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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 스님의 사상형성과 시대적 배경 上.생애와 불교계 위상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07/26 [19:54]
태고의 사상은 한국불교학계와 승려들의 수행과정에 지대한 영향 미친 선각자

태고보우 스님의 사상형성과 시대적 배경 上.생애와 불교계 위상

태고의 사상은 한국불교학계와 승려들의 수행과정에 지대한 영향 미친 선각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9/07/26 [19:54]

<연재순서>

. 태고의 생애와 불교계 위상

.태고 활동기 사회적 배경

▲ 태고 보우(1301-1382) 선사 진영. 속리산 법주사 진영각  

 

태고종 종조, 임제종의 선맥을 계승한 대선사

 

태고보우국사(1301-1382)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종조로서 임제종의 선맥을 계승한 대선사로 수선사(현 송광사) 2세인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의 뒤를 이어 고려 말에 간화선을 뿌리내리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사에 있어서도 당대 문인들에게 시풍을 인정받은 시승(詩僧)이었다. 중국 원나라 선불교의 석옥청공(1272-1352)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아 임제의 제19대 법손이 된 태고보우는 불교의 시대적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안으로는 각 종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적 구심점을 찾아야 하고, 밖으로는 통합을 위한 강력한 제도와 기구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다.

 

태고보우국사의 성은 홍 씨로서 본관이 홍주 로 이름은 보허이며, 법명은 보우, 법호는 태고, 시호는 원증, 탑호는 보월승공이다. 아버지 홍정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1301(忠烈王 27) 921일 태어났다. 이후 1382(우왕 8) 1224일에 용문산 소설산암에서 화연을 마친 고려의 고승이며, 한국불교의 중흥조이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양근군 대원리(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살아 왔는데 부계의 경우 고려 초기부터 지방토호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의 모계인 정씨 집안 역시 양근군의 토호였다. 이와 같은 출생배경은 고려 29대 충목왕 4(1348) 원에서 귀국한 직후 양근의 미원강에 살면서 농장을 직접 경영하는 등 지역 내 권문세족과 같은 처지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경제적 기반은 수행과정은 물론 그의 입적후 세워지는 탑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가 국사가 되자 그의 아버지 연은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문하시중 판리병부사 홍양공이고, 어머니 정씨는 삼한국대부인으로 각각 증직되었다.

 

태고보우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몽중에 태양이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골이 준수하여 상을 보는 이들은 후일 법왕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고려 말에 원나라의 침략을 다시 받자 사회적 불안은 고조되었고 기복 불교의 폐단이 나타났다. 태고보우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 임제종의 선풍으로 생활불교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중흥조로 추앙되던 고려 말기의 태고보우는 한국불교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태고의 생애 주기

 

1세 부 홍양 공 모 정씨 사이에 지금의 남양주(양근군 대원리)에서 탄생

     아버지의 휘는 연()이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 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 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4세 안향의 건으로 섬학전을 둔다.

 

13세 회암사의 광지선사에게 삭발

 

14세 연경에 만권당 지음

 

19세 만법귀일의 화두를 입참하다.

       가지산맥의 총림선에서 제2좌로 오르다.

 

26세 승과 화엄선에 급제

 

30세 봄 용문산 상원암에 머물렀다.

 

33세 가을 성서 감로사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성질이 나약하고 게을러 불법을 깨우치는 큰일을 성취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행을 하다가 죽느니만 못하다라고 크게 분심을 내어 7일 동안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에 몰두하였다. 이때 태고는 꿈속에서 청의동자 둘을 만났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잔을 들어 맑은 물을 끊인 것이니 드시오라고 권하자 이 물을 마시고 깨쳤다고 한다.

 

이때를 태고록에 전하는 오도송은

 

一亦不得處하나()마저도 얻을 수 없는 곳에

踏破家中石밟아 깨치니 집 안의 돌 이러라.

回看沒破跡돌이켜 보니 깨친 흔적 또한 없고

看者赤已寂본 사람마저 적적(寂寂)하니

了了圓陀陀요요(了了)한 원()은 뚜렷하고 뚜렷하며

玄玄光爍爍현현(玄玄)한 빛은 맑게 빛나는 도다.

佛祖與山河불조(佛祖)와 더불어 산하(山河)

無口悉呑郤입이 없이 모두 삼켜버렸도다.

 

이상의 내용은 태고가 당시 까지도만법귀일 귀일하처(萬法歸一 歸一何處)’의 화두에 몰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만법이 돌아가는 곳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절대 진리의 본성을 확인한 그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37세 가을, 불각사에서 원각경을 읽다.

       “일체가 모두 멸하는데 이르면 이것을 부동이라 이름하여, 所知의 경계를 벗어난다.”는 한 대목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오도시는 선승의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그 경지를 시로 나타낸 것으로 본 인권환은 태고의 오도송에 나타난 돌은 불성을 겹겹이 가두고 있는 마음의 장애물을 상징적 표현이며 그 돌을 밟아 깼다는 것은 그 장벽을 頓破하였다. 돌을 밟아 깬 순간 了了희 불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돌도 나도 없어졌다고 한다. 身心忽空의 순간이다. “분명히 드러난 둥그런 그것悟境圓融함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라고 있다. 태고의 오도은 단순히 깨달음의 개인적 희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선을 시적 감각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靜也千般現 고요하지만 천 가지로 나타나고

動也一物無 움직이지만 한 물건조차 없네.

無無是什麽 (), (), 이것이 무엇인가?

霜後菊花稠 서리 온 뒤에 국화가 무성하다.

 

위의 내용은 태고보우가 참구했던 화두가 무자화두(無字話頭)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같은 해 10월 채홍철의 전단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주관했다.

 

3817일 새벽 대오하였다.

 

이때 오도송으로

 

趙州古佛老 조주(趙州)고불(古佛) 늙은이가

坐斷千聖路 앉아서 1000인 성인들의 길을 끊었다.

吹毛覿面提 취모검(吹毛劍)을 얼굴에 들이댔으나

通身無軫窺 온몸에 빈틈이 없다.

狐兎絶潛蹤 여우와 토끼가 자취를 감추더니

飜身師子露 몸을 바꾸어 사자가 뛰쳐나온다.

打破牢關後 생사의 관문을 타파한 후에

淸風吹太古 푸른 바람 태고(太古)에 불고 있다.

 

같은 해 3월 양근에 돌아가 부모를 모셨다. 이곳에서 1,700 공안을 두루 참구했다. 이때 태고보우는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의 공안에 막혔으나, 이윽고 뜻을 깨치고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였지만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구나 라고 하여, 드디어 그에게 스승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지위에 올랐음을 자인하였다.

 

39세 봄 소요산 백운암에 머물며 중국의 학승 무극이 와서 임제종의 정맥을 계승하기를 권유했다.

 

41세 채하중,김귀흠의 청으로 삼각산 중흥사를 중수하고 머물며 제자양성을 시작한다.

 

43세 전민추쇄도감을 설치했다.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귀향보냈다.

 

46세 봄 연경의 대관사에 살면서 같은 해 1124일 원의 태자생신에 황제의 명으로 초청되어 반야를 강했다. 태고가 원나라 태자의 생일에 초청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원 권신인 채하중 등의 주선과 당시 원의 태자가 고려 출신 기황후의 소생인 아이유시리다라 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원 황실이 고려에서 온 승려를 초청하여 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법회를 개설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테고가 이때까지는 원 황실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왕기(후일 공민왕)와 만남도 자연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477월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이르러 석옥청공으로부터 의발을 전수 받았다. 같은 해 81일 석옥청공과 헤어져 연경으로 떠났다. 같은 해 1015일 귀환한 영령선사의 주지로 있었다. 같은 해 1124일 태자생신에 황후, 태자 등이 향폐를 내리고 공민왕이 이때 세자로 처음 선사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49세 봄 고려에 돌아와 중흥사에 머물다. 같은 해 여름, 하결제가 끝나고 용문산 북 쪽에 있는 소설암을 짓고 살았다.

 

52세 봄 왕이 등극하고 궁중에 맞아들임 같은 해 가을 다시 소설암으로 돌아옴

 

562월 양차의 의 청으로 궁중에서 설법을 했다. 같은해 36일 봉은사에서 개당하매 왕이 태후와 함께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다 원나라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오색비단과 가사 3백 벌을 보내주었다. 같은 해 424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이날 오래 가뭄 뒤에 단비가 내려 왕이 이를 왕사우라고 했다. 왕이 태고를 왕사로 책봉한 후 위국지도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 태고는 4가지로 요약되는 자신의 대안을 제시한다.

 

개경이 왕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양으로 천도를 권했다.

구산문이 통합되어야 한다.

백장청규를 도입해야 한다.

5교의 법을 널리 선양해야 한다.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고쳤다. 쌍성을 공격하고 함주이북의 제성을 수복했다.

 

572월 소설암으로 되돌아갔다.

 

58세 칙명을 받고 성곽을 다스렸다.

 

59세 가을 미지산에 들어가 초당을 지었다.

 

6111월 홍건난이 일어나 왕이 안동으로 몽진했다 1358년 홍건족이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축성들에게 피난 준비를 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621월 도성으로 돌아와 상소하여 신돈을 논하여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실한 승려 가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하면 사특한 승려가 때를 얻게 되오니 원하옵건대 상감께서는 살피시어 그를 멀리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홍건적을 제압했다.

 

66세 겨울, 도솔산에 들어갔다가 전주 보광사로 옮겼다.

 

68세 여름 신돈의 모함으로 속리사에 금고 당했다. 가사를 입고 소설산에 돌아갔다.

 

713월 신돈은 주살되고 스님은 국사로 종해졌다.

 

78세 겨울 영원사로 옮겼다.

 

81세 겨울 양산사로 옮김 다시 국사로 봉하고 법호를 추가하였다.

 

82세 여름 소설암으로 돌아옴.

같은 해 1224일 유시에 열반에 들었다. 하루전날 1217일에 언어와 동작이 불편해지더니, 23일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에게 아뢰는 유언을 양근군수 이양생에 전하고 대신들에게 보내는 사세장 6통을 써주었다. 이튿날인 24일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유시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세수는 82세이고 법납은 69세이었다.

 

시를 원증이라고 했다. 화장 후에 舍利 100과를 얻어 양산사와 사나사, 청송사, 소설암등에 나누어 봉의 하였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2권과 태고유음6책이 있다.10월에 문인 유창이원증국사행장을 지었다. 1385110일에 왕이 이색에게 태고 국사의 탑비명을 지으라는 교지를 내렸다. 7월에 이색이태고어록의 서문을 썼다. 이 무렵에 문인 설서가태고어록을 엮었다. 1386년 우왕 12년 태고의 제자 달심이 설악면 소설암에 원증국사석종비를 세웠다.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의문이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동참한 신도들의 명단을 적었다. 911일에 문인 석굉이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이색이 짓고 권주가 쓴원증국사탑비를 세웠다. 138610월에 문인 달심이 미지산 사나사에 정도전이 지은원증국사석종비를 만들었다. 1387727일에 이숭인이태고어록의 서문을 썼다. 이즈음 정몽주가태고어록의 발문을 지었을 것이다.

 

중흥사 동쪽 태고암에 탑을 세워 탑호를 보월승공이라 하여 영골을 모셨으며, 사리는 양산사사나사청송사태고암에 분장하였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2곳이며 비문만 전하는 곳은 한 곳이다. 비석이 소재해 있는 곳으로 태고사, 사나사이다. 소설암에 세워졌던 비석은 현존하지 않다. 비문은 권근의 양촌집에 전하고 있다. 봉암사는 비석, 비문 모두 전하지 않는다. 사리탑의 비문은 이색, 정도전, 권근 등 유학자들이 찬술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수 찬영 조이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국사 대선사 선사를 위시하여 출가사문의 문도가 1천여 명이라 하였고, 최영 이성계를 비롯한 당시 관계의 명인들도 다수가 문도로 기재되어 있다. 북한산 태고사 비는 조선시대 유자들에 의해 이성계의 이름은 훼손된 채 보존되고 있다.

 

태고화상의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人生命若水泡空 : 삶이란 물거품과 같나니

八十餘年春夢中 : 팔십 평생이 일장춘몽이로다.

臨路如今放皮袋 : 이제 길을 떠나며 가죽 껍데기를 벗자니

一輪紅日下西峰 : 둥그런 붉은 해는 서산에 떨어지노라

 

[태고화상이 남긴 전법게]

 

心中有自心 : 마음 가운데 자성심이 있도다.

法中有至法 : 법 가운데 지극한 법이 있도다.

我今可付囑 : 내 이제 가히 부촉하노니

心法無心法 : 마음 법은 법이 아니니라.

 

태고보우의 출가는 13세에 이루어졌다. 양주 회암사의 광진선사를 은사로 열아홉 살부터 만법귀일의 화두를 참구하면서, 선 수행에 몰두하였다.26, 화엄선에도 합격하였다. 화엄학에도 정통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30세이던 1330년 봄에 모든 인연을 끊고 뜻한 바를 향해 정진하기 위해 양평 용문산 상원암에 들어가 관음전에 12대원을 발하고 지성 발로하여 지혜가 통리하였다. 3년 뒤에는 개경(현 개성)의 선 쪽에 있는 감로사에 있으면서 각고의 정진을 할 때 <성질이 나약하고 게을러서 큰일을 성취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행을 하다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결심하고 단좌한 지 7일이 되던 날 밤 꿈에 靑衣를 입은 두 동장가 하나는 를 들고 하나는 백량수를 권하기에 받아 마신 즉 감로의 맛이 진동함에 깨달음을 얻어 불조흥산하 무구실탄각이란 게송을 지었다.

 

한국불교에서 태고의 위상

 

1954년 이승만 정부의 불교정화유시 이전 한국불교계는 단일 종단에서 종조는 태고보우 국사로 하고 있었다. 이불화, 이종익을 중심으로 하는 보조지눌설과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권상로는 기존의 태고보우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학문적 논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구, 대처의 분규가 일어나면서 비구측은 보조지눌, 대처측은 태고보우를 주장하게 된다. 이런 양측의 사상논쟁에 비구측 종정 만암 대종사는 보조지눌을 주장하는 비구측을 환부역조한다면서 비구측을 탈종하여 대처측에 가담하게 된다. 19622월 양측은 불교재건비상총회에서 종조는 태고보우로 하는 합의안이 통고된다.

▲ 지난 7월23일 대한불교태고종 전승관 및 대웅보전서 열린 태고보우원증국사 영산문화대축전. 장정태 사진    

 

태고보우 국사를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평가하는 이유.

 

첫째 그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아래 59산의 잡다한 종파불교로 정착하면서 통일된 종지, 종단에 의한 한국불교의 얼굴을 갖추지 못했던 당시까지의 병통을 제거하고 비로소 구산원융 오교홍통(九山圓融 五敎弘通)’을 주장하면서 실제로 국가기관으로 원융부를 설치, 통합종단 출범을 위한 정지작업을 하였다.

 

둘째 불교 전래 16백년 역사 속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행적으로 임제종의 정통법맥을 계승하여 이를 한국불교의 뿌리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평가절하고 있다.

 

셋째, 태고가 원나라에 가서 석옥과 만나 함께 있었던 기간이 고작 보름 정도에 지나 지 않았으므로 이토록 짧은 시간에 심계를 주고받는다거나 하물며 법통을 전수받는다는 일이 무리라는 것이다.

 

넷째, 한국선종의 법통을 임제선에 두고 있으나 태고의 적송 승계이후에도 이 땅에 임제종이라는 종단이 세워진 일이 없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전래된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불교의 특유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태고가 한국 정통법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임제선, 임제종 계통의 종풍이 한국 사회에 영속성을 가지고 이어왔나 하는 것은 별개다. 청송의 임제선을 이었다고 보고 있는 성철은 그의 저서 백일법문을 통해 의발전수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의발의 전수는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전법의 한 예이다.

 

현재 한국의 승려들은 부용의 제자인 서산과 부휴의 법손들이다. 태고화상은 중국 화무산에 들어가서 석옥선사로 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은 중국에서 석옥으로 부터 법을 이어받고 귀국한 태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태고의 법을 현재 한국불교의 법맥의 흐름이라는 논리다.

 

태고사상을 고찰해 볼 때 일반적으로 석옥청공을 만나 임제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일반적으로 불교계에서는 주장하고 있으나 정태혁은 태고가 석옥청공을 만난 것은 기정 사실 이라고 인정하나 석옥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은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본다. 그런 이유를 태고는 이미 중국에 가기 전에 상당한 불교의 학문에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고 오히려 석옥은 태고를 만나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主張이다. 태고의 수행은 고려의 전통적 수행방법과 원의 임제선의 장점만 간추린 것이다.

 

태고의 사상은 한국불교학계와 승려들의 수행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각자이다. 태고는 원에 들어가 임제18대 손인 석옥의 결택을 맏고 임제정맥을 계승하였다. 태고의 임제정맥의 계승은 그 개인뿐만 아니라 고려 말 불교계의 임제선풍의 풍미를 가져오고, 후일에 조선에 넘어와서 선사휴정의 제자들에게 임제 해동 초조로 그 법맥을 세우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 것이다. 에서 귀국한 후에 그는 국사에 불교계에 제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법정은 그의 번역서 서산의 선가귀감에서 우리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삼십 삼세 되는 육조혜능 대사의 밑에서 곧게 전해 내려가기를 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홍화존장,남원도옹,풍혈연소,수산성념,분양선소,자명초원,양기방회,백운수단,오조법연,원오극근,경산종고 같은 이들이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에는 신라의 지리상 화상도 있었다.

 

그의 밑으로 19세기 되는 평산 처림의 법을 고려의 나옹왕사가 받았고, 똑같은 임제 19세 석옥청공의 법을 태고국사가 받아와 이조시대의 우리나라 불교는 온전히 임제종의 법맥으로 되었다. 석옥청공의 임제법을 이었다는 주장과 다르게 사자상승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 한기두 교수는 고려후기의 선사상에서 김영수 선생이 전등의 방법으로 득도사와 수계사와 이개 師僧 중 오직 득도사의 정사승이 되어 전등했다. 득도사에게 전등은 이미 결정했으나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는 것만은 널리 터져 있어…….이 같이 선승들은 한결같이 무학상사라 하면서 구도한 뜻이 무엇일까? 주체는 고국의 사문에 두고 널리 배워 자종을 확충하려는 뜻이 있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산문에서도 중국의 어느 선문이나 관계치 아니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여 왔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아무리 하무산에서 석옥의 진골을 옮겨오고 법사가 되었다하나 엄연히 조계종이요 가지산문 광지선사의 법사이었던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고국사에 의해 주도된 원융부설치는 모든 종단을 포괄하는 운동으로 한국불교의 중흥적 중시조의 위치를 겸하게 된다.

 

태고보우가 임제종이라는 주장의 문제점.

 

첫째 태고보우국사는 귀국한 뒤 임제종을 개창한 사실이 없다.

둘째 한국불교사상에 임제종이 따로 성립했다는 기록이 없다.

셋째 한국불교사에서 태고보우국사를 중흥적 중시조로 받드는 것은 종전에 있던 여러 교종과 선종 등을 통합한 통불교적 불교로서이다. 태고보우국사 이전에는 한국불교가 여러 종파로 분립되어 있었다.

 

태고를 임제계로 보는 증거로 태고의 행장 및 사리탑 비명에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다. “태고국사는 38세에 무자화두 로써 견성오도 하였고 그 뒤에 46세에 중국에 건너갔을 적에 당시 임제종의 선승 석옥청공의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을 중시해서 태고보우의 법통을 임제종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임제종과 관련성을 부정하고 있다. 태고 보우는 귀국한 뒤에 임제종을 자처하거나, 임제종이 한국에 성립된 흔적은 없다. 태고의 행장(行狀)이나 사리탑 비명을 놓고도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려국 국사 대조계사조 전불심인 행해묘엄 비지원융 찬리왕화 부종수교 대원보제 일국대종사 마하실다라 이웅존자 시원증 탑명(高麗國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贊理王化 扶宗樹敎 大願普濟 一國大宗師 摩悉多羅 理雄尊者 諡圓證 塔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임제종의 명칭이 전혀 없으며, ‘대조계사조(大曹溪嗣祖)’란 이름에서도 태고보우의 사리 탑비를 세운 이가 송광사(松廣寺)주지 석굉(釋宏)인 것을 고려할 때 한국불교의 조계종의 태조 설에 동조하고 있다.

 

조계종의 태고 종조론에 대해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절차적인 태고는 법맥 상으로 분명히 임제 후손이며 오늘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태고 법맥을 쓰고 있다. 태고보우는 임제종의 활동을 통해서 고려 말에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임제종 승이다…….임제종 선승들은 고려 말에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것이며 친원세력이다. 임제의 후손이란 점에서는 조계종이 아니라 임제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조계종 명칭에 관하여 이설이 부분하지만 조계종이라고 하는 말의 어원과 조계종이 우리나라 선종을 총칭하고 있는 점, 그리고 뒤에 선교양종이 이상적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통합된 종파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점에서 조계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리하지 않다. 합리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태고가 고려에서 깨달은 이후 원나라 청공으로부터 깨달음의 인가를 받기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 아니다. 태고는 스승이 없이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기도 한다. 그 근거로 태고의 행적과 수행을 통한 추론이다.

 

첫째, 태고보우는 스승의 지도 없이 자신만의 치열한 구도를 통해 오도에 이르렀다.

둘째, 태고보우는 간화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특히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무자화두(無字話頭)’가 직접적인 오도의 계기를 만들었다.

셋째, 태고보우는 간화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삼았지만, <원각경>과 같은 경전의 독송 도 병행 하였다.

넷째, 태고보우는 관세음보살의 염불수행과 대승의 서원을 통해 사회참여적인 대기대 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다섯째, 태고보우는 1700공안을 참구하여 자신의 공부를 원숙하도록 보임하였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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