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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조선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세종의 영릉(英陵)(下)
영릉의 입지와 풍수리지적 분석
기사입력: 2020/04/03 [14:06]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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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릉은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하는 모란반개형(牧丹 半開 形)의 명당이다.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하는 모란반개형(牧丹 半開 形)의 명당

 

조선 시대의 왕릉은 중국 주례의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과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조선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 친화적인 조영술을 따랐다.

 

영릉의 입지를 보면 영릉(英陵)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 831번지 지역에 있다. 조산(祖山)인 북성산(北城山)을 주맥으로 하며, 능 뒤에 솟은 주산(主山)인 칭성산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다. 북성산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산맥인 안산(案山) 들은 마치 신하가 왕릉을 향해 고개 숙이고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겹겹이 산머리를 감돌아 혈()을 감싸주어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하는 모란반개형(牧丹 半開 形)의 명당이다. 영릉이 이 자리로 천장(遷葬)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풍수적 명당자리로 꼽히고 있다.

 

영릉의 능역은 춘관통고에 따르면 남측으로 삼전동(三田洞), 북측으로 저왕대동(抵旺垈洞), 동쪽으로 효종 영릉(寧陵)을 경계로 하고, 동서주위 둘레는 11,970이다. 영릉은 주산인 앵봉 아래 중심 능선에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북에서 정남으로 향함) 하여 자리 잡고 있다.

 

세종이 승하하고 구() 영릉(英陵) 자리에 묻히고 난 후, 풍수가들의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의 예언대로 세종의 첫째 맏아들인 문종(文宗)이 재위 24개월 만에 병사하고 곧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지만,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해 장손(長孫)의 대가 끊어졌다.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한 것은 세종(世宗)의 구() 영릉(英陵)자리가 흉지(凶地)이기 때문이다. 예종 즉위년에 여주로 천장한 세종의 영릉(英陵)은 천하의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예종은 즉위 12개월 만인 예종 1(1469)20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풍수가 목효지가 헌릉 서쪽 자리는 수렴이 든다고 주장...결국 천릉

 

세종은 처음 헌릉에 안치되었다. 태종이 헌릉을 점지하면서 헌릉의 오른편을 비워 두라 명하고 후손들이 사용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효심이 지극했던 세종은 태종의 명에 따라 헌릉에 묻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풍수가인 목효지(睦孝智)가 헌릉의 서쪽 자리는 수렴이 든다고 주장하며 다른 곳을 정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 이유로 수파장생의 논리로 입지의 허 결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목효지의 논리는 안산(安山)의 장혈(葬穴)을 보면 건해산(乾亥山)이 되기 때문에 장생(長生)을 물이 깬(, 水破)수파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신개, 이정녕, 민의생, 정인지, 유순 도와 조서강) 등은 산맥이 임방(壬方)에서 나왔고, () 역시 임방에서 떨어졌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목효지의 주장을 반박했다. 결국, 세종은 판단하지 못하고 아버지 태종의 유훈을 따라 헌릉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목효지의 풍수적 주장은 문종의 현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증명되었다. 문종을 안장하기 위하여 천장하는 과정에서 물이 솟아올라온 것이다. 결국, 헌릉의 서쪽 자리를 다시 점지하고 천광 하였으나 이번에는 돌이 나온 것이다. 결국에는 문종의 현릉은 동구릉에 조성한 이유이다. 헌릉 주변에 있는 왕릉의 천장 문제가 대두되었고, 예종 때 세종 능의 천장 문제가 주목받아 지금의 여주로 천장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세종 능의 천릉지 후보는 3곳이었으나, 최종적으로 여주의 능서면 왕대리로 결정되어 지금의 영릉이 조성되었다. 천장 후보지의 판단은 상지사 안효례가 길흉 판단을 담당하였으며, 그의 판단을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이계전(李季甸)의 분묘(墳墓)가 있는 땅이 영릉 천장 지로 결정되었다. 영릉의 천장 과정에서 이기 법의 하나인 수파장생 이론이 부상되었다. 천장지의 결정 과정에서 정인지(鄭麟趾) 등은 예종실록 2, 예종 즉위년 1227일 계축 2번째 기사의 내용을 보면 수파장생 이론을 천장지의 결정근거로 제시하였으며 내용을 알 수가 있으며 이 계기로 수파장생이론 즉 이기 풍수가 만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강금산(剛金山) 권총(權聰) 부모(父母)의 분묘(墳墓)는 실로 장생 수파(長生水破)가 아니었는데도, 안효례(安孝禮)가 신()과 더불어 함께 이 산을 복지(卜地)하고서 그 흉()한 것을 말하지 않았고, 용인(龍仁)으로 가는 도중에 있을 때에야 이에 장생 수파(長生水破)를 말하고 쓸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즉시 가서 보고자 하였으나, 역로(驛路)가 조폐(彫弊)하였기 때문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 등으로 하여금 상지관(相地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피게 하니, 조금도 장생 수파(長生水破)에 대한 의심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안효례(安孝禮)의 이러한 말은 정섭(情涉)이 주무(綢繆)하니, 청컨대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여러 재상(宰相)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만약 안효례를 죄 준다면, 후일에 상지(相地)할 자들이 두려워하여 반드시 그 나쁜 것을 밝혀서 말하지 아니할 것이니, 죄를 줄 수가 없다." 하였다.

 

영릉은 여주에서 서쪽으로 약 4km 거리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旺垈里)에 있다. 정조 13(1789)에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여주에 의하면 왕대리는 길천면(吉川面) 담당이었는데 1914년 부면 통폐합 시 영릉이 여주군에서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능서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왕대리는 고려 32대 우왕(禑王)의 유배지로 그곳을 일명 왕터(王垈)라고도 부른다<여지도서여주 고적조, 고려사절요우왕 14(1388) 9월 조>. 영조 때 병조정랑(兵曹正郞, 5)을 지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지은택리지팔도총론 경기 편에 의하면 세종의 영릉(英陵)에 대하여 술사(術士)가 평하기를 회룡고조(回龍顧祖, 속리산에서 나온 지맥이 휘돌아서 본래의 속리산을 마주 대한 자세의 생김새) 형국으로서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으로 향하였고 물길은 신방(申方, 서쪽에서 남쪽으로 30도 방향)에서 득수(得水)하여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쪽으로 30도 방향)으로 파문(破門, 흘러나가는 물이 왕릉에서 보이지 않는 곳)하므로 여러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術士言回龍 子坐申水入辰 爲諸陵中第一云)’라고 하였다. 일부에서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란반개형국(牡丹半開形局)으로 보고 있으니 영조 때까지 회룡고조형국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뒤집는 격이다.

 

풍수지리적 분석

 

1) 용세(龍勢)-회룡고조형의 형국

 

영릉(英陵)의 용세(龍勢)는 회룡고조형의 형국이다. 북성산(北城山)에서 자룡(子龍)으로 오향(午向)의 방향으로 와서 왕대리를 지나면서 다시 손사룡(巽巳龍), 건해향(乾亥向)으로 100m를 진행하여 건해룡(乾亥龍), 손사향(巽巳向)으로 틀어 들어온 용()이 경유룡(庚酉龍) 갑묘향으로(甲卯向) 다시 방향을 틀어 들어와 혈을 맺은 곳이 세종(世宗)의 영릉(英陵) 이다.

 

 

2) ()-주산이 혈 처 앞 남서쪽에서 돌아 남향으로 형성

 

주산은 혈처의 뒤쪽에서 내려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릉(英陵)은 혈 처 앞 남서쪽에서 돌아 남향으로 형성되는 특이한 형국이다. 북성산에서 축간방(丑艮方, 북쪽에서 동쪽으로 30~45도 방향)으로 뻗어 131.1고지에서 계방(癸方, 북쪽에서 동쪽으로 15도 방향)에서 북쪽인 자방(子方)으로 꺾어 들어 다시 계방(癸方)에서 입수(入首)가 이루어지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이 된다. 또한, 혈세는 행룡 입수하여 내려오다 입수처에 못 미쳐 속기하여 우선룡으로 정혈한 형국이다. 혈장 내에 일()이 있으며 잉()은 혈지로서 강한 힘을 잉태하여 혈이 응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혈 지의 조건이기도 하다.

 

3) 사세(砂勢)-청룡과 백호가 서로 맞물려 교쇄하듯 혈을 감싸 도는 형태

 

영릉(英陵)의 사신사를 살펴보면 영릉의 현무 봉은 영릉의 주산이며 백호사이기도 하다. 회룡고조형으로 백호를 돌아보는 형국이다. 안산은 백호 사를 안대(案對)로 형성하고 있으며 당판의 크기가 방대하여 나성(羅城)처럼 외청룡과 외백호를 이루고 있다. 청룡과 백호가 서로 맞물려 교쇄하듯 혈을 감싸 도는 형태이다. 청룡은 주산의 본신룡으로 계속 행룡을 하다가, 혈장을 중심으로 하여 끝부분이 경유(庚酉) 향으로 전환하여 계곡을 만나 용이 멈춘 형국이다. 백호는 북성산을 지나오면서 109m의 지점에서 기봉을 하여 현무까지 오는 줄기이다. 외백호는 백호 중간에서 분지하여 갈라져 행룡 하다가 곤신룡(坤申龍)으로 전환하여 계속 내려오다 계곡을 만나 멈추는 형국이다. 영릉은 청룡과 백호가 교쇄하여 장풍을 이루는 교 쇄 명당이다.

 

 

4) 수세(水勢)- 거울보다 맑은 진응수 있어

 

수국은 북성산의 신지리(新池里)에서 물이 발원하여 신방(申方, 남쪽에서 서쪽으로 60도 방향)에서 득수(得水)하고 안수(案水)가 되어 왕릉을 우선수 하며 진방(辰方, 남쪽에서 동쪽으로 60도 방향)으로 빠져나가 소양천(昭陽川)에 합류하고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형세이다. 영릉의 수세는 좌선수이며 좌측 계곡에서 물길을 만나 백호 줄기에 이른 것이다. 백호 줄기에서 흐르다 다시 청룡 줄기로 흐르는 구곡수의 형국이다. 백호의 갓 부분에서 연지를 만나 합수(合水)하며 다시 이물은 청룡의 갓 부분으로 흘러나간다. 세종의 영릉은 청룡, 백호의 사()내에서 분합(分合)이 이루어지는 대혈지 이다. 또한, 세종의 영릉에는 거울보다 맑은 진응수가 있다. 진응수는 명당의 혈을 증명하는 요건 중의 하나이며 혈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5) 풍수지리적 특징-조화와 균형

 

영릉의 사신사는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은 매우 큰 편이며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에는 진응수가 있으며 물은 흐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이다. 영릉(英陵)의 형국은 용이 승천하는 듯한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다. 또한, 영릉은 속리산을 머리를 돌려 뒤돌아 보는듯한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局)이며 전체적으로 큰 당판에 좌청룡 우백호가 왕릉을 감싸고 있어 신하들이 읊조리고 하례하는 모습으로 마치 혈지를 향해 모든 사()가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군신조회(君臣朝會)형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란반개형이라 한다.

 

이처럼 여러 형국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혈성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기 풍수로서 장생수파의 논법이 등장한 사례이기도 하다. 왕릉 터는 예종 즉위년(1468) 1227(癸丑) 호조판서 노사신(1427-1498), 예조판서 임원준(1423-1500), 한성부윤 서거정(1420-1488) 등이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손자이고 지충추원사 이종선(?~1438)의 아들인 대제학 한성부원군 이계전(1404-1459)의 분묘지로 천장하기로 정하고 청룡 줄기에 있는 광주이씨 우의정 이인손(1395-1463)의 분묘도 이장하게 된 것은 임금이 후손을 궁궐로 불러들여 묫자리를 양보하여 달라고 요구하여 이루어졌다.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자리라고 하여 이곳으로 왕릉을 천장하였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조선왕조가 100년을 더 연장하였다 하여 이를 일러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부른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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