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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21. 메소포타미아의 악담가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19/10/24 [20:15]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21. 메소포타미아의 악담가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주형식 목사 | 입력 : 2019/10/24 [20:15]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엉뚱한 말이 튀어 나온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한 젊은 여성이 스페인어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담임목사가 따뜻하게 그녀를 소개한 이후에, 그녀는 설교를 위해 일어났다. 그녀는 그 소개에 다음과 같은 말로 응답하려고 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embarassed). 저를 부르신건 목사님의 실수에요!” 하지만 그녀는 스페인어 단어 엠바라짜더”(embarazada)를 사용하고 말았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녀는 저는 임신했습니다. 이건 목사님의 실수에요!”라고 말하고 만 것이다.

 

발람 역시 말하는 데 곤란을 겪었지만, 언어 번역의 어려움 때문에 뭔가 긍정적인 것을 말하려다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제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가 뭔가 부정적인 것을 말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이다. 발람의 이야기(22-24)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기이한 이야기 중 하나다.

 

성경은 발람의 배경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지만, 한 때 그는 진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북쪽지방 출신인 것처럼 보인다(22:5; 23:7 참조; 23:4; 오늘날 시리아 북동부지역). 그곳은 아브라함과 그의 대가족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우르를 떠난 이후 잠시 동안 살던 곳이었다(11:31).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그곳에 거주하였으며(24; 25; 28; 29; 31), 아마도 발람은 그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여호와를 알았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탐욕에 굴복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봉사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의 능력과 접촉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명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혼 왕과 옥 왕에게 행한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모압 왕 발락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21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 사람들과 인척 관계였다(12; 19).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에돔 사람들에 대하여 명령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고 그 땅도 취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2:4-9).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서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압 사람들을 그분의 백성의 친척으로서 참을성 있게 다루셨다. 하지만 에돔 왕처럼 발락은 오로지 이스라엘을 위험한 적으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발락은 모압이 이스라엘의 조준경에 이미 조준된 다음 목표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고대 근동에서 패배한 왕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자신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발락은 선제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미 모압보다 더 강력했던 시혼을 패배시켰기 때문에 재래식 전투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었다(21:26-29). 하지만 발락은 대량살상무기를 배치할 것이었다. ,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그가 고용할 발람. 다른 이들도 저주를 발할 수 있었지만 발람이 그 일을 가장 잘 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저주를 구기선수가 볼을 놓쳤을 때 내뱉는 말이나 건설노동자가 못 대신에 손가락을 망치로 내리치고 나서 비명을 지를 때 사용하는 말로 생각한다. 우리는 저주를 나쁜 말정도로 간주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셋째 계명을 범하는 것 [20:7])로 생각한다. 그러나 발락은 저주를, 마치 발람이 네 글자로 된 반유대주의 육두문자 슬로건을 외치기라고 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분노와 경멸을 분출하는 것이 발락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순간적으로 그의 기분이 나아지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대신 모압 왕은 저주를 초자연적 능력을 이용하여 그의 적들에게 실제적으로 해를 입히는 진짜 무기로 보았다(성경의 법에서 저주들과 비교해보라: 22:28; 19:14; 24:14-16; 5:18-27).

 

모압과 모압의 동맹국 미디안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두둑한 수수료와 발락 왕의 요청을 가지고 발람에게 갔다. 발락은 발람의 저주는 그 적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22:6).

 

그 기회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먼 나라 군주가 보여준 확신과 국가 전체를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는 기회 외에 근사한 수수료도 있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발락의 사신들에 관하여 발람에게 지시하셨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 진정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이렇게 약속하셨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2,3). 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심으로써 그 부조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신 복의 약속을 확증하셨다(22:15-18). 축복은 이보다 더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람이 국제 정세 뉴스를 잘 챙겨보지 못했고 발락의 적이 이스라엘임을 알지 못했어도,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관한 하나님의 축복을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간략한 기별은 그 선지자가 그 문제를 매듭짓는데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발락의 사신들에게 하나님의 거절하심을 알려주고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22:13). 이것이 발람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되었어야 했다.

 

절박한 발락은 안 된다는 대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이 원하는 액수만큼 써넣을 수 있는 백지수표와 함께 더욱 중량감 있는 대표자들을 발람에게 보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 이 말은 그가 청렴결백한 사람, 줏대가 있는 사람처럼 들린다.

 

발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온 대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발락의 특사들을 모압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들을 그 날 밤 머물도록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켜 그로 하여금 그의 선지자 경력 사상 가장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드러냈다.

 

발람이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0). “(만일)” 이라는 단어를 주목하라. 발락의 특사들이 아침에 그를 부르러 온다면 그는 가야할 것이었다. 이것이 그 징표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야할 권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약이란 말을 무시하고 그의 암컷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방백들의 뒤를 좇아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그는 불순종하여 그의 품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에 낙제하고 말았다.

 

발람은 모압 사람들과 함께 떠난 것이 아니라 그의 두 종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아마도 그가 그들을 아직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허비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하여 서둘러 떠났으며, 그에게 주어진 엄청난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가도록 그의 나귀를 재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발람 때문에 진노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대적자, 또는 고소인으로서 그의 길을 가로 막았다. 여기 대적자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사단으로, 대항(對抗) 기능을 가리킨다. 여기 본문은 그것을 마귀를 뜻하는 사단이란 고유 명사로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의 어느 곳엔가 인간에게 나타나는 여호와의 천사나 사자는 종종 여호와 그 자신이셨다(예를 들면, 6; 13). 그럴 경우, 그 사자는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13:18-그의 이름은 기묘자[9:6 참조]).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과 교통하기 위해 (1, “말씀‘) 인간 역사에 들어오신(5:2) 거룩한 삼위의 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람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보호자이신 그리스도와 대면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발람을 만나기 위해 길을 가로막고 선 강력한 초자연적 존재는 칼을 빼들고 하나님의 승낙 없이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기 위하여 의욕적으로 길을 출발한 그 선지자를 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여호와는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거짓된 선지자나 목회자들을 엄하게 다루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거짓되게 말함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렇게 함으로 그분의 이름이 망령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20:7 참조). 이와 같은 사람들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신원 도용의 죄를 범하여, 온갖 군상(群像)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을 것들을 믿도록 그분의 이름과 권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28:15-17).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을 뜻하는 선견자”(삼상 9:9 참조)가 되었어야 할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모하게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천한 나귀는 그 존재를 알아채고는, 세 번이나 위해를 피하려고 했다. 발람은 모압 사람들을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게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그의 동물을 때렸다.

▲ 발람과 말하는 당나귀    

 

선지자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막대기로 나귀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던 바로 그 때, 그 나귀는 왜 자신을 때리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가 나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생각하기 위해 멈추는 대신 발람은 이렇게 응수하였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2:29). , 정말이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칼을 들고 기다렸으며, 그는 학대하고 있는 자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에게 비열한 짓을 하고 있다는 발람의 비난에 맞서서 나귀는 이렇게 반박하였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30). 그래서 입술로부터 나오는 저주로 국가 전체를 파괴하기 위하여 벌이를 나선 영향력 있고 명석한 발람이 나귀와의 논쟁에서 지고 말았다! 나귀는 선지자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발람은 그렇지 못했다. 나귀는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신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귀는 총명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응하였다. 하지만 발람은 완고하게 반응하였다. 나귀처럼!

 

발람과 그의 나귀가 역할을 뒤바꾼 이 아이러니하고 통렬한 풍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우습고도 재미있다. 아무튼 그분의 백성을 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하나님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놓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강력한 기별을 보낸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신원의 축복을 그들에게 위에 놓으셨다(6:22-27 참조). 그래서 그들을 저주하거나 공격하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여시사 발람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셨을 때 그는 고꾸라졌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나귀를 때린 것을 질책하였고 그 동물이 그의 생명을 구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주셨다(22:31-33). 나귀를 아주 잔인하게 다룸으로써 발람은 무심코 그의 품성의 악한 면을 드러내고 말았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12:10). 생명은 신성하며, 동물을 소중히 여기고 양육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똑 같이 할 공산이 크다. 반대로 동물을 다치게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발람은 나귀가 자신의 탐심을 방해했기 그를 때렸다. 또한 그는 수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해서도 괘념치 않았다.

 

발람의 나귀는 이렇게 항의하였다.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아마도 이 기적의 말이 담고 있는 원칙은 사람들이 서로를 취급하는 방법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는/일하는 배우자/종업원이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일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여 신실한 우리의 조력자들을 안 좋게 다루는 대신에 그들을 믿어주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우리가 놓친, 그들의 행동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청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들켜버린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선선히 고백하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22:34). “(만약)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질문이 있는가? 무슨 뜻으로 만약이라고 하는 것이지? 발람은 그야말로 그저 돌이켜 집으로 갔어야 했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짜로 모압으로 가고 싶어했다.

 

놀랍게도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이 여행길을 계속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용하면서 이렇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35; 20절 참조).

 

기브롯 핫다아와에서의 산더미같은 메추라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11), 그가 원하던 것을 얻는 것은 탐욕적인 발람에게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가능하면) 그들을 가르치고 시험하기 위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계속 진행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과정에서 그분은 발람의 저주를 무효화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드러내실 수 있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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