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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은 평화사상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2/05 [16:46]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했다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은 평화사상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했다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0/02/05 [16:46]

 

장정태 박사가 지난 131일부터 22일까지 일본 정토진종 정천사를 방문해 원효의 화쟁정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중국과 일본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천사 국제종교문화연구소는 종교와 평화구조라는 주제로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창립준비’(가칭)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장 박사는 이곳에서 원효의 화쟁은 평화사상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발표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사진은 세미나를 개최한 일본 정토진종의 본사인 전수사(편집자 주)

 

원효의 신분과 활동-불교 정신을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

 

원효는 우리 민족이 불교를 받아들인 지 1백 년에 배출된 가장 뛰어난 불교 사상가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시킨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 정신을 신라통일의 대업에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에서 태어났다.

 

경산시 출신으로 주장되는 삼국유사저자 일연과 원효 스님, 스님의 아들 설총 등 3인을 성현으로 추대 후 삼성현 기념사업 중이다. 이 가운데 설총의 경산시 출생 주장은 요석공주가 시댁인 경산시에서 몸을 풀었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는 스님이 출가 후 그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초개절이라 했다. 스님이 태어난 밤나무 아래 사리수 나무 곁에 절을 세워 사라절이라 했다. 요석공주의 시댁이 없으므로 경산시에서 몸을 풀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도 큰 영향을 준 스님이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스님이 세상을 떠난(686) 뒤 약 1백 년 후에 세워진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전하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스님의 자료는 삼국사기46 설총 전, 삼국유사4 원효불기조, 그 외 낭지승운보현수,사복불언,의상전교,이혜동진,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 광덕엄장조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중국 측 자료로는 송고승전이다.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십문화쟁론등의 저술을 남겼다.

 

화쟁의 내용-“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은 퉁융함을 나눈다

 

원효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는 신기하고 기이한 탄생과 함께 화쟁사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안으로 들어옴을 보았는데 그 뒤에 임신하였다. 그 후 만삭이 되어 해산할 때는 위인의 서조(瑞兆)로 홀연히 오색 서광이 어머니의 방 위를 가득히 덮었다.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이었다.

 

외서(外書) 등이 (결락)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십문론(十門論)이 있었는데 여래가 재세시에는 붓다의 원음 설법에 힘입어 중생들이 빗방울처럼 모여들었으며, 공공(空空)의 논리가 구름처럼 분분하였다. 혹자는 자기의 말은 옳고, 타인의 말은 그르다 하며, 혹자는 자기 생각을 그럴듯하나 너의 주장은 옳지 않다면서 시시비비 서로서로 자기의 주장에만 집착하여 하한(河 漢;黃河漢水)과 같은 많은 파벌을 형성하였다. 마치 큰 산이 골짜기로 돌아가듯 유는 싫어하고 공만을 좋아하는 것이 나무를 떠나 장림(長林)에 나아가려 함과 같고, 비유하건대 청색과 쪽 풀이 공채(公體) 이며, 얼음과 물이 그 근원은 하나인 것과 같다. 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은 퉁융함을 나눈다. 이에 관한 서술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 하나니, 모든 사람이 이를 보고 부정하는 자는 없고 모두 훌륭한 저술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화엄종요는 그 내용인 즉 진리는 비록 하나이지만 (결락)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이해를 달리한다.

 

금문석에 기록된 옛사람들은 늘 평범한 출생, 성장 그리고 활동이 아니다. 늘 범상치 않고 하늘, 땅 등 우주와 함께하는 탄생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비문

 

스님의 어머니가 태양이 집 안으로 들어와 3일 동안 배를 비추는 꿈을 꾼 뒤에 임신을 해 낳았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서인지 어려서부터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

-이종문,인각사,삼국유사의 탄생, 일연연보,글항아리,2010,p.271.

 

단속사 신행선사비문

 

멀리 대양을 건너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려고 위험스러운 푸른 물결을 탔으나 안심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험한 바다를 대하면서 더욱 계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채찍질하여 서원을 굳게 하였으며 부처님의 신기하고 기이한 위력에 힘입어 조각배로 곧바로 나아가 중국 땅에 이르렀다. 76세에 열반(7791021)에 드시니 하늘이 어둡고 캄캄해지니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잃었고, 땅이 흔들려서 만물이 이로 인해 시들었다.

-가산문집,역주 역대고승비문1993,pp.63-65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선사를 잉태하던 해 어머니의 꿈에 둥근 해가 공중에 떠서 빛을 내려 배를 뚫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놀라 깨어 문득 임신하였음을 깨달았다. 가지산사 낙성일에 선사가 사찰에 이르니, 암수 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뚫고 들어와 갈라진 빛이 방안을 비추고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비추었다.

-가산문집,역주 역대고승비문1993,pp.104-110.

 

화엄경설의 일체무애의 사람, 일도(一道)에 생사를 초출(招出)하다라고 한 내용에서 이름하여 나무라고 지칭하여 그것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 민중을 교화하였다. 그로 인해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게 되었다.

 

원효는 붓을 꺾고 소성 거사라 지칭하여 무애 박을 쥐고 무애 노래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

 

삼국유사원효불기조를 근거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김영태는 나무아미타불염불 신앙을 했다는 구체적 행위를 논하지 않은 반면 문경현은 무지몽매한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붓다의 이름을 알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 구체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가마타 시게오의 저서에는 나무를 통해 아미타신앙으로 연결하고 있다.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나무(南無)namas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귀명, 경례, 귀식,구아,도아라고 번역한다. 불보살의 명칭이다. 정토종에서는 염불에 대한 찬양을 종지로하여 항상 불호(佛號)앞에 나무두 글자를 붙였다. (김승동,불교사전,민족사,2011,p.137)

 

중생이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 경순한다는 말(운허 용하,불교사전,동국역경원,1985,p112)

 

나무아미타불주장은 문경현 역주, 삼국유사,민속원,2015,pp.468-469. 이재호, 역주,명지대학교 출판부,1988), 나무주장은(한정섭,삼국유사,삼원사,1996),(권상로,삼국유사,동서문화사,1978) 북한 학자 이상호의 삼국유사에서는 오막살이 가난뱅이와 어중이 떠중이들까지도 죄다 부처님 이름을 알게 되고 모두 염불 한 마디는 할 줄 알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야 말로 컸던 것이다.(이상호,삼국유사과학원출판사,1960,p406)

 

원효 중심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화쟁회통화해를 통한 한 마음(一佛心,一心)의 구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불교 안의 제가이쟁(諸家異諍)을 화해하고 경교제설(經敎諸說)을 회통하여 하나의 부처님 세계에로 돌이키려는 것이었다.

 

회통은 한번 보아 서로 모순되는듯한 여러 주장을 모아 통석하는 것을 이르는 말, 화회소통(和會疏通)을 말하는 것으로 이와같이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것은 최남선의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에서 한국불교의 진정한 자랑과 독특한 지위를 회통적 성격으로 파악하였다. 한국불교의 회통성은 불교 내적으로는 불교종파간의 사상대립 및 선교의 대립을 불교 외적으로는 유교,도교와의 대립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화쟁사상은 다양한 교설로 인해 아쟁(我爭)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던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여래장사상이 바탕이 된 일심을 통해 중생의 마음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한 불성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원효의 화쟁론은 모든 원리(一切法)를 외질 일심으로 삼는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론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이 두 논서는 또 다른 여래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오늘날 학문상에서나 그 밖의 정치,경제 등 사회문제에서 흑백양론으로 대립되어 자시비타(自是非他;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름)의 외고집만을 고수함으로써 야기되는 온갖 병폐와 해악의 요소를 일소하는 데 큰 시사가 되리라 믿는다. 화합과 무쟁(無諍)이다.

 

맺음말-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축소판

 

사람들의 가장 큰 특성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무오류성이다.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신만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 이와같은 개인적 성향이 집단을 형성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견해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원효는 이와같은 극단적 성향을 보이는 개인과 집단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권하고 있다. 그것이 화쟁의 출발이다. 논쟁에서 논쟁으로 가는 것을 막고,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원효가 주장하고 있는 화쟁은 단순히 화해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서로 다르다고 해도 모두 가치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교설로 인해 아쟁(我爭)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던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모든 사상적인 문제 간의 갈등에 대한 화쟁의 해답에서부터 출발한다. 원효의 화쟁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에 치우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함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원효가 생존했던 6세기는 한반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 모든 전쟁의 끝은 승자와 패자였다. 그 사회를 살았던 원효의 화두는 화합이며 평화다. 그것은 다툼이 아닌 화쟁을 통해 주장했다. 21세기 한반도는 원효가 살았던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축소판이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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