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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⑪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0/03/25 [10:23]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⑪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⑪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⑪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0/03/25 [10:23]

 

▲ 영국 식민지 시대의 인도영역 지도.  


대항해시대와 인도 식민지 개척

      

인도가 유럽의 식민지가 된 것은 향신료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유럽열강은 대항해시대 또는 발견의 시대인 15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1506)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불과 몇 년도 안 되어서, 바스쿠 다 가마(1460~1524)라는 포르투갈의 항해자이며 탐험가가 1497~99, 1502~03, 1524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 바수쿠 다 가마는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대항해시대는 포르투갈이 단연 선두였다. 인도에 발을 제일 먼저 디딘 유럽 탐험가도 포르투갈 출신 바수쿠 다 가마였다. 바수쿠 다 가마는 포르투갈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세 번이나 인도항해에 성공했고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향신료를 유럽으로 가져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바수쿠 다 가마는 첫 항해에서 일부 포르투갈 사람들을 캘리컷에 남겨 놓고 귀국했다.

▲ 인도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 출신인 바수쿠 다 가마.    

 

▲ 바스쿠 다 가마는 1497년 7월 8일 4척의 선대(船隊)와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여 아프리카의 희망봉과 동아프리카를 경유하여 1498년 5월 20일 캘리컷(Calicut)에 도착했다.  

 

그런데 인도에 남겨뒀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복을 위해 바수쿠 다 가마는 제2차 인도항해를 150221220척의 군함을 이끌고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의 상선과 부딪치게 되고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서는 아랍함대 29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가 15021030일이었고, 캘리컷 영주(자모린)와는 무역협정을 맺었다. 바수쿠 다 가마가 오기 전에는 아랍 상인들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무역협정을 맺은 바수쿠 다 가마는 1503년 포르투갈로 귀국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다 시피 했다. 다음은 실론(스리랑카)에 기지를 두고 있던 네덜란드가 뒤 따라왔고, 영국, 프랑스, 덴마크-노르웨이(1536년부터 1814년까지 존재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동군연합)가 각축을 벌였다. 한편 인도는 무굴제국이 붕괴되면서 무굴제국을 반대하는 힌두교도들이 인도 중남부에 마라타 왕국(16741818)을 세웠다.

 

바수쿠 다 가마는 1519년 백작 작위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던 차 1524년 인도(고아) 통치를 담당하기 위해서 인도에 갔다가 그해 1224일 코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숨졌다.

▲ 영주 자모린을 면회하고 있는 바수쿠 다 가마.    

 

▲ 바수쿠 다 가마의 함대가 캘리컷 해안에 정박하고 바수쿠 다 가마 육지에 상륙하는 장면.    

 

18세기 후반 경,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에서 지배권을 놓고 겨루다가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서 영국의 힘은 인도 아 대륙에 크게 떨치게 됐다. 브리티시 인디아(영국인도) 시대가 전개됐다. 영국은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영국런던 상인들은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00년부터 1708년까지는 단순한 회사였지만, 1708년부터 1873년까지는 영국의 칙허 회사였다.

▲ 런던 소재 영국 동인도회사 본부 건물. 1600년 창립하여 1874년 해체 때까지 존속하면서 합자회사로서 무역을 주관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통치권을 이관하게 된다. 이에 앞서서 무굴제국은 1857년 세포이 항쟁에서 영국에게 멸망하게 됐다. 이로써 영국 동인도 회사가 1858년부터 1876년까지 간접통치를 하다가 1877년에 인도제국이 성립된다. 이로써 인도는 영국의 직할령이 된 것이다. 영국은 1876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를 직할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고, 버마와 실론도 1948년 분리 독립될 때 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세포이 항쟁(1857~1858)은 인도인 용병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영(反英) 항쟁이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고 동인도 회사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세포이는 페르시아어로 용병을 뜻하며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항쟁은 인도 독립 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세포이 항쟁은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1차 인도독립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이 명칭들 가운데 '반란'이란 것은 다분히 영국 측 시각을 반영한 것이고, 인도인의 입장에서 이 항쟁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포이 항쟁은 빠른 속도로 인도 각지에 확산되어 각계각층이 영국에 대항하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주요 교전은 주로 갠지스 강 상류 삼림 지역과 인도 중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인도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우타르프라데시 주, 비하르 주, 마디아프라데시 주 북부, 그리고 델리 등지에서 교전이 있었다.

▲ 동인도회사 세포이(용병)들의 항쟁(1857년 벵골 군대).

 

세포이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촉발되었고, 1858620일 영국이 승리하게 된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펀자브의 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트라반코르, 카슈미르, 라즈푸탄 등과 같은 다른 많은 지역의 토후국들은 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체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군사, 재정, 행정 등 각 분야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켜 정부 직할로 편재하였다. 이로써 빅토리아는 인도 제국의 군주라는 새로운 지위를 더하게 되었다

 

항쟁에 참여한 세력의 상당수는 봉건 귀족들이었고 이들은 그때까지 유지되던 자신들의 영향력을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의 합병 정책으로 인해 잃게 된 자신들의 지위를 되찾고자 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합병 정책으로 인해 많은 봉건 귀족들은 자신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합병정책은 관습적으로 세습되어 오던 봉건 귀족의 직위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계승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해당 귀족이 사망하면 영지를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직할령으로 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봉건 귀족들은 이러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력 확장 정책에 굴욕을 느꼈다. 이 조치로 봉건 귀족들은 재정 역시 약화되었는데 나그푸르의 왕족조차 콜카타의 경매장에 자신의 보석을 내다팔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락슈미 바이나 나나 사히브와 같은 귀족들은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조치에 강한 반감을 보였다.

▲ 락슈미 바이 여왕

 

락슈미 바이(1828~1858)는 인도의 중북부에 있던 토후국 잔시 왕국의 왕이자 인도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독립 운동가이다. 흔히 라니 락슈미바이(락슈미 바이 여왕)이라 알려져 있다. 세포이 항쟁에서 인도 점령에 저항하는 반영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락슈미 바이는 1958617, 괄리오르 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    


동인도 회사의 병합 정책은 무굴 제국 자체를 겨냥하고 있었는데, 인도 총독 제임스 브라운 람세이는 바하두르 샤 2세의 계승자 역시 라프스 선언에 따른 조치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바하두르 샤 2세의 사후에는 델리 성을 떠나야한다고 밝혔고, 뒤를 이은 총독 캐닝은 바하두르 샤 2세의 계승자가 국왕이란 칭호를 계승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무굴 제국의 귀족들은 이러한 조치에 분노를 느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하였다.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승리한 영국동인도 회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동인도회사 통치권을 이관하면서 인도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년 후인 1876년에는 인도 제국을 선언하여 1947년까지 지속된다. 1857년에 세포이 항쟁으로 무굴 제국이 영국에 의해 멸망한 1858년부터 1876년 전까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간접 통치했으나 1877년에 인도 제국이 성립되자 인도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인도 제국은 1947년에 인도 공화국이 성립하였고, 이듬해 1948년 버마와 실론도 분리 독립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 빅토리아(Victoria, 1819년∼1901년)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재위:1837년∼1901년)으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열었다.


 영국인도가 시작되면서 무굴제국의 무슬림과 마라타 제국의 힌두교도들은 인도독립과 반영운동에 시동을 걸게 된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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