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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미륵신앙의 역사와 특징
‘새세상이 와야한다’, ‘새부처가 와야 한다’는 미륵신앙의 민중적 요청
기사입력: 2019/03/29 [07:2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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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세상이 와야한다’, ‘새부처가 와야 한다’는 미륵신앙의 민중적 요청

 

불교경전상의 미륵사상

 

미륵이라는 명칭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인데 한자로 미륵이라고 음역하였고 그 뜻은 자씨, 자비로운 분이라는 뜻이다.

 

현재 석가모니불의 후보불인 보처보살로서 욕계 제4천인 도솔타천에 있으며, 훗날 우리 인간계에 출현하여 성불하면 미륵불, 미륵존불 또는 미륵여래, 응공 등의 십호를 구족하여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보처보살이라 함은 곧 부처님의 후보라는 뜻이니, 대승불교 사상에서 보면 무량겁 전에 발심수행하여 보살의 십지공덕을 원만히 성취한, 최후로 성불할 지위인 등각보살을 가리켜 보처보살이라고 한다.

 

미륵신앙이 발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도에서 부터이다. 즉 석가의 몰후 3백년 정도는 일반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석가에 집중되어 있어 다른 부처를 신앙한다던가 할 그런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축법호가 최초의 미륵경전인 미륵성불경을 한역한 때가 기원후 300년대에 처음인 고로 미륵신앙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서 기원후 2세기경 사이에 대승불교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 보여진다.

 

미륵불 신앙은 처음 인도에서 성립하여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에 전개되었다가 다시 불법의 동점과 함께 이 땅에 건너 들어와 삼국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해오고 있으며 특히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독자적으로 중국과는 다른 양상을 이루며 발전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미륵은 보통 불가의 조석의 예불의범에서는 자씨미륵존불이라고 경칭된다. 이 존칭에는 반드시 당래하생이라는 관형사가 선행하고 있다. 자씨란 자심을 뜻하고 있다. 미륵에 대한 기록은 초기경전 곳곳에 보이고 있다. “숫타니빠타” “현우경” “대본경등에 밝혀져 있다.

 

미륵신앙은 불멸후 사백년경부터 유행되었다. 그 신앙은 대체로 도솔왕생신앙과 미래신앙인데 여기에서 다시 점검하면 자비, 복덕, 신앙, 평화사상, 지상천국, 십선도사상의 육종으로 분류된다.

 

미륵보살은 석가멸후 567만년세에 도솔천의 수명이 다할 때, 하늘에서 우리들이 사는 염부제인 지상에 내려와 탁생하여 이윽고 부처가 되어 용화수하에서 세번에 걸쳐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설법을 행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륵을 믿고 수행하는 선근을 쌓아서 용화삼회의 설법에 참가하여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미륵신앙이다.

 

미륵신앙 혹은 미륵사상이라는 것은 그 핵심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는 구조의 보편성속에서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륵은 미래불이며 여기 미래라 함은 아직 오지않은이라는 시간성(temporality)의 인식이 개재됨으로써만 가능한 개념이다. 미래에 중생들의 삶속으로 다가올 것을 말하였다.

 

이런 미륵신앙은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으로 나누어진다. 하생경에는 미륵이 하생하는 시기를 말법시대와 연결하여 설정하고 있는 점에서 미륵신앙은 말법사상의 위기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교법이 이 땅에 전래되면서 그 핵심이라 할 자비의 가르침이 함께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이런 부처님의 慈悲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는 미륵교설도 불교전래와 동시에 들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미륵신앙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미륵신앙은 그 수용에 있어서 비록 선후의 차이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에 미륵신앙은 현존하는 자료의 빈곤으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공전될 무렵인 372년경 미륵신앙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왕 부견은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문을 보냈는데 이 선물 가운데 미륵상도 들어있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경전 속에 미륵관계 경전도 들어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근자에 고구려의 미륵신앙을 알게 하는 두 가지의 금동불상광배명문이 발견됨으로 학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나는 신묘명 금동삼존불상으로 알려져 있는 무량수상이며, 하나는 영강칠년명 금동 미륵존상의 광배이다.

 

이 신묘명금동삼존상의 광배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은 아왕등 5인이 망사부모의 축복을 위하여 무량수불을 만들었음을 밝히면서도 미륵과의 직우를 기원하고 있어서 고구려의 미륵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혼동된 신앙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륵신앙이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신라나 백제와 상관관계로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서남쪽에 바다를 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진이나 남조에서 바다를 건너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가 백제의 미륵신앙 및 그 사상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하루는 왕(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미륵존상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불각)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미륵사의 창건설화를 통해 용화산 아래 못 속에서 미륵불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다.

 

백제에 있어 미륵신앙 미래에 다가 올 부처님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 속에 다가와 우리가 사는 삶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미륵신앙의 특징은 미륵을 석가불의 미탁중생을 제도하고 미완을 보완하는 당래의 석존이라는 데서, 젊음과 새로움과 희망과 그리고 이상 실현의 상징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한 신라대의 미륵상의 상호가 모두 앳되고 젊은 형모인 것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신라 미륵신앙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신라화랑과 미륵과의 관계이다.

 

신라의 화랑은 고신라에 있어 원시공동체적인 유산이라 보여지는데, 이것은 종교적 수련과 무사적 훈련을 같이 하는 청소년의 집단이었다. 처음에는 미녀 2인이 그 집회의 사령자가 되었으나 진흥왕 37(576)에 그 미녀들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어 내분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상대방을 죽이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므로 여성 사령자를 없애고 미모의 남자를 사령자인 화랑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뒤로 화랑제도는 크게 발전하여 신라의 현신, 용장 등을 무수히 배출하였다고 한다. 진흥왕대의 이같은 화랑제도의 정비는 단순히 사령자를 남자로 바꾼것에 의미가 큰 것도 있지만 그 단결의 기초를 미륵신앙에 두었다는 점이다.

▲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은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화랑은 곧 화엄의 랑이다. 화장세계에 출연한 깨끗한 어린 영혼을 의미한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당시 사람들이 용화향도라 불렀다는 것이라든지 화랑 죽지랑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진지왕 때에 승려 진자가 항상 당주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대성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는 미륵선화의 이야기 등은 모두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실례들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동신자 집단으로 보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을 미륵선화라 하였고 또 화랑의 낭도를 용화향도라고 한바, 용화는 곧 미륵님의 세계란 뜻이며, 향도는 용화교주인 미륵을 향하여 따르는 교도라는 뜻이니 화랑이 미륵선화요 또, 그 도중을 용화향도라면 화랑풍류가 곧 미륵풍류임을 알 수 있다.

 

신라통일이후에는 그 성격이 대단히 세속화 되면서 또 문명형성초기에 지닐 수 있는 그런 창조적 역할(creative role)이 희석되면서 쇠퇴해버렸지만 원래 그 화랑조직은 세속적 국가조직의 행정체계 기능을 담당하는 것과 다른 순수한 청년 신앙단체였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건국(892)된 후백제는 신라하대 혼란을 틈타 옛 백제의 부흥을 꾀하며 생기게 된다.

 

통일신라하대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걸으면서도 귀족들의 끊임없는 대립과 항쟁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정권탈취를 위하여 개인적 재산을 이용하여서 사병을 양성하였다. 사병은 자기들이 소유하던 노예나 류민을 모집하여 무장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왕위계승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 실력과 무력의 우위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왕위에의 즉위와 희생의 쟁탈전은 하대의 신라가 얼마나 혼란한 사회 였는가를 입증해주는 사실들이다.

 

신라하대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등장한 후백제는 견훤에 의해 건국(892) 되었다. 견훤은 서남해 쪽을 방수하는데 공을 세워 비장이 되었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타고 그도 군사를 일으켜 인솔하고, 지금의 광주지방을 점령하고 다시 전주지방으로 진군하여 그 활동무대를 삼았다. 전라도 지방에서 그의 군사활동에 대항할 수 있는 강적은 거의 없었다.

 

전라남북도 전체와 금강유역까지 장악암으로서 자칭 신라서면도통지휘병장 운운하더니 나중에는 효공왕4(900)에 이르러 후백제국왕이라 일컫게 된다.

 

견훤에게는 10여명의 자식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4자인 금강에 대한 편애로 이찬 능환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어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2(935) 이른 봄 3월 영순과 함께 신검에게 권유하여 견훤을 금산(금산불우, 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 무익산에 있는 절)의 절에 가두었다. 견훤의 재위기간은 43년에 이른다. 이 기간 특별한 신앙체제는 발견 할 수 없다. 다만 금산사에서 유배 되었다는 사실로 상층부의 신앙형태를 추정 할 수 있다.

 

후고구려(태봉국)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를 내걸고 나타난 것이 궁예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왕자이다. 왕자의 지위에서 물러난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다음 태봉이라 국호까지 만들고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불렀다. 패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는 어느 칭호보다도 미륵불이 민심을 끌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나타낸 것이 머리에 금책을 쓰고 몸에 방포를 감고, 그 아들은 청광보살, 작은 아들은 신광보살이라 부르며, 외출시에는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의 머리와 꼬리를 장식한 다음, 동남과 동녀에게 번개와 향화를 들고 앞세운 궁예적 미륵불의 권위가 일부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을런지 모른다. 더구나 그 행렬 뒤에는 2백명의 승려가 범패를 부르며 따르게 하였다니 더욱 가관이었을 줄 안다. 그는 또 자신이 미륵불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위경 20여권을 저술했다.

 

불교 특히 미륵신앙을 통해 전륜성왕과 같은 이상적인 불국토 건설을 염원한 일면도 보인다. 궁예는 정치적인 오욕을 안고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간 불행한 군왕인지도 모른다.

 

고려·조선의 미륵신앙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번영을 누리면서 이땅에 이상적인 불국토 건설을 염원하였다.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는 하대 골품제의 모순으로 빚어진 각종 병폐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이와함께 전개되는 하대의 왕위 쟁탈전은 결국 내부적인 결속을 와해시키며 이 같은 사회적인 불안요인에 편승한 지방호족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후고구려와 함께 신 삼국시대는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 의해 제2차 삼국 통일을 이루웠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은 전시대 걸쳐 이땅 민중들에게 뿌리깊게 남아있던 불교신앙을 왕권의 강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호국불교를 표방하고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태조이후에 미륵신앙을 알게하는 기록을 찾아보기 쉽지않다. 다만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창건당시 조성된 미륵삼존석불에 대한 미륵신앙적 요소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 개태사는 화엄도장인 동시에 미륵도장의 구실을 함께 하였음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광종대에는 논산에 관촉사를 창건하는바 반야산 기슭에서 대석이 용출하자 국자에서 백관회의를 열고 승 혜명으로 하여금 대석에 미륵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라의 옛땅에 미륵신앙을 통해 통일을 염원했던 지역적 정서를 끌어안는 왕권강화와 국민의 대통합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사회에 있어 미륵신앙은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민중신앙화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조에 이르면 더욱 민중적 속성을 지니게 되어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이상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당래불로서의 미륵신앙이 민중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조의 개창은 여말 권신과 사원세력의 기반을 박탈하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권신과 사원 세력은 국가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되었다.

이와같은 사원 세력의외적 팽창과 권문들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확충으로 고려사회가 혼란에 빠졌다고 생각한 조선의 개국 주체 세력들은 개국 직후부터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한다.

 

조선 초기의 불교정책은 불교의 사상적 배척이기보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전과 인정을 확보하고 측면에서 제제조치로 볼 수 있다.

 

억불정책하의 불교대중화 시책이 불교를 민중으로 연결시키게 됨에 따라 국민심층에 깊이 뿌리 내린 미륵신앙의 맥락은 강하게 흐르게 되었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병화와 제도적 모순 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과정에서 이러한 말법을 구제할 당래불로서의 미륵하생출현을 고대하는 미륵 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나 정조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 정계는 대체로 안정되어갔다. 그후 정조가 돌아가고 순조가 겨우 11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면서 외척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의 집중은 정치의 문란을 가져왔다.

 

이로 인한 피해는 재정수입원인 전정군정환곡등 소위 삼정의 문란을 야기했다. 이것은 곧 바로 사회 저항운동으로 변질되었다. 순조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철종13년의 진주민란은 병사 백락엽의 악행에 잔반출신 농민 유계춘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쉬 진압되었으나 이후 익산의 농민반란, 삼남 전역에서 농민들의 반란, 제주도 어민들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들 민란들은 대개 악질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문벌 정치 및 세도정치에 의하여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 미륵하생신앙에 기반을 둔 증산교와 원불교가 새롭게 일어났다. 증산은 옥황상제요, 미륵불이라는 절대적인 권능과 힘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미륵불의 용화세계에 대한 희망과 꿈을 제시하여 준 것이다.    

 

이러한 조선조 말의 혼란의 극복과정으로 미륵하생신앙에 기반을 둔 증산교와 원불교가 새롭게 일어났다. 증산교는 다분히 미륵하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륵신앙은 불교전래 초기부터 크게 유행되어 민간신앙과 결합되면서 보편화되었고 나라가 어지러울때 마다 미륵불의 출현과 용화세계의 건설에 대한 민중의 염원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용화동이야말로 용화회상이라고 강조하면서 그곳에 삶들이 모여들어 세계의 중심지가 되며, 금산사에는 세계의 통일정부가 들어설 것을 암시했고, 증산의 추종자 또한 그렇게 믿었다. 어쨌던 증산은 옥황상제요, 미륵불이라는 절대적인 권능과 힘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미륵불의 용화세계에 대한 희망과 꿈을 제시하여 준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사상계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기 전에는 비록 민중화된 미륵신앙이라고는 하나 아직 사회개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 세상이 와야한다, 새 부처가 와야 한다는 것이 곧 미륵신앙의 민중적 요청이며 미륵의 세계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불교세계이며 그런 세상이 올테면 당장 와야 한다는 민중의 피맺힌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 미륵에 대한 희망인 것이다. 이런 민중들의 대망신앙이 증산에게 이어질 때 이것은 개벽사상으로 화해진다. 한편 민중들에 있어 이땅에 미륵세계가 도래하면 그 시대는 억압받는 민중이 그 세계의 주체가 되어서, 그렇게도 염원하던 기아착취질병굴종탄압으로부터의 해방된다는 것이야말로 오랜 농민사회가 가지는 미륵신앙의 목적이었다.(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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