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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기우(杞憂)

박길수 | 기사입력 2019/11/24 [08:34]
의연하고 자랑스러운 내 슬기롭고 겸손한 친구

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기우(杞憂)

의연하고 자랑스러운 내 슬기롭고 겸손한 친구

박길수 | 입력 : 2019/11/24 [08:34]

평소 습관처럼 초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홍콩에서 사업하는 친구 걱정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친구는 한때 커다란 좌절을 가까스로 넘겼고, 기사회생(起死回生)으로 다시 일어났다. 장년(長年)에 이르러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고, 이 사업이 한류의 영향으로 순풍을 탄 듯했다. 4년 전 내가 아내와 요양병원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친구는 멀리서 일부러 우리 부부를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그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구체적인 현재 사정과 그의 생각은 잘 모른 채, 그에게 큰 좌절이 다시 오지 않기만을 밤새 꿈꾸다가 눈을 뜬 듯싶다. 새벽 밝은 달이 아직 남쪽 하늘에서 온 세상을 은빛으로 비춰 주는 이른 아침, 라디오에서 끊일 듯 낮게 흐르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가 애처롭다.

 

울부짖듯 절규하며 낮게 흐르는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 의 정결한 여신(Casta Diva)이 새벽을 깨운다. 청아한 소프라노 노랫소리에 내 마음은 새롭게 숙연해진다. 사랑은 죽음도 감내할 만큼 애절한 일인 모양이다. 여사제(女司祭) <노르마>는 정결한 달의 여신에게 사랑하는 두 아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원하며, 스스로 화형대에 올라 불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지켜보던 그 남편도 놀라 그녀를 따라 불길로 뛰어든다는 노랫말이다. 나는 습관처럼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바로 눈을 돌린다. 잠에서 깨어나 찡그린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얼른 다가가 살포시 껴안고 볼을 천천히 비벼대며, 어린아이 잠재우듯 얼러 준다.

 

부드럽게 볼을 대고 가볍게 비벼줄 때, <노르마> 의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그녀 귓전에도 맴돌았던 모양이다. 새침하게 차분해진 그녀 얼굴이 조금씩 발그스름해진다. 평온해진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친구의 일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학 동문인 그와 나는 동갑이었고, 나는 대학 2학년 때 결혼을 했지만, 그는 결혼하지 않고 자기 아내와 이미 동거 중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시내 외국어 학원 시간 강사로 취업해 약간의 생활비를 간신히 충당했는데, 그 친구는 재주가 많아 전문 과외를 그룹으로 꾸려나갔고, 학과 성적도 우수한 역량 있는 친구였다.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매우 깊었으나, 우리는 부양할 가족이 없는 미혼 대학생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학업과 생활고로 바빠, 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는 없었던 듯싶다.

 

몇십 년 홍콩에 살면서, 이미 그 사회 속에 튼튼한 뿌리를 깊숙이 내린 친구가 나는 부럽기도 하고 참으로 대견하기도 했다. 지난 5년 전, 북경 전인대 결정에 반대하던 홍콩의 우산 혁명 때에도 그 친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6월부터 격화된 반 송환법관련 시위도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마 내 친구가 범죄인 인도 조약과 관련되는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진호 형과 오랜만에 전화 통화할 때까지는 그랬다. 가장 번화한 시내에 있는 그의 사업장은 이미 아무도 찾지 않고, 수입은 전무한데 경상 비용만 발생하며, 별다른 대책이 없어 큰 문제라는 진호 형의 말을 이제야 들었다. 나는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떤 말을 그에게 해줄까. 고난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친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무슨 말을 해줄까.

 

고난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친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무슨 말을 해줄까  

 

'고난과 시련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기 위한 하늘의 기회다. 친구가 지금은 아주 힘들 수 있으나 지혜롭게 견디면, 큰 행운을 얻을지 모른다.'

 

이런 진부(陳腐)한 말은 안 하는 게 좋을지 몰라. 친구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었어. 그렇다면 그 친구에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서 위기를 극복할 힘을 낼 수 있게 해줄까. 나는 꿈속에서도 이리저리 궁리했던 듯싶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루한, 이른 아침 시간에, 나는 별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우선 미사여구는 내려놓고 쉽게 내 마음만 그냥 전하기로 했다.

 

"윤행아!

얼마나 힘드냐? 어제 진호 형에게 네 소식 들었어. 밤새 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어. 네가 힘을 내면 좋겠어.

 

윤행아!

나는 너의 부부를 사랑한다."

 

나는 앞으로 위기가 오면, 그 위기와 함께 필사적으로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한 차례 맴돌고 내려와 다시 모이를 쪼는 비둘기 같은 마음으로 고난과 위기를 즐기며 살겠다는 내 블로그의 글을 첨부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친구의 대답을 들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 났구나. 우리 나이가 그려. 좋은글 잘 쓰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네 모습이 자랑스럽다. 위기는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고, 고난은 이겨내라고 있는 것. 이 보다 더 지독한 어려움을 우리는 이미 이겨낸 적이 있기에, 이만한 어려움 정도야 시간이 흐르면 이겨내질 거야. 다행히 아들과 딸이 모두 우리 곁에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 제수씨 곁을 사랑으로 지키는 네 모습이 존경스럽다. 너의 고통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메세지 고맙다. 오늘도 힘찬 하루가 될 것 같다. 나도 너희 부부를 사랑한다. 잘 지내라. 드디어 신문에 연재까지 하는 어엿한 작가가 됐구나. 좋은 글 많이 쓰기 바란다."

 

결혼도 나보다 늦게한 내 친구는 아직도 형수를 제수로 부르며, 자신보다 내 걱정을 더 많이 한다. 의연하고 자랑스러운 내 슬기롭고 겸손한 친구를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밤새 쓸데없는 걱정으로 잠 못 이루었던 모양이다. 외국에 살면서도 맞춤법 띄어쓰기마저 누구보다 정확한, 내 사랑하는 친구가 너무 고맙다. 너무 고마워.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며, 끝까지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친구 부부가 더 건강하기를 하늘에 기원하고 싶다.    

 

필자 박길수는 이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인물이다. 41년 결혼생활 중 4년여 전 느닷없는 아내의 뇌출혈로 불행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의식없는 아내를 편안한 집에서 보살피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땄다. 치료비와 생활비, 그리고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장애인 도우미 자격증도 따서 출퇴근한다. 항상 아내 곁을 지키는 아버지를 위해 딸과 사위, 그리고 누구보다 예쁜 손녀가 합류했다. 그는 불행한 생활일 듯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구원도 받는다. 그리고 개인 블로그 박길수의 일기’(https://m.blog.naver.com/gsp0513)에서 그러한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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