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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본 원효성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4/05 [08:20]
태생에서부터 수행, 깨달음과 파계·교화, 열반 이후까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본 원효성사

태생에서부터 수행, 깨달음과 파계·교화, 열반 이후까지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4/05 [08:20]

원효는 진평왕 39년-신문왕 6년(617-686년)까지 꼭 70세를 사셨다. 선사가 사셨던 7세기는 삼국의 전쟁, 통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였다.    

원효의 할아버지 잉파공은 그 당시 상당히 영향력 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당시 설씨들은 6-5두품에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선사도 6두품의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로 대개 묘사하고 있으나 아마 5두품에 가까운 가계의 인물이 아니었는가 한다.     

대개 설씨는 중간계층에 속했던 인물이다. 아버지 담내내말은 11관등에 속한 인물이다. 선사는 암량군 불지촌 북쪽 율곡 사리수 아래에서 탄생했다. 지금의 경산시에 속한다. 이곳은 일연선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산시는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을 포함한 삼성현 사업을 하고 있다.     

원효스님은 출가하면서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요석공주가 시댁이 있는 경산시에서 몸을 풀 수 없는 구조다. 설총이 출생했다는 주장보다 아버지 원효의 본적지 명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우리사회는 아버지의 출생지를 기준으로 본적지가 부여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촌명으로 ‘불 덩어리촌’이다. 불쑥 솟아오른 불 덩어리란 의미다. 발지-지혜를 발한촌, 불지촌-원효와 관련된 지명이라 해도 될 것이다. 사리수-부처님의 설화와 인연된다. 부처님께서는 무후수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깨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다. 붓다의 열반나무가 신라에 와서는 원효가 태어나는 나무가 된다. 이것은 당시 민중들이 바라본 시각들이다.    

원효선사의 집은 밤나무골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배가 불러서 외출하여 이 밤나무 아래에 지나다 산기를 느낀다. 당황한 선사의 아버지는 옷을 나뭇가지에 걸쳐 아늑하게 방처럼 꾸미고 낳았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했다. 사라란 말은 비단옷을 벌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선사를 ‘원효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일연이 표현했다.     

성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원효불기조」, 「태종춘추공조」,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의상전교조」, 「이혜동진조」, 「사복불언」, 「낭지승운보현수」, 「광덕엄장조」 등이 있다.    

우리와 함께하는 관음보살 진신    

조신의 꿈에 관한 이야기, 의상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중 원효가 낙산사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가다가 만나는 빨래하는 여인, 벼 베는 여인, 파랑새는 관음이 화현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인과 희롱하며 농담할 줄 알았지 그 내면에 있는 진신을 보지못한 원효는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성굴(지금의 홍련암)에 들어가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여기서 보듯 관음은 요란하게 우리들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온듯이 왔다 간 듯이 가는 것이다.     

이 기록은 조선조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여인과 희롱했던 우물이 보이고 있다. 이전 고려 무신정권 아래 임춘의 글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후 낙산사에는 원효가 만났던 관세음을 눈맑고,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지금도 만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불화에서 파랑새가 등장하는 모습은 이 설화에 연유된 것이다. 지금도 간혹 불화 속에 파랑새가 염주를 입에 문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상전교조」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이다. 특히 당 유학에 관한 내용이 원효의 전기가 아닌 이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 스님은 각별한 도반이다. 연령적으로는 원효가 6세 손 위이지만 두 차례 당 유학을 시도할 때 함께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요동까지 간다. 그곳에서 변방 수라꾼이 정탐꾼으로 오인하여 수십일 옥고를 치르고 빠져나와 신라로 되돌아온다. 두 번째는 대략 660-668년경 이야기다. 백제가 멸망하고 육로가 아닌 해로인 경주-천안-서해안(태안반도)-요동을 거쳐 올라간다. 현재 평택시 천년고찰 수도사가 위치한 곳에서 원효대사는 그 유명한 일체유심조라는 해골 물 깨달음을 남긴다. 오도성지다. 그리고 혼자 돌아서 경주로 향한다. 「이혜동진조」 혜공·혜숙의 이야기이며 혜공스님과 원효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 일체유심조라는 해골 물 깨달음을 남긴 오도성지 평택 수도사의 깨달음 체험관  

평택시 수도사 원효대사 오도성지    

「사복불언조」는 원효와 사복의 관련된 이야기다. 성사가 고선사에 머물 때 사복이 찾아와 자기 어머니가 죽었으니 장례식을 치르기를 청한다. 그 어머니는 원효성사, 사복의 전생에 경을 지어 나르던 암소였다. 열반게송으로 “나지 말라 그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말라 그 사는 것이 괴롭다”고 설하자 사복이 “말이 어찌 그리 번거로운가”하고 다시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는 간결한 말을 남기고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다.     

여기서도 원효의 학문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잡학에 가깝고 두루 공부하고 장편의 소설을 쓰듯 많은 저술을 남겼듯 긴 게송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서당화상비」가 있다. 원효성사 열반 약 100년 후 원효와 인연 있던 고선사란 절에 세워진 비다. 사지는 현재 경주 보문단지 호수에 잠겨있다. 서당은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이다. 이 비는 4쪽으로 깨졌다. 일제때 하단이 발견되어 국립박물관과 1970년 황수영박사가 발견하여 동국대 박물관으로 분리 보관되고 있다.     

「송고승전(당 고승전)」-중국 측 기록인 고승전에는 양,당,송 고승전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고승전이다. 이것은 중국 측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다. 송고승전에 기록이 전하는 이는 원효성사외 의상 등이 있다. 송 고승전의 기록에 남겨져 있는 원효의 기록 대부분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지어 황룡사에서 가르친 사실이 차지하고 있다. 아마 일연선사가 삼국유사 「원효불기조」를 수록할 때 「송고승전」 원효전기와 당시 유포되었던 행장 등을 읽고 있었고 또 그것들이 널리 읽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파한집, 대각국사 의천 문집 등에도 보이고 있다. 성사와 관련된 일화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다. 성사는 어느날 전혀 엉뚱하게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 바칠 기둥을 다듬을까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다만 태종 무열왕이 이것을 듣고 “이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하나 얻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다면 이익이 막대할 것이다.”고 생각했다.     

당시 성사는 자루빠진 여자(도끼), 즉 현재 부부생활 하지 않는 여자를 원한다는 비유적 표현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아도 성사는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행동을 당시 왕실이 꾸민 원효의 파계를 정당화 시켜주는 언어적 장난이라고 한다. 이것이 언어적 장난이던 혹은 그렇지 않던 우리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 노래가 불려질 당시 요석궁에는 과부공주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 무열왕은 궁인들에게 명령을 하여 원효를 찾아 궁에 들게 했다. 궁인이 명을 받들어 장차 원효를 만나려 할 때 때마침 <문천교>를 지나다 원효는 그 사실을 알고 물 가운데에서 거짓으로 빠져 옷을 적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궁에 들어가게된다. 지금도 경주 반월성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문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전 원효성사가 건넜을 것으로 추정되는 폭 13m가 되는 다리가 발견되었다. 이런 발견을 통해 보아도 일연성사가 저술한 『삼국유사』는 그 얼마나 처절한 노력의 결실이며 사실에 입각한 사료인지 알게 해준다.    

이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져 요석공주는 임신을 하고 설총을 낳게된다. 그 이전에 성사는 실계했다고 생각하고는 분황사에 돌아온 즉시 속복으로 갈아입는다. 세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승복이란 형식을 벗고 스스로 소성거사 혹은 복성거사를 자처한다. 못 생긴 거사라고 자신을 낮추며 요석궁에서 보낸 시간을 썩 바람직한 구도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로 어떤 언설로도 치유할 수 없는 파계의 형식 그 자체는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스님이 아닌 재가인 소성거사, 복성거사로 다시 태어난 원효는 속인 행세를 하며 조금은 더 자유스럽게 중생교화에 힘쓴다. 아무 거리낌없이 더욱 가깝게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놀던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괴이하여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쓰고는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귀에 따라서 이름지어 무애라 했다.     

생사 가운데 살고 죽고, 죽고 살고하는 것은 운명적 윤회의 모습이 아니다. 생사의 저편에는 열반, 니르바나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생사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이고 고통적인 것이다. 하루의 삶 속에 좋은 일, 나쁜 일, 화나는 일 등이 순환되면서 보내는 하루 이 자체도 작게 보면 생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고통의 삶이 아닌 열반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작았던 신라 가장 많은 외침을 받았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동안 피흘렸던 자국민이나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 정확하게 말하면 ‘나무’를 알게 했다. 모두를 부처님께 귀의시킨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는 “근기 약한 사람에게는 긴 말을 쓰지말라. 작은 말 염불 하나면 된다”고 가르친다. 지극히 믿는 신심이면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긴 전쟁으로 황폐화된 현실에 ‘고통을 잠시 잊고 보장된 정토를 꿈꾸게 하고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곳의 모습을 『무량수경』을 인용하며 설명하기보다 붓다의 나라, 붓다가 사는 곳에서 잊었던 가족들 그리고 이유도 없이 미워했고 죽여야했던 이들이 서로 만나 좀 더 이해하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는 만남이 있는 정토세계를 꿈꾸고 있던 것이다.     
▲ 용산구에 있는 원효대사 동상         

살고 죽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헤어짐이 다시 만남’을 이야기하는 만해선사의 노래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놓아 보낸 남은 이들은 즐겁게 그곳 정토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민은 불교를 통해 철학을 알게되고 사색하게 되었다.’는 최남선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는 원효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만난다. 그를 통해 불교와 철학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우리들은 성사의 주위에 얽히고설킨 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황사에 살며서 화엄경을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그만 그쳤다”라는 말을 눈여겨 볼 일이다. ‘그쳤다’는 부분에서 성사의 열반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화엄경 화향품 이후 대중교화로 돌아섰다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즉 이를 계기로 ‘왕실불교’,‘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서민불교’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 것이 회향품의 영향으로 보아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몸을 일백 소나무에 나뉘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위계의 초지에 이른것이라 한다.”는 표현을 접할 수 있다. 이 글 속에서 우리는 성사의 위의를 갖추게 되는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즉 원효를 성사라 부르게 되는 결정적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사 원효라는 평가는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가 백가지의 소나무에 몸을 나투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화엄경의 수행단계에는 52위가 있다. 그 가운데 10지의 초지가 환희지이며 이 환희지에 이르면 몸을 자유자재로 하고 이것을 성인위라 한다. 팔망미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지보살의 경지는 우리들 범부중생에게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 며느리, 딸, 아내 등 한 사람에게 이름 붙여지는 수없는 것들에 의해 우리들 모두는 초지보살이 되는 것이다. ‘천수천안 관재보살’이란 말도 천개의 눈, 천개의 손은 중생의 손이며 눈이다. 이를 통해 모두는 그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해 갈 때 모두 보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천촌만락을 떠돌며 하는 교화의 모습을 당시 스님들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기에 왕이 주최하는 <백고좌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후일 왕의 청에 의하여 『금강삼매경론소』를 지을 때 소의 두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놓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불가에서 깨우침을 의미한다. 소의 되새김처럼 한번 받아들인 것을 항상 되새김질 하면서 종국에는 깨우침에 이르는 것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것이다.     

『금강삼매경론』를 찬술할 때는 자기만이 오로지 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백개의 석가래를 구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오늘 하나의 대들보를 구할 때 그 하나의 대들보가 되는구나’ 이런 원효의 의식은 교만이나 자만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확대라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있는 중생은 이런 삶이 아닐까, 붓다의 만중생에 불성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동학(천도교)에서는 하늘 신앙으로 발전시킨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관에 의해 도망을 다니다 어느 교동의 집에 들려 대접을 받으며 힘겨운 노동, 베를 짜는 그집 며느리를 가르키며 지금 <하눌님>이 베를 짜고 있다는 하는 것이다. 이런 자아의 인식에 앞서 타자에 대한 인권선언적 뜻이 담긴 이러한 표현은 원효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생애이며 삶이다.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성사의 죽음 또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사가 입적하니 그의 아들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여 예를 갖추니 소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보았다는 이야기를 남긴다. 지극히 인간적인 원효의 모습이다. 자식에 대한 부성을 느끼게한다. 그런 성사의 거처 역시 설총의 집터 곁이었다고 전한다. 설총이 중앙관직에 있었으니 경주 어디쯤 일 것이다.     

이 열반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경기도 안양 소재 삼막사와 강원도 점봉산 영혈사(자유기고가 류인학씨의 주장) 등이다. 특히 유씨는 문화일보(1992.1.8.일자) 「배달산하」 영혈사 편에서 “원효대사, 백성과 고락을 함께 나누다가 여기서 열반에 들었다. 그의 아들 설총도 영혈사 곁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분황사에 모셨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단 성사의 열반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성사의 관련자료 어느 곳에도 서울 근교에 머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원효사(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북한산 소재)는 ‘신라 때 원효가 좌선하면서 창건하였다.’는 원효대가 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이 절은 조선 숙종 때 승병장 성능이란 이가 성사를 흠모하며 창건하고 현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등록사찰이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성사와 인연 맺고 싶고 닮아 가려는 이 땅의 수행자들은 어느 구석 성사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권 P766)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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