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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음식, 담요를 자녀에게 주는 세상의 어머니들을 존경해”
안젤리나 졸리 美 ‘어머니의 날’ 맞아 NYT 기고…모든 어머니의 롤모델 신사임당
기사입력: 2020/06/19 [16:02]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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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 어머니의 날맞아 NYT 기고모든 어머니의 롤모델 신사임당    

 

유엔난민기구(UNHCR) 고등판무관 글로벌 특사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엔젤리나 졸리(45)가 미국 어머니의 날(510)을 맞아 지구상 가장 강한 사람은 어머니라며 모성(母性)에 대한 존경의 메시지를 보냈다. 졸리는 58(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어머니의 힘이라는 글에서 무명배우 출신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했던 자신의 어머니 마르셀린 버트란드의 헌신과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자식을 키운 뒤에야 느낀 어머니의 애환, 난민 특사로서 전 세계에서 만난 난민촌 여성들이 자식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헌신을 위대한 어머니의 힘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졸리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굶는 아이들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했다. 할리우드 대표 기부 스타답게 금액도 거액이다. 지난 325일 미국 매체 피플등의 보도에 따르면 안젤리나 졸리는 노 키드 헝그리(No Kid Hungry)’ 재단에 100만 달러(12억원)을 기부했다. ‘노 키드 헝그리재단은 굶는 아이들, 학교 급식에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자선단체이다

▲ 코로나19 사태로 굶는 아이들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한 안젤리나 졸리. 사진 출처=VOGUE    

 

졸리는 공식 성명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에서 10억 명의 아이들이 학교 폐쇄로 밥을 먹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2200만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급식 지원에 의존한다. 이 재단은 그런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지원하는 단체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한다며 기부의 의미를 밝혔다.

 

졸리는 2001년부터 UNHCR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2012년부터는 UNHCR 고등판무관 글로벌 특사로 활동 중이다. 국제적으로 봉사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유엔 국제시민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졸리는 10년 동안 자비로 캄보디아, 탄자니아, 파키스탄 등 30여 개국의 난민 캠프를 방문해 사태의 심각성을 널리 알려 난민들이 국제적 원조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자선 활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05년 큰아들 매덕스의 이름을 딴 매덕스 졸리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을 통해 캄보디아 최빈곤층에게 집을 지어주고,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 재단은 캄보디아, 케냐 등에서 난민을 돕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딸의 고향인 에티오피아에는 자하라 어린이 병원을 건립하여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를 치료하도록 돕고 있다. 다음은 졸리의 NYT 기고문 전문.  

 

안젤리나 졸리 예술가가 되고 팠던 어머니의 꿈은 사실 할머니의 꿈이었다

 

어머니의 날은 어머니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날이다. 올해(2020)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너무 많은 이들이 부모를 갑자기 잃었다. 곁을 지키지 못하고, 늘 자신들이 꿈꿔왔던, 받았던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30대에 돌아가셨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죽음이 나를 얼마나 많이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지만 내 안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포근히 안아주던 어머니의 사랑과 따뜻함을 잃는 것은 누군가 따뜻한 담요를 빼앗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오른 손에 작은 문신을 새겼다. 남들이 보면 알파벳 ‘m’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어머니 이름 마셸린(Marcheline)‘m’이 아니라 윈터(Winter·겨울)‘w’.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불러주던 롤링 스톤즈의 노래인데 나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추운, 추운 겨울이었지,” 어머니는 내가 아기였을 때 이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내 코트를 너에게 둘러주고 싶어라는 가사 부분에서 어머니는 내게 담요를 둘러주며 안아주셨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시카고 남부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하셨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는 볼링,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육군이동외과병원, 1972~1983년 방영된 TV 드라마), 베니 힐(영국 코미디언), 그리고 우리 할머니 로이스를 사랑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가 20대였을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남자친구는 할머니를 다이아몬드 루이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할머니가 사교계 명사(名士)여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끼고 마루를 닦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LA)로 이사 가기 전까지 두 분은 볼링장을 운영하셨다고 한다.어머니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좋아했고 잘 웃었다. 내가 우울해 할 때면 록(rock)음악으로 내 안의 열정을 되살려 주곤 하셨다. 존 레넌이 죽었던 날 밤에는 양초에 불을 켜시고는 집 안 곳곳에 비틀스 앨범을 놓으신 적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머니가 공인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기억도 난다.

▲ 안젤리나 졸리의 어머니 마셸린 버트런드(오른쪽)와 아버지 존 보이트(맨 왼쪽)이 1975년 졸리를 임신했을 때 아들 제임스와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할머니)를 잃고 많이 슬퍼했다. 아버지의 외도 사건은 어머니의 인생을 바꿨다. 어머니가 꿈꿨던 가정생활은 모두 불타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어머니임을 사랑했다. 배우의 꿈은 스물여섯에 아이 둘을 키우며 사라져버렸다. 유명한 전 남편은 어머니의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단편영화에서 어머니가 연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연기를 잘 하셨다. 충분히 배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내게 꿈은 그 형태가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예술가가 되고 팠던 어머니의 꿈은 사실 어머니의 어머니(할머니)의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내가 배우가 되기를 꿈꾸셨다. 우리 이전 세대의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꿈을 이루기까지 몇 세대를 걸쳤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그 말이 얼마나 맞는 말인었나 생각하게 된다.지금 윈터를 들으며,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웠고 두려웠을지, 동시에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얼마나 굳건하게 맞서 싸우려 했을지 깨닫게 된다.

 

내 손에 ‘w’ 문신이 지워지면서, 내가 어머니에게 느꼈던 집 같은, 보호받는다는 느낌 역시 서서히 사라졌다. 인생의 굴곡도 여러 차례 맞았다. 나 역시 상실을 겪었고 인생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경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하지만 이제 내가 내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나니 이제야 어머니를, 또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선셋 스트립같은 클럽에서 밤새 춤추던 로큰롤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어머니는 사랑의 상처 후에도 사랑했고 우아함과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제 나는 혼자 있는 게 어떤 건지, 사랑하는 이에게 코트를 걸쳐주는 게 어떤 건지 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호해줄 만큼 강할 수 있다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도 잘 안다. 일단 당신의 인생에 자식이 생기면, 자식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늘 인생의 우선이 된다.어머니의 날을 맞아 나는 이제껏 내가 만났던, 가난 속에 이곳저곳 옮겨가며 살고 있는 난민 어머니들을 생각해본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어머니가 되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기도, 침묵하기도, 파괴당하기도 했으며, 더 비극적인 일들도 겪어야 했다.  

▲ 유엔난민기구(UNHCR) 고등판무관 글로벌 특사로 활동 중인 안젤리나 졸리.사진 출처=VOGUE  

 

난민들을 통해 지구상 가장 강한 사람은 어머니라고 믿을 수 있게 됐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살결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사랑과 애착으로 움직이는 힘이다. 어머니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밖에 줄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은 어머니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아마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이 학대당할 우려가 있을 지라도 위험한 곳에 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어머니이기 때문이다.학대당한 여성은 약한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누군가의 어머니다. 이들은 때때로 꼼짝없는 위험을 감수하려 든다. 이들은 자식의 위험 앞에 선다. 기꺼이 따돌림과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생각은 이렇다. ‘내 자식 말고 나를 때려라. 내 자식 말고 나를 모욕하고 무시해라. 내 자식 것 말고 내 음식을 가져가라.’이러한 여성들은 전쟁이나 난민캠프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새 인생을 찾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앉아 버틸 것이다. 나는 이제껏 만났던 난민 어머니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족 앨범처럼 모두 기억하고 있다. 눈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때 딸들이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자식들을 담요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이는 오늘날 팬데믹(코로나바이러스 세계적 대유행) 속 미국에서조차 더 많은 가정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이 당신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때, 때로는 그러한 이해가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녀들이 커서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지 않고, 불안한 환경에 두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해질 것이다.그러하기에 지금도 마지막 남은 힘, 마지막 음식 한 입, 마지막 남은 담요 한 장을 자녀에게 주면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을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또 혹시 어머니의 날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추억에서 위로와 힘을 찾기를 바란다. 

 

위대한 인물들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어머니가 있다. 세계적인 영웅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이면서 자선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힘이 있었다 

 

나폴레옹 나의 성공과 내가 남긴 업적은 모두 내 어머니 덕택” 

 

높고 험한 산맥을 넘고 수많은 전쟁에서 적()을 물리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후대의 평가는 나뉘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대포적인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나폴레옹은 어렸을 때 키가 작아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군대에서는 부하들을 잘 보살피고 이끌었으며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된 뒤로는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황제가 된 다음에도 프랑스를 유럽 제일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다. 비록 나중에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섬에 갇히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장군이 되어 전쟁터에 나갈 때 말 위에서도, 섬에 갇혔을 때도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를 그렇게 만든 데는 유명한 나의 사전(辭典)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에도 있다

▲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17501836)는 철저한 절약생활로 유명했다. 레티치아는 여가장이나 다름없었다. 레티치아는 36세에 수입이 변변치 못한 변호사의 미망인이 되어 8명의 자식을 키웠고, 1명의 황제와 3명의 왕, 3명의 왕비를 키워낸 어머니였다.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말했다. “내 어머니는 혼자서 모든 결정을 했소.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잘 해내셨소. 모든 것을 지혜롭게, 그 나이의 여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통찰력으로 처리하고 관리했소. 얼마나 대단한 여인이오?”

 

그녀의 절약정신은 유명했다. 황제의 모후(母后)가 된 뒤에도 절약과 저축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소박했다. 절제를 잃지 않고 풍요와 쾌락을 외면했다. “이런 것들에 돈을 써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게는 함께 다닐 사람이 필요치 않아요. 시종(侍從)들과 주마관(走馬官)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잃지 않았다. 자식들, 심지어 황제까지도 그릇된 모습을 보일 때에는 엄하게 꾸짖고 타일렀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그의 속마음을 토로하고 의논하고 계획과 동기를 설명하면서 설득하려고 노력한 유일한 사람, 때로는 나폴레옹의 이해 못할 행동과 황당한 생각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유일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나폴레옹은 어머니가 가장 올바르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여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왕국이라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오. 생각이 치우치지 않아 절대로 틀리지 않아요. 그분의 경험과 조언은 내게 아주 유익해요. 나의 성공과 내가 남긴 업적은 모두 내 어머니 덕택이오.”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에 크게 영향 받은 록펠러10가지 유언을 인생지침으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이면서 자선 사업가로 알려졌다. 현대사에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이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록펠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록펠러가 최대 재산을 보유했던 시기는 1913년이었다. 그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7년 가치를 기준으로 3360억 달러나 된다. 1913년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1.5~2%에 이른다. 이 금액은 미국 역사에서는 물론 인류사를 통틀어 한 개인이 소유했던 재산 중 최고로 통한다. 하지만 록펠러는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 스스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은 드물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록펠러는 아버지보다 기독교 신앙이 깊은 어머니에게 인생을 사는 방식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렵게 자식들을 키웠지만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정직과 근면, 절약을 가르쳤다. 특히 록펠러에게 남긴 어머니의 10가지 유언은 그를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과 부()를 일궈낸 원천이었다. 록펠러 어머니의 10가지 유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지만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4. 오른쪽주머니는 항상 십일조주머니로 하라.

이 말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한 후 나머지를 갖고 필요하면 사용해야 한다.

 

5.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일마다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가능한 빨리 회개해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8.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 된다.

 

10. 예배시간에 항상 앞에 앉아라.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록펠러는 이 10가지 계명을 그의 인생지침으로 삼고 믿음을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형통의 비밀이었다

▲ 존 데이비슨 록펠러    

 

록펠러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성실하고 총명한 젊은이로 자랐다. 어린 록펠러는 집에서 칠면조를 길러 용돈을 벌었으며 감자와 캔디도 팔았다. 이렇게 번 돈을 동네사람에게 빌려주는 사금융 장사까지 했다. 그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작은 접시를 큰 접시와 바꾸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뛰어난 장사수완을 보였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석유왕록펠러는 철강왕앤드루 카네기와 더불어 미국의 현대 기부문화의 형태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이 해체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한 뒤 삶의 좌표를 은둔 대신 사회기여로 설정했다. 이전까지의 삶을 돈을 모으는 데 바쳤다면 이후의 삶은 돈을 쓰는 데 정열을 쏟았다. 1913년 록펠러재단을 만들어 기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록펠러는 기업인 출신답게 돈을 쓰는 데도 치밀하게 접근했다. 좋은 일에 쓰라며 돈을 무작정 기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사회복지사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관에 목적을 부여한 것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미국식 기부의 원조다. 목적 있는 사업을 위한 체계적인 기부를 함으로써 미국식 현대적 기부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각종 기관과 학교 등에 사업과 연구 자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뤄갔다.

 

록펠러는 대표적인 크리스천 기업인이다. 그는 미국 침례교회 교단(ABCUSA)에 소속된 북장로교회의 열렬한 신자였다.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결혼생활도 평탄했다. 청교도의 후손인 로라 스펠만(1839~1915)을 만나 1864년 결혼해 해로했다. 록펠러 부부는 다섯 자녀를 뒀다. 기독교 신앙은 록펠러의 일평생에 걸쳐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자신의 성공에 기독교 신앙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이 록펠러라고 할 수 있다.

 

록펠러는 1937년 플로리다주의 휴양지에서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탓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간 젊은 벤처 기업인의 일생은 많은 귀감을 준다. 록펠러는 86세가 되던 해에 낸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어려서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함께 배웠습니다. 내 일생은 일과 놀이로 가득 찬 하나의 길고 행복한 휴가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걱정이란 것을 길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매일 내게 잘해주셨습니다.”

 

신사임당은 모든 어머니의 롤모델이 시대 우리가 배워야 할 어머니의 표상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남성 중심의 조선시대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글공부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을 보였으나 서당에서의 정식 교육 대신 집안에서 살림에 필요한 것들만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꾸준히 그림과 글을 훈련하며 재능을 갈고 닦았다. 나아가 그의 재능과 열정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져서 역사상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난 인선(신사임당)은 일찌기 생원이었던 외할아버지 이사온(李思溫)의 글 지도로 천자문(千字文)을 모두 깨우치고 사자소학(四字小學)마저 쉽게 독파할 수 있었다. 사임당의 이런 영특함을 보면서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점이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흔히 결혼한 여성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혼한 여인은 친정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풍습이 흔했다. 이 풍습은 조선시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남아 있었다. 사임당이 어린 시절을 와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결혼 풍습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한 사임당이 결혼한 이후에도 친정에 머물 수 있었기에 그녀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펼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그런 평범한 아낙네였다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를 짓는 그런 창작 활동이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남편이 아내 사임당의 그런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펼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 신사임당의 탄생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던 조선 시대에 태어난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서당에 가서 교육을 받는 대신 집안 살림에 필요한 것들만 배워야 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재능을 키워 나갔다.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모두 남자요, 부인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부인이면서도 그림을 잘 그려 신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분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사임당 신씨 뿐이다.”

조선 영조 때에 홍문관 수찬(修撰), 암행어사 등을 지낸 홍양한(洪亮漢)이 신사임당의 그림을 칭송하며 남긴 말이다. 그동안 자식 교육을 잘 하고 남편을 열심히 내조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신사임당은 그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나 빛을 보면서 예술가로서 재평가 받게 된다.

 

신사임당은 일곱 살 때부터 조선 4대 화가로 손꼽히는 안견의 그림을 모사(模寫)하며 그림에 대한 재주를 드러냈는데, 특히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해서 그린 초충도(草蟲圖)’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를 본 숙종은 풀이랑 벌레가 실물과 똑같구나. 부인의 솜씨가 이처럼 묘하다니…….”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글씨 쓰기도 즐겼는데 그 글씨체가 깔끔하고 단아하여 후대에 신사임당의 글씨체를 따라 하는 사임당 서파도 생겨나기에 이르렀고,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어머님 그리워라는 두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시((() 모두에 뛰어났던 신사임당은 요즘 말로 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 당시의 표현으로는 삼절(三絶)’이라 불리며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예술적 경지를 개척한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현명한 조언으로 남편의 사회생활을 도왔고, 43녀의 일곱 자녀를 낳아 길렀는데 이중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되었다. 또한 큰딸 매창은 예술가로 시(((수예 등에 능하였고, 넷째 아들 이우 역시 학문과 시··화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어요. 어릴 때부터 논어, 맹자등을 가르친 어머니 신사임당의 노력 덕분에 자녀들도 높은 학문적 경지에 이룰 수 있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로 칭송받는 율곡을 키워 낸 어머니, 현모양처, 오만원권 화폐 그림의 주인공,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화가 등 신사임당을 칭하는 수식어는 매우 다양하다. 신사임당이 살아온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그의 이미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번 그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많은 이야기와 교훈을 전달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신사임당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와 교훈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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