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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복숭아 피기 전까지 나는 아직 봄을 기다렸나?

신민형 | 기사입력 2018/04/24 [07:21]
하늘소풍길 산책

꽃복숭아 피기 전까지 나는 아직 봄을 기다렸나?

하늘소풍길 산책

신민형 | 입력 : 2018/04/24 [07:21]

“순간순간, 맞부닥치는 계절과 세월에서 영생한다”
 

지난해 법화산 가는길 마북공원에서 매화꽃인줄 알고 만났던 도화꽃. 가을되어야 꽃팻말을 보고서야 도화꽃임을 알았다. 그 화사함이 인상적이어서 남쪽에서 매화꽃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올 나의 봄맞이꽃은 도화꽃으로 정해졌다.     

개나리, 목련, 벚꽃이 만개했다가 져버리고도 꽃복숭아는 아직 잎망울만 피웠고 아직은 봄이 왔다고 인정하지 못했다. 나와 아내의 건강검진, 건강관련 수치와 나빠진 몸 챙기기, 중국서 몸조리 위해 온 딸아이와 손녀딸 보살피기 등으로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여유 또한 없었지만 도화꽃 잎망울, 꽃망울 피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건강챙기기가 대충 마무리되고 마침 딸아이가 출국한 다음에 도화꽃이 화사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만개하니 비로소 나의 봄은 절정을 이루었다.     

봄 감수성이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나이들어 감에 따라 더욱 민감해진 듯하다. 황량한 겨울 땅에서 파란 풀의 기미만 보여도, 봄날의 햇살만으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독 정을 느끼게 되는 꽃도 생겼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로 뭉뚱그려진 봄꽃이 아니라 내가 유독 좋아하는 꽃이 나타난 것이다.    

서울토박이인 나도 제법 나름의 꽃 감수성이 생겨났고 해가 거듭할수록 다양한 취향이 드러났다. 한 때는 화려한 목련과 벚꽃이 봄맞이 즐거움이었다. 순식간에 폈다 지는 꽃들이 오히려 봄다웠다. 잠시 동안은 라일락 꽃의 향기가 내봄의 절정을 만들었다.     

꽤 오랫동안 아카시아가 나의 봄맞이 꽃이 되기도 했다. 산을 하얗게 뒤덮으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아카시아는 나의 산책길을 설레게 했다. 아카시아 꽃잎이 흩뿌려지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면 계절의 여왕 5월 뿐 아니라 한해가 다 가버리는 섭섭함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어느 때부턴가 아카시아 꽃향기가 예전같지 않게 되었고 나의 취향도 식어갔다. 아카시아 향기가 약해진 건지 내 후각이 무뎌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꽃복숭아와 함께 피워나는 라일락 향기도 예전 같지 않다.     

이러한 즈음 만나게 된 꽃복숭아는 여간 반갑지 않다. 잎망울 필 때부터 사진에 담으며 기다렸으니 더욱 반갑고 소중해진다.     

그러나 꽃복숭아 또한 목련, 벚꽃, 라일락, 아카시아에 대했던 열정처럼 언젠가 시들해질거다. 가는 봄과 세월이 아쉬워 맘껏 빠져들고 싶은 대상을 만들어왔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점점 소중해지는 가는 세월과 계절에서 유독 편애할 대상을 갖는 것이 부질없다. 꽃복숭아에 매료되듯 다시 목련, 벚꽃, 라일락, 아카시아에서 의미를 찾아야겠다. 내가 그들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들은 내게 의미가 되어 돌아온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계절과 세월인가. 모두 다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세월과 계절은 영원하고 더욱 풍요로워 진다. 순간순간 사랑하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면 영원한 것 아닌가.     

꽃잎이 흩뿌려지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었다고 떠나는 계절과 세월을 아쉬워하고 섭섭해 하지 말자. 꽃복숭아 졌다고 내 봄이 다 갔다며 한숨 쉬지 말자.     

봄꽃 지면 여름꽃 있지 않은가. 정교하게 예쁜 장미가 반기지 않는가. 나팔꽃 해바라기꽃 채송화 등 봄보다 많은 꽃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이름을 불러줄 때 그들은 나에게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가을 코스모스를 비롯 온갖 야생화와 들국화는 또 얼마나 정감이 있는가. 겨울오면 눈꽃도 있지 않은가. 많이 아는 만큼 좋아하게 된다. 또 그만큼 사랑하게 되고 모든 계절과 세월이 소중해지니 그 순간순간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거 아닌가.     

먼 산 바라보며 숲길을 산책할 때 간혹 자연 속 잠같이 편안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때론 자연을 심호흡하며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해 한다. 삶을 계속 누리고 싶다.     

심신이 피로할 때는 전자, 생활의 의욕이 넘쳐날 때는 후자가 떠올려진다. 전자와 후자의 간극은 하늘과 땅차이이다. 그런가 하면 둘 사이의 간극은 지극히 짧은 순간, 찰나의 마음 변화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전자가 영생을 누리는 길이고 후자는 순간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툭 떨어져 나와 나를 관조해보면 둘 다 매한가지이기도 하다. 숲속 산책 먼산보기를 벗어나 우주 유영을 하며 대우주와 자연을 바라보는 상황이 되면 전자나 하늘 땅 구별이 없어지듯 세속적 삶과 죽음의 개념을 벗어나 삶과 죽음을 바라본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지듯이.     

봄비가 왔다. 꽃복숭아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산책을 나서 떨어져 시들어버린 꽃잎에 섭섭하고 허무해하지 않고 소중하게 마음 속에 담아봐야겠다. 가을 낙엽의 정취처럼 사랑해야겠다. 그러면 순간순간이, 맞부닥치는 계절과 세월이 모두 아름답고 소중해질 것이다. 그게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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