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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산 떠나며 가보지 않은 길 걷기와 '죽음 명상'

신민형 | 기사입력 2019/10/13 [21:42]
하늘소풍길 단상

법화산 떠나며 가보지 않은 길 걷기와 '죽음 명상'

하늘소풍길 단상

신민형 | 입력 : 2019/10/13 [21:42]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웠던 추억 뿐 아니라

추오(醜汚)의 감정까지도 용서하고 감싸 안고 싶다

 

느긋한 주일 새벽, 괜히 설레는 일이 생겼다. 이사 2주를 남기고 4년 반 1500여회 법화산 산책 중 가보지 않은 길을 걷기로 눈 뜨지마자 작정한 때문이다.

 

산책 시작은 거의 마북공원 거쳐 구성동 주민센터 뒷쪽 산길이었으나 하산코스는 다양했다. 별다른 일정 없는 주말, 주일에는 특히 마음의 여유가 생겨 어느 길로 들어서고 어느 길로 하산할지 선택하는 것이 즐거윘다. 초기 산책 때는 호기심에 산 구석구석을 답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답고 편한 길로만 코스를 정하게 됐다.

 

아내와 하산길 약속이 있는 날은 운치가 있고 주차장이 있는 칼빈대와 경찰대쪽으로 하산했고 , 쉼터에서의 낮잠 혹은 옹달샘 등목을 즐기는 날은 법화산 정상 넘어 천주교 공원묘지 거치고 단국대로 내려가는 길을 즐겼다. 홀로산책으로 숲속 벤치에 누워 하늘 사진 찍고 페북글도 쓰느라 8시간 이상을 순식간에 보낸 적도 많았다.

 

그러나 두 세 번 가본 길도 많다. 용인숲길 지나 사기막골로 내려가 천주교공원묘지 입구로 가는 길은 험했지만 하산 후 산골 마을이 운치가 있었다. 88CC 끼고 내려오는 물푸레마을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귀갓길이 죽전역까지 버스타고 가야하는 등 편치 않아 더 이상 가지 않은 길이 되었다.

 

법화산 주변으로 가보지 않은 길은 딱 하나 있었다. 둘레길 종착점에 있는 한국미술관과 26번 버스종점에서 칼빈대에 이르는 길이었는데 동백, 성남, 죽전, 구성, 마북으로 가는 교차로가 있는 삭막한 길로 여타 운치있고 아름다운 길을 택하느라 한번도 걷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사 2주를 앞두고 일요일 새벽 불현 듯 가보지 않은 이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구성주민센터 산길로 들어서 둘레길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토끼 쉼터부터 시작해 세 곳 정자와 전망대를 거치며 내가 명명한 4년 반 하늘소풍길 단상의 총정리 편을 구상해보았다.

 

이런 총정리와 결부시켜 만약 나에게 2주간의 생명이 남았다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하는 죽음 명상을 해보았다. 법화산 이별 2주를 남기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고 작정했듯이 과연 2주 시한부 삶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삶을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마침 전날 매일종교신문에 죽음 명상관련 기사를 올린 덕분에 가보지 않은 법화산 산책길 걷기단상과 연관시키게 된 것이다.

 

다음달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되는 서울국제불교박람회의 주요행사로 죽음명상 컴퍼런스가 열린다는 보도자료가 눈에 띄어 정리해 보도했는데 독자에 전달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인상깊게 읽었다.

 

불교 경전에서는 모든 명상 중 최고의 것은 죽음 명상이다라고 무상과 무아를 가르쳤고 플라톤의 죽음을 연습하라’, 중세 유럽의 기독교 수도승들의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죽음을 잊지 말라)’ 등도 죽음 명상을 통한 귀한 영적 돌봄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Being With Dying(BWD)’가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치료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명상치유도 될 수 있다. 어차피 누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르고 있는 셈인데 임종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래서 종교란 것도 인류역사 이래 늘 존재한 것이 아닌가.

 

이사 2주를 남기고 법화산 가보지 않았던 산책길 걷는 일에 설레인 것처럼 죽음을 앞두고 설레이진 않더라도 뭔가 깨끗하게 정리해보고 싶다.

 

아름답고 편한 길이 아니라고 찾지 않았던 산책 길이었지만 마지막에는 그곳을 걸으며 만족했듯이 인생 마지막 길에서는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웠던 추억 뿐 아니라 추오(醜汚)의 감정까지도 스스로 용서하고 감싸 안고 싶다. 증오와 미움, 아픈 기억 모두 씻어내고 모든 여정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소풍이었노라고 총정리하고 싶다.

 

둘레길 종착점에서 칼빈대에 이르는 삭막한 도로를 걸으며 90년대 초반 문화일보 야유회로 마북리 정주영 별장을 온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대단지 마북캠퍼스(현대연구소단지)로 조성됐지만 당시엔 냄새 좋은 먼지 살짝 일어나는 시골길이었다. 그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 도로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때 벌에 쏘이면서도 즐거웠던 야유회 길이 그려졌다.

 

칼빈대서 교회에 간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느 때는 새벽예배를 가던 아내가 전날 이삿짐 정리와 폐기물 처리로 고단한 탓인지 늦잠을 잤기 때문에 슬쩍 법화산 산책에 나섰는데 하산길 만남의 장소인 칼빈대서 아내가 생각난 것이다. 아직 오후 예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친김에 칼빈대서 아내와의 또 다른 하산길 약속 장소인 언남동 찻집까지 걸어가 그곳서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일요일 새벽부터의 하늘소풍길 단상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정리했다. 그러면서 훗날 내 죽음을 기다리며 이 순간이 무척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떠오르리라 생각해보았다. ‘죽음 명상이랄 수도 있었다.

 

아내와 찻집에 들어서자 미련없이 메모장을 접고 아내가 좋아하는 인절미 샌드위치를 주문해 나눠먹었다. 그리고 손녀 소식을 담은 카톡방을 함께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이사 계획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하늘소풍길 단상과 죽음 명상을 마무리한다. 흔치 않은 작업이다. 그만큼 법화산 가지않았던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걸은 것은 참 잘한 일 같다. 기분이 좋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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