러 이유를 통해 종교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개종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교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부르던 종교를 바꾸게 된 이후 자신이 믿던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믿었던 종교를 버리고 다른 믿음을 선택한 다해도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믿음으로의 전환이란 사실이다. 불교로 개종을 하던 기독교로 개종을 하던 민간신앙의 바탕위에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황당이 발전하여 산신이 되고 그것이 사찰에 들어가 산신각이 되었다. 전통문화 속에 산신은 호랑이라면 사찰 속 산신은 산신으로 그려진 인물을 보호하는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면서 부산 통도사의 산신은 호랑이를 걸터앉아 지긋이 한발로 누르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데 그것은 산신으로 형상화된 호랑이의 존재에 대한 불교계의 두려움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삼국유사문화원장)    

*이 원고는 장정태 박사가 한민족세계화본부(총재·권천문 박사)의 수요인문학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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