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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8. 함께 머무르기

주형식 | 기사입력 2019/06/12 [08:55]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이동하고, 함께 멈출 필요가 있다

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8. 함께 머무르기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이동하고, 함께 멈출 필요가 있다

주형식 | 입력 : 2019/06/12 [08:55]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이동하고, 함께 멈출 필요가 있다 

 

누군가 운전이나 조깅, 또는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맞춰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천천히 가기도 하고, 너무 고른 속도로 가던지, 아니면 너무 쿵쾅거리며 간다. 너무 자주 멈추기도 하고, 안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여러분을 돕거나 안내하거나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여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그처럼, 첫번째 유월절을 지킨 후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13:21)셨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을 때 여호와의 구름기둥은 그들의 이전 노예 포로들과 그들을 갈라놓았다 (14:19,20).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들은 적기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연막탄을 발사하곤 했다. 하지만 여호와의 연막탄은 훨씬 더 성능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빛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적들에게는 어두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 여호와의 구름기둥은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빛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적들에게는 어두움을 안겨주었다. 사진은 영화 ‘이집트 왕자’ 중에서.

 

후에 여호와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분의 영광으로부터 가려주었던 구름 가운데서 시내산 위에 머물렀다(19:16; 24:15,16,18). 그러나 그들이 성막을 건축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으며, 그분의 구름은 이동하여 그 위에 머물렀다. 그 구름은 말뚝들을 뽑고 앞으로 전진할 때가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40:34-38).

 

두번째 유월절에 대하여 기록한 다음, 민수기는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9:15-23). 이 구절은 저 구름이 성막 위에 얼마나 길게 혹은 얼마나 짧게 머물던지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의 움직임을 좇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23).

 

하나님께서 페이스를 조절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그분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몇 배나 더 빨리 가나안으로 가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위협적인 적들을 마주칠 준비를 갖추기 전, 그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그분과의 협동은 신병훈련소"를 수료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백성들이 항상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셨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과거에 계셨던 곳에 있거나, 미래에 계실 가망성이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여러 세기를 통하여 많은 종교 단체들은 신이 어느 때에 계셨던 곳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곳을 대표하는 장소들이나 신조들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해왔다. 비극적이게도 그들은 그분께서 새 진리로 그들을 인도하시도록 개방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미이라화된 그들의 정통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격이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창조한 상자 속에 갇힌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그 상자를 아름답게 장식하고는 그것에 입 맞추고 주기적으로 그 주위를 돌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일종의 관()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짜증을 느낀다. 왜냐하면 다양한 무리들을 한데 모으려고 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느리시다. 그들은 엘리트로서 전면에 나서서 그 길을 인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금 계시는 곳에 그분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이동하고, 그분과 함께 멈출 필요가 있다. 그렇다. 그분은 훨씬 더 빨리 가실 수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계신다.

 

협력을 위한 신호들

 

일단의 사람들을 조정하려면 신호들을 갖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하기 전, 그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신속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신호체계가 필요했다. 그들이 지시사항을 받기 위해 모여야 하거나, 다른 단계의 여행을 시작하거나, 혹은 적들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해야 할 경우 구두로 기별을 전달하는 것은 너무 느릴 것이었다. 그들에게 확성기나 휴대폰, 또는 무선호출기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적절한 조정이 없다면 혼란이 뒤따를 것이다.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등등은 우왕좌왕 하고, 서로 충돌하고 좌절하여 소리를 지를 것이다. 또한 동물들도 이동시켜야 한다면 소떼, 앙떼들이 충돌하고 서로 섞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동물 소유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이다.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뒤섞인 불협화음은 거대한 혼란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들을 성취하는데 기여하는 질서를 원하신다. 그분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고전 14:33). 그렇기에 그분은 모세에게 두개의 은 나팔을 만들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제사장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필요가 있는지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나팔들을 불게 될 것이었다 (하나나 혹은 두 개의 나팔로, 다른 종류의 부는 방식을 사용하여)(10:1-10). 고고학자들이 좋은 상태로 보존된 고대 이집트의 은 나팔을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악기가 어떤 모양이었을지 알 수 있다. 이 나팔들의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혹은 대표되는 지도자들만)를 호출하기 위하여, 지파들이 바른 순서에 따라 여행을 시작하도록 행진의 시작을 통제하고, 전쟁을 선포하거나 기쁨의 때를 경축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얻는 일이 용이할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는 사실은 그 신호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강화시켰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봉사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지시를 받을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 신호를 사용하여 공지사항을 전달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들이 그들을 괴롭힌다면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의 경보 소리는 그들의 신이자 왕이신 분에게 드리는 일종의 기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10:9)고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이 아니었던 후기의 지도자들 또한 나팔(양각 나팔)을 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신 전쟁에 나가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았다(3:27; 6:34 참조).

 

제사장들의 은 나팔은 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의 때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10:10). 이와 같은 기억의 필요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으셨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이런 나팔소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양하기 위하여 특별한 때들에 드리는 기도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 달이 시작되는 시간을 포함하여, 예정된 때에 정규적으로 주어지는 신호들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와 비상시 경보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제칠월의 시작(“나팔절”, 23:24)때 부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억의 나팔소리는 전쟁을 위하여 소집을 명하는 것과 동일하였다(10:9). 이것은 그들의 지도자는 전능하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도울 태세를 취하고 계신 왕(23:21에서 동일한 소리로 환호를 받으시는)이시라는 것을 연례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나팔소리는 다양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소집 명령의 이유에 관한 호기심,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새로운 지역을 보기 위하여 출발할 때의 흥분, 전쟁의 전망을 마주대할 때의 걱정과 아드레날린의 분출, 그리고 그분의 선택된 백성의 일원으로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경축하는 일에 대한 흥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공통 요소는 그들의 모든 환경 가운데 그들을 이끄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맞춰진 초점이이다.

 

후일,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에서, 선지자들은 비상시국에 회개를 (양각)나팔로 선포하도록 그들에게 촉구했다(58:1; 2:1, 15). 마찬가지로 우리도 중대한 문제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인정하고 맞서야 한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위기는 위기이다. 냉담과 부정(否定)의 상태 속에 숨어서, 우리의 지위와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정상인척 하는 대신에 우리는 관여된 모든 당사자들을 소집하고, 함께 정직하게 하나님을 찾고, 우리의 실수를 온전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요일 1:9)과 도우심(예를 들어 약 1:5의 지혜의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나팔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번째 나팔을 부는 한 천사는 하나님의 왕권과 그 결과로 발생하는 그분의 심판을 공표하며, 그분의 하늘 성전에 있는 언약궤를 드러내 보인다(11:15-19).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보는 때(16)인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대속죄일 심판(26-32)으로 이어지는, 제칠월 시작 때의 나팔 기념(23:23-25)은 마지막 때를 예표한다. 또 다른 나팔은 마지막 나팔로서, 하나님의 진실된 백성들을 광야의 진중에 있는 성막으로가 아니라, 낙원의 영원한 평화 가운데 가리워지지 않는 그분의 임재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무덤으로부터 불러낼 것이다(고전 15:52; 살전 4:16; 24:31 참조).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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