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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조선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세종의 영릉(英陵) (上)
합장릉의 구조와 세종과 소헌왕후의 생애
기사입력: 2020/04/01 [21:01]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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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합장릉의 구조와 세종과 소헌왕후의 생애

()영릉의 입지와 풍수리지적 분석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

 

4대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1395~1446)의 능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다.

 

세종 27(1446)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시호를 소헌(昭憲), 능호를 영릉(英陵)이라 정하고 이미 수릉으로 선정하였던 헌릉의 서쪽 언덕에 궁은 같이 하고 실은 달리하여, 동실은 소헌왕후가 사용하고 서실은 세종의 수실로 남겨두었으며 세종이 승하하자 서실에 합장하였다.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석인, 석수는 이실(二室)의 예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원래 헌릉의 서쪽에 있었던 구()영릉의 석인 석수의 수량은 두 광중의 예, 2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 승하 후, 세종의 장자인 문종이 단명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로 사사 당한 단종, 그리고 세조의 장자인 의경 세자(추존 덕종)의 급사(急死)가 이어지면서 영릉의 풍수가 불길하다는 설이 번지게 되어 결국 예종 즉위년에 현재의 여주로 천릉하게 된다.

 

천릉할 당시 구 영릉의 상설은 수운(輸運)하는데 폐단이 있으니 땅에 묻도록 하였고, 이때 묻은 구 영릉의 석물은 현재 순조 인릉의 석물이다. 영릉을 지금의 위치로 천장하면서 광릉의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 무석인은 갑주의 형태가 유사하고, 얼굴과 투구가 긴 모습 등 공통점이 보인다. 머리와 다리가 다른 무석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어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준다. 길어진 투구에는 광릉과 비슷한 두정 장식이 4면에 조각되어 있고 정면에는 세로 선이 그어져 있다. 투구의 날개 장식은 단순한 선으로 표현하였다. 투구에 달린 목가리개에는 문양이 없다. 눈썹은 약간 찡그린 모습으로 눈썹 가운데와 코 사이에 주름이 잡혀 있다. 눈은 물방울 모양으로 눈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형태로 조각되었다. 입은 일자로 다물고 있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을 새겼다. 목에는 피견을 두껍게 표현하였고, 목 아래에서 묶었다.

 

흉갑과 피박의 표현이 구체적이지 않고 얼버무려 조각하였다. 가슴에 여의두문, 그 아래로 수면이 새겨져 있다. 어깨에는 피박에 딸린 수면이 정면을 향해 새겨져 있고, 피박과 퇴갑은 소슬금문, 과두는 운문으로 시문 되었다. 갑옷 안에 입은 전포의 소매가 팔꿈치에서 뒤로 흩날리는 모습으로 되어있는데 소맷자락을 매우 두껍게 표현하였다. 과대에는 사각형의 구획 안에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배갑은 소슬금문이 시문되어 있고, 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졌다. 상체에서 하체로 내려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단면이 사각형으로 되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1기에서 볼록하게 나왔던 가슴은 양팔의 뒤로 들어가 구부정한 자세가 되었다. 팔을 앞으로 모아 왼손을 위로 두고 검을 잡고 있는데, 팔이 짧고 어깨가 좁아 어색하다. 비갑은 광릉과 비슷한 형태로 작은 갑찰을 연결한 모습이다. 칼의 코 등이 에는 수면이 시문 되었다. 칼집에 문양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그 형태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세종실록 오례에 실린 금장도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 영릉은 원래 헌릉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현재의 서울 내곡동)에 자리를 잡았었는데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論議)가 일어나서 현재의 여주로 옮겼다. 이 때 릉(陵)을 치장했던 석물(石物)은 운반하기가 어려워 가져가지 않아 땅에 묻혔다가 1970년대 발굴됐다. 현재 남아있는 석물은 석양(石羊) 석마(石馬)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석인상(石人像) 난간주석(欄干柱石) 등이 있는데 1974년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와서 전시하고 있다.

 

1469년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을 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생애

 

세종(1397~1450)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44녀 중 셋째 아들로 휘는 ()’,자는 원정(元正)’이다. 1408(태종 8) 211일 충녕군(忠寧君)에게 봉해지고, 5년 뒤인 1412(태종 12) 53일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되었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됨에 따라 그해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4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소헌왕후와 5명의 빈에게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맏아들이 문종이며, 둘째가 세조이다.

 

세종 연간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다. 고려사, 속육전, 농사직설, 용비어천가등의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등 많은 사업을 통하여 조선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은 1450217일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 사저의 동쪽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시호()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廟號)세종(世宗)’, 등호는영릉(英陵)’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로 1395(태조 4)에 태어났다. 1408(태종 8)에 당시 충녕군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민씨(閔氏)를 봉()하여 변한 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삼고, 정씨(鄭氏)로 숙의 옹주(淑懿翁主)로 삼고, 심씨(沈氏)로 경숙옹주(敬淑翁主)로 삼았다. 민씨(閔氏)는 심온(沈溫)의 어머니이고, 정씨(鄭氏)는 정역(鄭易)의 딸이고, 심씨(沈氏)는 심온(沈溫)의 딸이다. 심온은 정승(政丞)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다. 1417(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恭妃)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 하여, 1432(세종 14)에 왕비로 승봉(陞封)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 82녀를 두었다.

 

헌릉(獻陵) 서쪽 기슭에 영릉을 조성-풍수 불길설에 여주로 천릉

 

1446(세종 28)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조선의 3대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獻陵) 서쪽 기슭에 영릉(英陵)을 조성하였다.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영릉(英陵)을 봉분(封墳)은 같이하고 광중(壙中)은 달리 하며, 석양(石羊석호(石虎석마(石馬석인(石人)은 두 광중의 예()로 하라." 하였다.

 

영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현실을 둘로 두는 형태로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며,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때 미리 마련한 수릉(壽陵)이다. 1450(문종 즉위년)에 왕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봉분은 하나로 하되 석의 물은 쌍릉의 형식으로 배설하도록 하였는데, 영릉이 천을 됨에 따라 조성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광에는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였다.

 

영릉의 풍수에 대해서는 이미 문종 연간(1452)부터 논의가 있었으며, 1452(단종 즉위년)에는 영릉에 가서 능 자리를 보게 하고 다른 혈을 살피도록 하였다. 영릉의 서혈(西穴)에는 돌이 있어서 건원릉의 동혈(同穴)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세조 연간에도 영릉에 대한 개장(改葬) 논의가 있었으며, 1468(예종 즉위년)에 천장(遷葬)할 땅을 여흥(餘興, 지금의 여주)으로 정하였다. 이듬해인 1469(예종1) 현재의 영릉으로 천릉하였다.

 

풍수학(風水學) 문맹검(文孟儉)이 상언(上言)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건원릉(健元陵)의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은 좌지(坐地)가 본래부터 낮고 평평한데, 왼쪽과 오른쪽에서 나오는 물이 이곳으로 서로 모여드는데도 도랑이 좁은 까닭으로 봄·여름에 빗물이 많으면 도랑이 막히고 물이 젖어 들어가서 소통(疏通)이 되지 않으며, 가을·겨울에 얼음이 솟으면 신로(神路)의 전석(磚石)과 비각(碑閣)의 계체(階砌)가 부동(浮動)하여 어긋나고 위태로 와 진실로 미편(未便) 합니다. 빌건대 왼쪽과 오른쪽의 도랑을 깊이 파서 소통(疏通)시켜 낮은 곳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소서.

 

건원릉(健元陵)의 동구(洞口)인 용산(龍山)의 끝에는 인가(人家)가 너무 가까이 있어 밭을 갈고 길을 내어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더구나 화재(火災)가 또한 두렵습니다. 마땅히 인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헌릉(獻陵) 과 영릉(英陵), 오방(午方)과 미방(未方)의 물이 명당(明堂)무덤의 혈() 앞에 평평한 땅을 말함으로 바로 들어오니, 비록 그것이 길수(吉水)일지라도 바로 들어오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물의 흐름을 인도하여 도랑을 파서 현무방(玄武方)으로 포읍(抱揖) 하는 형상을 만들고,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둑소(纛所)는 백신(百神)이 있는 곳이고 병가(兵家)에 소속되었으니 더욱 엄숙하고 공경해야 할 것인데도, 지금 예조(禮曹)의 담 밖에 있어 인가(人家)에 너무 가까우니 더러움이 매우 심합니다. 깨끗하고 고요한 땅으로 옮기기를 청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도읍(都邑)은 명당(明堂)의 물이 본디는 원류(源流)가 없었는데, 왼쪽으로는 호조(戶曹)의 샘물과 오른쪽으로는 사온서(司醞署)의 샘물이 실제로 명당(明堂)의 원류(源流)가 되었으니,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사복시(司僕寺)가 왼쪽 샘물의 가에 있으므로 말똥이 쌓여 있어 그 물을 더럽게 만드니 실로 미편(未便) 합니다. 바라건대 사복시(司僕寺)를 개천(開川)가로 옮겨서 더러운 것을 흘려보내게 해서 명당(明堂)의 물을 깨끗하게 하소서.

 

명당(明堂)의 왼쪽 물과 오른쪽 물이 모여서 흘러 충동(衝動)하여 서로 부딪치는 형세가 있으니, 두 물의 사이에 마땅히 한 무더기의 작은 돌산[石山]을 만들어, 두 물이 서로 부딪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대저 사방(巳方)과 오방(午方)에서 온 산맥(山脈)에 창고를 안치(安置)하고 나무를 쌓아 두면 반드시 화재(火災)가 있는 것은 곧 그 이치입니다. 지금 국도(國都)의 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군자감(軍資監)은 숭례문(崇禮門)으로부터 광통교(廣通橋)에 이르기까지 모두 창름(倉廩)을 쌓았으니 화재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다른 곳으로 옮겨서 화재를 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명당(明堂)의 수구(水口)에는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나무를 심어서 수구(水口)를 진압하고 막게 하는 것이 곧 옛날 사람의 법입니다. 지금 국도(國都) 수구(水口)의 안에 옛날 사람이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소나무를 심었지마는, 그러나 이 작은 산이 수구(水口)에 있지 않고서 도리어 수구(水口)의 안에 있고, 또 산이 무너져서 낮으며 소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지금 보제원(普濟院)의 남쪽과 왕심역(旺心驛)의 북쪽에 작은 산을 혹은 3개나 7개를 만들어 소나무와 홰나무·버드나무를 심어서 수구(水口)를 좁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수구(水口)에 인가(人家)가 빽빽하게 많이 있고, 창름(倉廩)이 많이 쌓여 있어야만 산수(山水)의 기운이 유박(留泊)하는 것은 진실로 이치가 있습니다. 지금 수구문(水口門) 밖의 예성방(禮成坊)은 인구가 희소(稀少)하니 실로 미편 합니다. 인민(人民)으로서 거주하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나누어 주소서.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는 본디 일체(一體)이니, 하늘에서는 형상(形象)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체(形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중국 조정의 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안장(安葬)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하물며 도성(都城)10리 안에 사시(四時)로 임금께서 농사짓는 것을 관찰하고 유람하러 거둥하는 곳인데도 무덤이 연달아 있으니 신()의 마음은 미편 하게 여깁니다. 다만 이것뿐만이 아니라, 낙천정(樂天亭)과 연희궁(延禧宮)이 서로 떨어져 있는 4, 5리 안에 무덤이 많이 있으니 매우 미편한 일입니다. 낙천정(樂天亭)과 영서역(迎曙驛) 부근의 분묘는 새 무덤과 옛 무덤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옮겨 가도록 하고, 산등성이와 산언덕을 따라서 모두 나무를 심고는 벌채(伐採)도 금지하고 기경(起耕)도 금지해 산기(山氣)를 배양(培養)하여 만세(萬世)에 무궁(無窮)한 소용(所用)에 이바지하소서.

 

도성(都城)의 세 곳의 물이 모여드는 아래에 마땅히 곡식 창고를 안치(安置)하여 그 산수(山水)의 정()을 머물게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라도·충청도의 조전(漕轉)을 바다로부터 바치는 것은 들여와 용산창(龍山倉)에 쌓아 두고, 경상도·강원도의 조전(漕轉)을 강으로부터 바치는 것은 들여와 두모포(豆毛浦)에 쌓아 두어, 산수(山水)의 정()을 머물게 하소서.

 

장의문(藏義門)은 천주(天柱)의 자리인데, 인물(人物)이 밟고 다니는 것이 미편 하니 상시로 닫고 열지 아니하여 천주(天柱)의 자리를 보전하게 하소서.

 

황해도(黃海道)의 병이 근경(近境)에 흘러들어오니, 다만 의약(醫藥)으로써는 쉽사리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은 생각하기를, 푸닥거리[]로 진압하고, 부적(符籍)으로 주원(呪願)하여 병을 치료하는 방술(方術)이 없는 것이 아니니, 도류(道流)와 부적(符籍)으로 주원(呪願)할 수 있는 경사(經師) 를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여 그 발단(發端)을 막게 하소서.

 

지금 우리 풍수학(風水學)을 하는 사람을 본토(本土) 에서 생장(生長)했기 때문에 한 나라의 산천(山川)도 능히 두루 알지를 못하는데, 하물며 중국(中國)의 산천이겠습니까? 모름지기 중원(中原)의 산천을 답사(踏査)해야만 그제야 그 지리(地理)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풍수학(風水學) 하는 사람을 매양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행차에 차송(差送)하게 하소서.

 

경기(京畿)에 남향(南向)하여 크게 이익되고 쓸 만한 땅은 한정이 있는데, 천세(千世만세(萬世)의 후에 국가의 소용은 한이 없을 것이니 남향(南向)한 땅은이를 금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풍수학(風水學)에 내려서 이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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