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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불교개혁사상가 퇴경당 권상로의 개혁운동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3/26 [07:18]
한국 불교사를 정립했던 불교학자이며 한국문학사를 정리했던 국문학자

근대적 불교개혁사상가 퇴경당 권상로의 개혁운동

한국 불교사를 정립했던 불교학자이며 한국문학사를 정리했던 국문학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3/26 [07:18]

한국의 최근세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혁불교로 성격 지워진다. 앞 세대 초의(1786-1866)에서 비롯되어 금세기까지 이어진 선의 본질논쟁이 개혁을 위한 정체성의 구축이었다면 그 뒤를 이어 활동하는 경허(1848-1912)등 선실수운동은 물론 개화승 이동인(?1878-1881-?)의 정치활동, 백용성(1864-1940)의 대각교운동을 통한 대중화운동, 한용운(1879-1944)의 임제종 조직으로 대표되는 항일민족운동, 권상로(1879-1965)의 『조선불교 개혁론』을 비롯한 개혁이론화 작업 등 다방면에서 개혁의 구체적인 전개가 이루어져 왔다.

급변하는 시대의 사회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승단제도의 개혁과 제도사업으로 일컬어지는 민중구제의 여러가지 방법이 모색되었던 점에서 개혁불교의 움직임은 범 종단적 흐름으로 파악된다. 다시말해 근대불교의 개혁운동은 한일합방을 계기로하여 불교 사조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그중에는 불교계몽운동 내지 사회교화력의 확대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자주 의식 등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특징을 갖는다. 동시에 한국 사람 귀의처가 된 불교의 사회적 성격에 유의한 일제는 직접적으로 혹은 일본 불교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제약과 회유를 하게 되며 개혁운동 등 일제시대의 불교 흐름에도 이러한 시대상황이 반영된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앞선 궝상로의 『조선불교 개혁론』    

오늘날 불교개혁이론은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효시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이는 임제종 운동(1911)의 선상에서 이론이 전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에 전개되는 불교활동을 살펴보면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5월 회동서관에서 간행)에 앞서, 1912년 4월부터 『조선불교월보』라는 잡지에 권상로의 『조선불교 개혁론』이 연재되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에 발자취를 남긴 승려 가운데 권상로가 이루어낸 학문적 업적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넓고 성실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한용운이 임제종 운동을 할 때 권상로는 원종의 입장을 견지하기는 했지만, 식민지시대의 불교를 근대화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뛰어난 개혁승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 불교사를 정립했던 불교학자이며 한국문학사를 정리했던 국문학자이기도 하다.     

권상로는 1879년 2월 28일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서당에서 10여 년 간 한학을 배웠으며 1896년 4월 경북 문경군 운달산 김룡사에서 월명 서진선사를 은사로 불교에 귀의 득도했다. 그 뒤 10년간 김룡사 부설 불교전문 강원에서 사집과,사교과,대교과를 이수했다. 1906년 4월 김룡사 경흥학교와 성의학교 강사를 역임하고, 1909년 12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만 2년간 종무원의 편집부장을 역임하였다. 1911년 12월부터 1912년 12월까지 경상북도 문경군 사불산 대승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1902년 12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총무원의 기관지 「조선불교 월보」의 사장을 역임하면서 불교중흥을 모색하였다. 1918년 2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금룡사 지방학림과 상주 보광학교의 강사를 역임한다. 1923년 4월부터 1931년 4월까지 9년간 월간지 「불교」의 사장을 맡았으며, 1931년부터 1944년까지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44년 4월부터 1946년 8월까지는 불교 총본산 태고사의 교학편수위원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동국대학교, 6월 학장에 취임한다. 1953년 2월 동국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총장에 취임 그해 7월에 정년퇴임과 동시에 명예교수가 되었다.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취득,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명예직으로 한국박사학위 논문심사 위원, 국어심의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불교포교사 검정위원장, 불교법계고시위원회 위원, 불교법계 위원, 불교성전 편찬위원, 문교부 국정교과서 교사위원, 대한고서간행회 국역위원, 한국종교 신도연맹 고문, 신라가야 문화연구소 위원,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수위원회 위원장, 중앙불교연구원 원장, 현대불교사 사장, 불교사상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술로는 『조선불교약사』, 『조선불교사』, 『삼국유사역강』 사료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고려사불교사초』, 『이조실록불교초존』 , 『한국불교사료』 , 『한국사찰전서』 , 『한국지명갈혁고』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논문으로 『능가요초』 , 『팔관회참고』, 『자학관규』 등 총 18편이 있다. 1965년 4월 19일 청량리 2동 205의 149 평지암(자택)에서 향년 76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영결식은 조계종 종단장으로 23일 서울 흥천사에서 거행, 그 후 20주기가 되는 1987년 경북 문경군 산북면 운달산 금용사 경내에 퇴경당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오랫동안 권상로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990년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퇴경당전서』 전9권이 간행되었다. 「승려지원병에 대하야」, 「응징성전과 불교」, 「임전과 조선불교」 등 여러 편의 친일적 내용의 글이 누락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권상로가 태어난 때는 오랫동안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부패가 극에 달하여 땅에 떨어진 왕권을 바로 잡으려고 흥선 대원군 이한응이 섭정하며 국정에 일대수술을 단행하고 정치의 쇄신, 서원철폐등 개혁적 정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등 대단위 토목공사를 시작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돌보기보다 왕권강화에 더 많은 국력을 소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굳게 닫았던 쇄국의 문을 열고 서양열강들과 속속국교를 맺게되었다. 이에따라 외국의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급변에 따라 근대화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고 학문과 사상, 문명과 문화, 생활과 풍습, 모든 방면에 개화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런 때 강화도 조약으로 이 땅을 침략하는데 유리한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 권상로는 불교의 개혁을 바라는 「논불교 개혁론」이 발표된 『조선불교월보』. 1912년 4월(3호)부터 1913년 7월(18호) 까지 총12회에 걸쳐 총 4편 15장으로 구성된 상당한 분량의 논문이다.     

불교교육의 현대화를 통한 불교도 정신재무장 촉구    

이 무렵 권상로는 불교의 개혁을 바라는 「논불교 개혁론」을 『조선불교월보』을 통해 발표하였다. 조선불교월보 3호인 1912년 4월부터 18호인 1913년 7월까지 총12회에 걸쳐 발표한 논문이다. 18호로 월보가 폐간되었으니까 거의 전 기간 동안 연재된 셈이다. 권상로가 발표한 「논불교개혁론」은 총 4편 15장으로 구성된 상당한 분량의 글이다.     

그는 제1편 서론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쟁시대에서 조선불교는 이제 존립마저 위태로운 시점에 있음을 선언한다. 제2편 「논개혁 여하」의 1장 「논개혁의 필요」에서 그는 변화를 ➀개량 ➁발달 ➂확장 ➃유신의 국면으로 나누어 살핀 후, 한국불교계론서는 유신이 물론 제일 긴요한 명제이기는 하나 개혁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2장 「논개혁의 성질」에서 그는 천위개혁과 인위개혁의 적극적·소극적 성격을 설명한 다음, 천연론에 입각한 적극적 인위개혁이 가장 바람직한 개혁론이라고 주장한다. 경쟁력과 희망심이 없이는 어떠한 개혁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3장 「논개혁지관계」에서 그는 야소교의 위력이 세계를 진동하는 까닭은 이러한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친위개혁의 구관계를 탈각하고 인위개혁의 신관계로 추향함이 금일 오교에 제일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4장 「논개혁지 이해」에서 모든 불교인들의 정신적 재무장을 촉구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에게 과연 수양과 반성의 궁극점은 어디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권상로의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빈곤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게 된다.     

7장 「논개혁지 시대」에서 그는 ‘오교 금일은 가위천재일우’라고 말한다. 물론 한국불교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더 이상 파괴될 것도 없는 극한적 상황이었으므로 그의 말은 역설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삼천리 반도는 대화판도에 동재하고 이천만 생령은 천환양로에 균점하여 일초일목이 무비향양’하고 ‘천황도 자조자를 필조하나니 오제의 의무를 오제가 불행’하면 안된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개혁론의 자치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함을 알게된다.     

8장 「논개혁지후에 위단체위자치」는 뚜력한 증거로서 ‘여는 일언이단지왈 개혁한 연후에야 단체력이 완결하고 자치체가 엄립’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자체가 ‘개인의 행위가 법률에 저촉치 아니함’을 의미한다면 개혁은 결국 단결력이 없는 식민지 불교가 실천해야 할 정신재무장운동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개혁론의 정신사적 한계는 그가 제3편 「논개혁지 전례」의 1장 「논석가출세가 전위개혁」에서 석가가 계급타파를 실현한 최초의 개혁자이며, 2장 「논달마동래하사 대행개혁」에서 달마가 불교계의 개혁을 이룩한 비조하고 말할 때 하나의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구원을 주장한 이들이 어찌 제한된 권리 속에서의 자유를 원했을 것인가.     

제4편 「논현전지당 개혁자」는 이러한 주장을 현실적 측면에서 논파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임제종 설립운동을 비판한 2장 「논단체지개혁과 한국불교」는 먼저 ➀사범 ➁서적 ➂체제 ➃장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5장 「논교육지당개혁」이 주목한다. 권상로는 이런 점에서 역시 체제 도전적인 개혁승이 아니라 현실타협적인 개량주의 노선을 견지했던 학승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권상로의 개혁사상이나 한용운 가타 당시의 개혁론자들의 개혁운동이 전 불교계의 공감속에서 확산되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대부분 불교 구성원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무자각과 빈곤한 역사의식이고, 또 하나는 당시 식민정책 아래 불교현실에 대한 지도적 승려들의 인식차이로 말미암은 힘의 분산이란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불교개혁운동이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 구성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특히 교육, 포교 등 개혁운동이 가져다준 결실과 그 직접, 간접의 영향이 결코 적지않다고 지적할 수 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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