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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은 왜 불교에 높은 관심을 가질까
서양에서 입지 넓히는 불교…정신건강 문제에 새로운 해법 제시
기사입력: 2020/05/08 [07:0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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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입지 넓히는 불교정신건강 문제에 새로운 해법 제시  

 

 

최근 수년간 인근의 사찰과 명상센터를 찾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단순히 명상을 위해서라면 명상과 관련된 책이나 스마트폰 앱(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올가 카잔(Olga Khazan)은 미국 유명 월간지 아틀란틱(The Atlantic)’에 기고한 글을 통해 왜 많은 미국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조명했다. 올가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명상만을 위해 사찰과 명상센터를 찾는 것이 아닌, 불교에 대해 더 배우고 그 가르침을 통해 각 개인의 정신건강의 향상을 꽤하기 위해 찾는다고 말했다.

 

로스엔젤레스(LA)에 살고 있는 어느 40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경쟁적으로 살아왔던 그는 대기업 고위관리자로 승진하며 주변에서 찬탄 받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꿈꾸었던 직장생활에서의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다. 하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회사에서의 삶에 많은 것을 투자한 그는 성장하는 자녀들도 거의 못 볼 정도로 가정에 소홀했으며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의 짐을 가진 이 아버지는 우선 심리상담소를 찾았지만 기대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조급해하는 그에게 치료사는 불교에 관한 책을 소개해 주면서 명상을 해보도록 안내했다. 그가 소개한 두 권의 책은 데이비드 리코(David Richo)가 쓴 관계에서 어른이 되는법(How to Be an adult in relationships)와 잭콘필드(Jack Kornfield)가 쓴 현명한 마음(The Wise Heart)이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에서 진행하는 불교 명상수업에 참석을 통해 관계에 대한 화두(話頭)에 집중했다.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제 행동과 사고가 종교의 교리와 다른 부분들이 보이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배운 지금, 불교를 통해 배운 이 가르침은 제 삶에 죄책감을 주지 않습니다.”

 

▲ 올가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명상만을 위해 사찰과 명상센터를 찾는 것이 아닌, 불교에 대해 더 배우고 그 가르침을 통해 각 개인의 정신건강의 향상을 꽤하기 위해 찾는다”고 했다. 사진출처: buddhism-in-the-western-countries    

 

 

미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불교

 

 

미국 내에서 불교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기자 출신의 작가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가 쓴 왜 불교가 진실인가(Why Buddhism Is True)2017년 베스트셀러가 됐고 수많은 불교 명상센터들이 미국 전역에 세워졌다. 수십 개의 불교와 관련된 팟케스트가 방송중이며 많은 스마트폰 앱과 음악을 통해 미국 성인 10명 중 4명이 적어도 주 1회 명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DC의 정신건강센터 책임자 휴 버린(Hugh Byrne)지난 몇 년 동안 지역 명상공동체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마음챙김명상 뿐만 아니라 명상의 학문적인 연구들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전까지의 불교는 특정 유명인사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만 인기를 얻었지만, 최근의 추세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게 다가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뉴저지의 다니엘 산체스(Daniel Sanchez)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됐다. 그는 불교는 나에게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알려줬다. 이전까지 나는 고통을 피하는 데에만 집중했고 실패했었다. 하지만 불교를 접한 후 나는 더 이상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잘 다루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산체스는 매일 아침과 밤에 명상을 하며 불교경전을 찾아 읽고 선담(禪談)을 듣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으며 공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전을 통해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을 생각한다. 정신건강만을 위하는 게 아닌,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모습을 배우게 된다.”

 

콜로라도의 명상지도사 갈렌 버나드(Galen Bernard)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인들의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불교의 매력 중 하나로 편안함과 불확실성을 꼽았다. 그는 비구니 스님인 페마 차드론(Pema Chodron)의 가르침을 통해 불교에 입문했다. 불경들과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것들은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후 그는 부정적인 방식을 피하고 편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이야기했고 그런 모습들이 상대방에게 기쁨을 공유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한다.

 

 

 

▲ 서양에 불교를 널리 알린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  

 

데이비드 맥마한(David McMahan)은 프랭클린대학교와 마샬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불교의 독창적인 문화와 맥락을 서양에서는 일부 변형된 해석으로 보고 있다. 불교는 서양인들에게 가치와 도덕을 제공하고 있으며 서양인들은 불교의 철학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하고 있다. 즉 서양인들은 불교에 대해 환생 또는 부처님에 대한 경배를 지지하지는 않다. 그들은 명상과 철학 등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가 되는 일에 집중하고 그 가치를 마른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콜로라도의 명상지도사 오트리 존슨(Autry Johnson)불교를 철학적 바탕으로 배우면서 각자의 삶의 세계관을 보완하기 위해 불교적 활동인 명상과 수행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불교의 일부 영역을 해석하고 인지하는 방식을 뷔페불교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그 유연성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불교의 철학과 수행이 정신과의 여러 치료 방법의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높은 관심을 가질까

 

종말론의 허구에 대한 반성

 

현대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안겨다 준 안락함과 신속함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의 파괴와 맞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핵무기는 전 인류를 단숨에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만한 것이다. 이런 핵무기가 일부 극단론자들에 의해 오용되거나, 컴퓨터가 잘못 작동되어 참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류 생존의 위기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항상 복병처럼 숨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현대를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는 칼로리를 과다 섭취해서 성인병의 발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에 불과하다. 지구촌 도처에서는 영양실조로 어린이들이 2분에 한 명꼴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 편중은 점점 심화되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긴장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 오랫동안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체제로 대립되어 오다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결되었다. 그 붕괴된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새롭게 종교와 결탁한 민족주의가 들어서고 있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종교적 분쟁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팔레스티나 지역, 북아일랜드, 체첸 지역, 동티모르, 아프카니스탄, 보스니아 등은 사실 민족주의의 옷을 입고 종교간 갈등이 표면화 되어 분쟁이 일고 있는 곳이다. 이처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상황,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 현상, 과학문명이 초래한 생태계의 위기를 보고 서구에서는 다시 인류 역사상 미래가 가장 불투명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종말론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M. Nostradamus, 15031566)가 예언한 지구 종말의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문제의 구절은 이렇다.

 

“1999의 해, 일곱번째의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이 구절에 근거하여 전세계 종말론자들은 19997월에 지구 최후의 날이 온다고 주장하고 믿었다. 이에 한국의 공영 방송들도 맞장구를 치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중심으로 흥미 일변도의 종말론을 특집으로 꾸며 방영하였다. 이 특집 방송에서 여러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재배열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내용의 천문학(?)도 함께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무덥고 야릇했던 1999년의 7월도 지나갔고 벌써 세 번이나 7월을 넘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 몰라도 종말론을 믿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허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미 999년에도 1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여 사람들을 일대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서의 이런 종말론은 거의 10년 단위로 있어 왔다고 한다.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19921028일에 지구의 종말이 오고 선택받은 자신들만 산 채로 몸이 하늘로 빨려 올라가 천국으로 간다는, 휴거설을 주장하여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휴거설은 웃지못할 해프닝으로 끝났다.

 

▲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환경 파괴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비극적 종말론은 더 이상 해결책도 위안도 아니다. 사진출처: buddhism-in-the-western-countries    

 

 

그러나 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당시의 잘못된 예언의 결과와 사회적 비판으로 그 자취를 감추기는커녕 아직도 도처에서 종말론을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1995년에는 스위스와 프랑스 및 캐나다에서 태양의 사원(Solar Temple)’의 종말론 신도들이 연쇄적인 집단 자살을 하였다. 또한 19974월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샌디애고에서 천국의 문(The Heaven’s Gate)’이라는 종말론 사교(邪敎)집단에서도 39명이 동반 자살하였다. 당시에 핼리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였는데,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핼리혜성으로 옮겨 타야 한다는 것이 자살의 동기였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집단 자살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고학력 소유의 백인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 공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교집단은 연쇄 자살 사건 이후 당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존하여 그 세력이 유럽 및 캐나다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종말론적 사교집단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증후처럼 보여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집단적 좌절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날로 심해지는 공해와 오존층의 파괴 현상에서 야기된 엘리뇨 현상과 같은 기상변이와 생물의 변종 등을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런 현상에 대한 절망적 좌절감으로부터 종말론 집단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대 뉴욕에서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견이 풍미하였다. 뉴욕 시민들이 집집마다 마차를 소유하게 되자 당시의 미래학자는 장차 뉴욕은 점점 늘어나는 말들의 배설물로 가득차게 되어 일대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그 예견은 빗나갔다.

 

이런 종말론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이 종말론의 근거이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창조와 종말을 알리는 단선적 시간관이다.

 

이처럼 비관론적 종말론에 맞추어 미래를 예견하는 일에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지친 것이다. 물론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환경 파괴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비극적 종말론은 더 이상 해결책도 위안도 아닌 것이다. 서구 사회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행된 지 오래되었다.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믿음보다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종교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순환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종말론에 식상한 현대 서구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인류의 현재 문제나, 앞으로 닥칠 많은 문제들을 종말론적 징후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허구에서 벗어나려는 반성이 깊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에 관한 시대적 요구

 

서구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위해 자연을 인간 위주로 개발해 왔고, 그 결과 자연 환경은 파괴되어 갔고, 생태계는 균형을 잃고 있다. 또한 경제적 풍요를 지향하는 물질문명의 구조는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서구사회의 미래에 대해 젊은 세대들은 낙관적인 전망 대신에 깊은 회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곧 인류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 팽배해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환경 재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른 오존층의 파괴는 날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토양의 오염, 수자원의 오염, 산성비, 지구 온난화, 산림 파괴와 함께 하루에 130여 종에 이르는 생물이 멸종된다고 한다. 더구나 450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굶어 죽어간다고 하니 매우 심각한 환경재앙을 겪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 진행되어 간다면 결국 지구는 5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이성에 바탕을 둔 과학화와 산업화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 진화, 발전한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에 회의를 갖게 하였다. 또한 성장과 진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던 낙관주의적 역사관에 따른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흔들리게 됐다.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이 심각한 상황의 원인을 주로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돌리게 된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인 것인 만큼 과학 그 자체가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 아니고 과학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지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져오게 하였다. 사진출처 : buddhism-in-the-west  


싱거(Singer)와 같은 학자는 윤리공동체를 인간 사회에서 동물 사회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통을 알고 감정을 가진 동물도 윤리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동물 중심적 윤리(ethics of animo-centrism)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존중되어야 하고 윤리적인 배려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생물 중심적 윤리학(ethics of bio-centrism)에서는 윤리공동체의 범위를 모든 생물에까지 확장시킨다.

 

이 정복의 논리를 기독교 세계관이 뒷받침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너희는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지배하라”(창세기 128)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 것이다. 1718세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된 기술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의 회복으로 이해하였으며, 근대의 과학적 진보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획득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지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독교적 자연관과 근대의 데카르트, 베이컨 이래의 이분법적 자연 이해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대상화하는 서구의 자연관은 서구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기술과학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과학은 오늘날 인간을 기술과학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른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마찬가지로 무차별한 자연 개발에 따른 자연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 위기, 자원의 고갈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구의 세계관이 인류를 이처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해결책이란 서구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인류를 암울한 미래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와 세계를 연기(緣起)로 인식한다. 자연 만물의 원리나 본성이 연기되었다는 것은 곧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상호 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이렇게 일체 현상이 상호 의존성에 의해서 성립되었기에 어느 것 하나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것이 있을 수 없고(諸行無常), 연기된 것은 서로서로 존재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으며(一切皆苦), 그리고 독자적으로 생성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독립된 실체로서 독자적 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은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론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란 바로 나의 인식주체인 육근(六根)이 여섯 가지의 인식대상(六境육경)을 만나서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六識육식)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서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론에서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른다. 중생의 개념이 초기 경전에서는 유정(有情) 즉 생명체를 의미하다가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無情), 즉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붓다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란 말은 붓다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되어 간다. 이것은 전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 생태관의 일면이다. 여기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생태윤리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알게 한다. 즉 모든 중생과 나는 서로 뗄 수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을 지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혜의 실천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는 불교의 생태윤리의 기본이다. 이같은 불교의 생태윤리는 생물 중심적 윤리를 넘어 생태 중심적 윤리(ethics of eco-centrism)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개개의 존재는 존재 전체의 일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생태 중심적 윤리공동체는 바로 자연 전체이고 존재 전체와 일치하고 동일한 것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흙에게도 미쳐야 한다. 이 자비의 생태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共存공생(共生)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환경문제가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 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 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서구 사회는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우주와 사물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설정하려고 하는데, 이를 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상화되어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지배와 복종의 주종 관계로 이해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가 인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유기체적 관계로의 발상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발상의 구체화 가능성을 서구 학자들은 연기법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에서 찾고 있다. 더구나 생태주의자들은 서구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불교적 연계의 사고(inter-connectedness)로 변환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미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인 불교의 연기법적 세계관을 서구인들은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인간관과 가치관이 필요해

 

오늘날 서구사회가 물질 만능주의와 철저한 개인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에 대해 불교는 어떤 대안을 갖고 있기에 서구인들이 불교에 높은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서구 자본주의는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자유경쟁 속에서의 생산활동은 오로지 이윤 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서구 중세시대의 장원(莊園: 유럽에서 봉건제도의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지배적이었던 자급자족 경제의 단위. 자연적으로 발생한 촌락을 기초로 하며, 그 가운데서 영주와 예농의 신분관계가 유지됐음)경제체제에서는 이윤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산업들이 가내 수공업의 수준을 벗어나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이 발생하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윤 추구와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이념이 형성됐다.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는 부의 축적을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서구사회에서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타난 신학자 칼뱅(Calvin, Jean, 15091564: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혁자로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수립했음)은 신약성경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을 로마시대 귀족들을 빗대는 말로 해석하였다. 즉 당시의 부자란 귀족으로 태어나서 노예와 농민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칼뱅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하여 번 것은 깨끗한 것이며 누구나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 현대인이 갖고 있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극복하는 ‘더불어 사는 삶’은 바로 보시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 사진출처: 21st-annual-western-buddhist-monastic-gathering

 

선택된 인간만이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데, 구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재산을 모아 잘 사는 부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이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이윤이 신의 축복이라는 논리로까지 발전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의 중산계층인 시민, 상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산업혁명 이후에 칼뱅 사상은 자본주의 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활동은 경제원칙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현금가치화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라난 현대인의 머리속에 과연 어떤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는가. 현대인은 인간성의 파괴나 훼손보다는 물질적인 손해를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비록 인격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해도 돈이 생기는 일은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삶의 목표는 인간 회복, 인격완성이기보다는 보다 풍요로운 물질의 소유에 있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간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이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현대인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덫에 걸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가 되는 인간 부재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은 비단 개인적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에는 적으로 돌아서는 비극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불교만큼 인간 본연의 모습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완성을 지향한 사상은 거의 없다.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보살(菩薩, bodhisattva)이다. 보살에게 있어서 깨달음(bodhi)은 삶(satta)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살은 현재의 삶을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구현하는 지혜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보살이 가는 길로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내세운다. ‘깨달음을 얻는 길이란 곧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 즉, 중생이란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면 생명이 없는 것이든 간에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환경이란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환경이라는 말은 사실 중생이란 말과 다를 바 없다. 중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말을 일체환경 실유불성이라고 바꾸어 놓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웃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혀서 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이상(理想)은 현대사회가 요청하는 생태적 가치관과 생태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대승보살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존재이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낸다.

 

이와 같은 지혜의 실천에서 오는 끝없는 사랑이 자비이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윤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 사이에 기본이 되는 생태윤리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전도(顚倒), 개인주의의 피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 불교의 연기법에 따른, 모든 삼라만상이 자신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결국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은 바로 나와 이웃이 동일체(同一體)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佛國土)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승 보살적인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살은 자신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과 일치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보살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완성하게 하는 길이 여섯 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 인욕(忍辱), 지계(持戒),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보통 육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어 왔으나, 바라밀의 뜻이 완성인 것으로 보아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완성되어져야 할 보살의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완성해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보시(布施)준다는 말이다.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나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바로 보시라고 할 수 있다. 보시는 마치 흐르는 물이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계들이 살 수 있도록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보시를 통해 모든 존재와의 연대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극복하는 더불어 사는 삶은 바로 보시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

(인용출처: 최종석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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