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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사상(4.끝) 정조의 효심을 간직한 용주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2/12 [08:22]
사일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깨달아 지은 절

정조의 효사상(4.끝) 정조의 효심을 간직한 용주사

사일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깨달아 지은 절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2/12 [08:22]
▲ 사진; 양반집 행랑채를 연상시키는 용주사 삼문 주변 풍경. 신주 모시는 사당 역할도 한 곳으로 이곳에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사일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깨달아 지은 절
    

사진; 양반집 행랑채를 연상시키는 용주사 삼문 주변 풍경. 신주 모시는 사당 역할도 한 곳으로 이곳에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용주사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용주사 터에는 본래 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용주사 범종의 명문에 따르면, 갈양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절이며, 854년에 범종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에는 혜거 국사가 갈양사는 산수가 빼어나니 국가만대의 복지를 위하여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을 것을 나라에 건의하여 국가의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갈양사는 조선 초까지 법등이 이어졌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갈양사의 옛터에 세워진 용주사는 오늘날 수원시가 발전하는 큰 계기가 된 절이다. 1789년 정조가 경기도 양주 땅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 근처로 옮기고 승지 이익운과 윤행임 등을 소견하며 전교하기를 “절터와 향교 터를 등람한 뒤에 여를 타고 재전을 나와 밭 사이의 소로를 따라 불사(佛寺)와 부도의 옛터에 나아가 간심하였다. 조윤식을 불러서 절을 짓는데 대한 형편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봉정(峯頂)의 옛터에 절을 지은 지 60년 만에 그대로 황폐해졌는데, 승도가 모두 밭 사이의 남향으로 고쳐 짓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하여, 도형을 들이라고 명하고 도형을 열람하였다. 정조가 둘러본 절터를 수원부 읍치 객사주변에 있었던 반룡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즉 현재 용주사를 ‘현륭원의 풍수를 ’반룡농주‘로 정리한 후 그곳에 절을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는 틈만 나면 아버지 묘소를 찾았고 용주사에 들르곤 하였는데. 그런 까닭에 이절 구석구석에는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전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용주사는 승려들에 의한 이탈된 모습도 보이고 있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상께 아뢰기를, “용주사(龍珠寺) 중들의 군장(軍裝)은 총융청에서 지급하는데, 갑옷⦁투구⦁화살통은 붉은 모직을 쓰기까지 하니, 사치스러운 습속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을 파직하고, 이창운(李昌運)으로 대신하였다. 상이 현륭원에 행차하려고 하면서 자전(慈殿)에게 문안드릴 사람이 없다 하여 김용주(金龍柱)의 죄명을 씻어주었다.    

정조의 능행을 위해 시흥로를 닦았다. 정조가 시흥로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민폐를 염려해서만이 아니라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영의정 김상로(1702-?)의 형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악로(1694-1753)의 무덤이 과천 냉정동 고개 너머(현재 과천시 갈현동)에 있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였기 때문에 보기 싫어서라는 주장이 김씨 집안에 전해져 오고 있다. 정조의 능행길에는 또 다른 영의정 한익모(1703-1781)묘가 의왕시 월암리에 소개해 있다. 정조의 수원에 현륭원 이장의 이유 가운데 하나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두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정조의 조부 영조가 노론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후 지속적인 기득권을 형성한 율곡학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조 주변은 외가뿐 아니라 처가. 궁녀, 환관에 이르는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정치세력화를 꾀해야 하는 정조는 표면상 노론의 영수 의암 송시열을 송자(宋子)로 떠받들어 극진히 예우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노론의 적대적 관계에 있던 기호 남인을 등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1720-1799)가 있다. 그 외 정치적 세력화는 서얼출신에 대한 인재등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궁궐 건축물에서 보이는 배치, 용주사 삼문-신주 모시는 사당 역할    

이 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삼문이다. 삼문은 보통 궁궐이나 사원, 사당 등에 세워지는 것으로 불교 건축물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은 건축양식이 도입된 것은 1790년 2월 20일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소견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조포사의 역은 지금 거의 끝나 가는데 기지가 과연 좋고 보기에도 훌륭합니다. 조윤식의 말을 들으니 ‘누대 앞이 광활하여 삼문과 좌우행랑을 세운 뒤에야 전면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이니 혹 동가(動駕)할 때 인마를 수용하는 장소가 될 법도한데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는 뜻으로 회보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특히 삼문 좌우로 행랑채가 이어져 있는 모습은 궁궐 건축물에서 흔히 보이는 배치이다. 특히 사당에서 삼문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양옆 문만을 드나들 수 있는데. 들어갈 때에는 오른쪽 문을 이용하고 나올 때에는 그 반대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 문은 신도라고 해서 신이 드나드는 통로이다. 용주사에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삼문이 있는 것은 이 절이 신주를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바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삼문 주련에는 용주사불로 이루어진 사행시가 씌어있다. 용주사 낙성식 전날, 정조가 꾼 꿈을 명필 안순환이 쓴 글귀이다.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 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붓다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부모은중경』 판목을 새겨 소장한 용주사    

정조가 이렇게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절을 창건한 것은 사일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크게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불교를 심하게 배척하였던 당시에 임금이 직접 절을 창건하게 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며, 여기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용주사가 세워질 때에는 고위층 관리 96명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이름 있는 승려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시주 또한 상당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때 사일 스님은 팔도도화주가 되어 대웅보전과 선당, 승당, 천보루, 칠성각, 향로전, 제각 등 총 140여 칸을 세웠다. 1790년 절이 완성되어 낙성식을 하기 전날, 정조가 용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현재의 용주사라 했다고 한다. 이후 용주사는 전국 5규정소(승려의 기강을 진작하였고 승풍을 규찰하는 기구)의 하나가 되어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이 되었으며, 팔로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왕실 사찰로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를 지내고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인근 여러 사찰과 암자를 거느렸으며, 지속적인 중창을 계속하여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대웅보전 우측에 자리 잡은 효성전은 정조의 효심을 기리는 공간이다. 내부에 사도세자와 비, 정조와 비의 위패를 봉안해놓았다. 창건 당시에도 사도세자의 위패를 봉안하는 호성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는데, 그 전각을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 앞에 있는 탑은 부모은중경탑이다. 이 탑에는 장흥 보림사 보경 사일스님이 정조에게 바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 가지로 설명하지요.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네 번째는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
다섯 번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
여섯 번째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은혜,
일곱 번째는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 번째는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은혜,
열 번째는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에 감동받은 정조는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했으며, 보경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경을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主寺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대단히 소중함을 설한 경전이다. 중국에서 지은 경전으로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10대은(大恩)으로 나누어 설했다. 이 경전은 효 사상(孝 思想)을 중시하는 중국 전통의 문화·정서에 맞추어 제작된 위경(僞經)이다. 그러나 시사하는 바는 역사적 사실을 떠나서 효도에 있다. 이 경에 대하여 개원록(開元錄) 심팔의혹상재상록(十八疑惑再祥錄)에는 “경(經)에 정란(丁蘭)⦁동암(董黯)⦁곽신(郭臣) 등을 인용하였으므로 후인(後人)의 저서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반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모은중경은 1378년에 간행된 것이며 조선시대에는 이 경전이 다른 경전에 비하여 가장 많이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유교의 덕목과 관련 있는 효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실천은 아버지 사도세자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할아버지 영조가 영잉군으로 있을 때 경종 원년(1721) 8월 15일 부친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도중 금암에 머물면서 흉년으로 어린 손자가 7일간 굶어 참다못해 노인을 풀어준 일화가 있다. 영조 5년 숙종의 명릉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도중 금암에 이르러 할아버지 영조의 일화를 회상하면서 금암기적비(1978년 12월 18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8호 지정, 은평구 진관내동-은평 뉴타운 소재)를 세웠다. 친히 비문을 지었다.    

수원 화성과 용주사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공간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정조의 효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원 화성과 용주사의 건설이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양주 배봉산(현재 삼육보건대학교 주변)에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옮기기 위해 명당을 물색하였다.

박명원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오래전부터 봉표해둔 여러 곳을 검토한 후 전국 3대 길지의 하나로 지목되어 보호받고 있던 수원 도호부의 주산 화산으로 결정하였다. 수원화산은 윤선도가 강력하게 추천한 효종의 능지로 정조 당시까지 비워져 있었다. 수원 화산으로 천장이 결정된 이후 사도세자의 융릉 곁에는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용주사 창건은 단순히 효심에 따른 의례의 한 가지로 보기에는 정조에게 있어 정치적 위험이 따른다. 조선조 전체를 지배했던 것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적 입장에서 이단의 종파인 불교 사찰을 국왕이 직접 독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절이 완공된 후 용주사라는 사명뿐 아니라 대웅전 앞 나무를 식수하기도 한다.

수원 행궁은 조선이 가지고 있던 3개의 행궁(수원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평지에 건설되었다. 이것은 두 개의 행궁이 국가 방위를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수원 행궁은 사도세자의 융릉 가까운 곳에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노후를 준비하는 정조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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