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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34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0/09/02 [20:47]
불교의 남방 전파: 스리랑카 경유, 동남아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34

불교의 남방 전파: 스리랑카 경유, 동남아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0/09/02 [20:47]

 

▲ 아소카 칙령 13호에 의하면, 아소카 대왕의 교법이 남인도에서 헬레니즘 지중해까지 미처 전파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교의 남방 전파
: 스리랑카 경유, 동남아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

 

불교가 인도 밖으로 전파되는 데는 아소카 대왕(기원전 304232, 재위268232)의 전쟁승리와 불교로의 개종(改宗)이 큰 힘이 됐다. 아소카 대왕은 칼링가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면서 인생관에 대전환점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등극 8년째가 되던 해에 동부 해안 지역인 칼링가를 점령함으로써 인도 아 대륙을 천하 통일하는 데 성공했으나, 사람을 너무나 많이 죽였고, 이로 인하여 내면의 갈등을 느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부처님께서 설파한 중도사상에 매료됐고, 극단적인 사고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 강한 신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마하왕사(大史)아소카와다나, 아육왕전)에 의하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수습하여 84천 불탑과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 아소카 대왕 때 세워진 탑 가운데 하나가 산치대탑이다.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대왕 때, 세워진 산치 대탑의 중앙탑.  

 

아소카 대왕은 84천개의 탑을 세우고 절을 세우면서 불교를 장려했고, 인도 아 대륙만이 아닌 인도 밖의 다른 나라에도 불교 전도승을 파견하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이런 내용은 그가 세운 아소카 대왕 칙령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체계적인 다르마(dharma )가 필요했다. 이미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고 난 다음에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1차 총회가 열렸고, 또한 2차 결집회의까지 열린 바 있었지만, 아소카 왕 시대가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상당한 변화가 왔던 모양이다.

 

아소카 대왕은 당시 승가의 최고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던 목갈리뿌따띠싸(Moggaliputtatissa:기원전 327247) 대장로의 자문을 받아서 제3차 불전결집 대회를 열도록 후원했다.

▲ 아소카 대왕이 목갈리뿌따띠싸 대장로를 찾아가서 불교 전도를 위하여 불전결집을 주도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때에도 불교승려를 가장한 가짜승려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가짜 승려 6만 명을 추려내고 진짜 비구들만이 모여서 부처님의 정법을 결집하는 제3차 승가총회를 개최하고 상좌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목갈리뿌따띠싸 대장로는 당시에 최고의 큰스님이었고, 불교논리에 해박한 학승이기도 했다. 이때 목갈리뿌따띠싸 대장로는 까따와뚜(Kathāvatthu,論事)를 편찬했다. 이 책은 남방으로 전해진 상좌부의 삼장(三藏:경율론)가운데, 논장 7서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23() 217논으로 구성되었고, 각 부파간의 이설을 토론하여 상좌부의 정통성을 확립한 정법정론으로 평가 받는다. 이로써 불교전도의 정법 내용이 확실하게 체계화되고 이 정통교설이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소카 대왕은 국책 프로젝트 사업으로 불교 전도단을 구성하게 되는데 9개 지역을 선정하여 각 지역마다 5명의 비구와 기타 필요한 물품과 후원인력을 보냈다. 이 때가 아소카 대왕이 등극한지 18년째 되는 해였다. 9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 섬에는 마힌다 장로, 카슈미르와 간다라에는 마지한디카 장로, 남인도 마히사만달라(마이소르)에는 마하데바 장로, 와나와사에는 라키타 장로, 서부인도 그리스 식민지에는 담마라키타 장로, 마하라쉬트라에는 마하 담마라키타 장로, 지중해 그리스 국가에는 마하라키타 장로, 히말라야는 마지히마 장로, 수반나부미(하버마와 태국)는 소나와 우타라 장로를 파견했다.

 

이제 인도불교의 남방전파에 대한 본론을 전개한다면, 스리랑카로 전해진 인도의 원형불교가 결국 동남아시아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버마나 태국에서는 아소카 대왕 당시에 인도의 원형불교가 지금의 하 버마와 태국 남부 반도인 몬족들에게 전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미얀마나 태국 불교 전통은 중세시대 스리랑카에서 전해진 불교란 사실이다.

 

하 버마나 태국남부 지역 또는 캄보디아 지역에 몬족이 있으나 거의 소멸했고, 동화되었다. 그렇지만 하 버마에는 지금도 몬족이 있으며 소수민족이긴 하나 몬족 전통의 불교가 있고, 버마에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전에 몬족 승려들에 의한 불교가 존재했음을 미루어 볼 때, 고대 인도에서 전해진 불교전통이 희미하게 살아 있었고, 결국에는 거의가 지금의 미얀마나 태국 불교에 흡수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스리랑카 섬나라에 전해진 불교가 지금의 동남아 불교가 되었는데, 마힌다 장로는 바로 아소카 대왕의 아들이었다. 아소카 대왕이 불심이 돈독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정법으로 정치를 하려고 했기에 그는 여러 아들 가운데 비구로 출가하도록 했으며 이 가운데는 딸도 출가했는데, 그녀가 바로 상가미따라고 하는 비구니이다. 상가미따 비구니는 마힌다 장로보다 1년 후에 다른 열 명의 비구니와 함께 부처님 성도지 보드가야에서 보리수 가지를 꺾어서 함께 스리랑카에 가서 비구니 승단을 형성하게 된다.

▲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아소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    

   

섬나라인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는 왕성하게 발달했으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 경전어(經典語)의 문자화(文字化). 본래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은 구어(口語)로서 글자가 없는 빨리어였다. 승려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암송해서 구송(口誦)으로 전승해갔는데, 아소카 대왕 시대 불교전도단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암송해서 머릿속에 담아가서 구송으로 전파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잘 발전하다가 가뭄이 들고 흉년이 되자 절에 비구들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놀란 한 현명한 장로비구가 구송으로 전해지는 삼장(三藏)을 스리랑카 문자로 기록하여 활자화하는데 성공했는데 이것이 패엽경이라고 하는 형태이다.

▲ 스리랑카에서 제작된 패엽경.

 

오늘날 인도의 원형불교가 살아남게 된 배경가운데 하나가 불교경전인 삼장이 활자화되어 보존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에 보존됐던 삼장은 미얀마와 태국 캄보디아로 전해지면서 각 나라 문자로 역경이 되어서 오늘날 인도에서 결집했던 삼장이 유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스리랑카에는 불교가 몇 차례 시련을 겪게 되고 한동안 맥이 단절되는 등, 우여곡절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인도원형불교인 상좌부 불교 전통이 되었지만, 거의 12세끼 까지만 해도 인도 벵골 만을 통해서 대승불교인 밀교가 미얀마와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광범위 하게 퍼져나갔다. 그런데 정작 인도에서 이슬람의 침입으로 불교가 망하자 이들 나라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12세기 이후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인도양과 벵골 만을 가로질러서 동남아시아에 전파하기에 이르러서 지금과 같은 상좌부 전통이 뿌리박게 되었다.

 

한편 스리랑카는 섬나라 내에서의 전쟁과 16세기부터 밀어 닥치는 포르투갈 화란 영국 등의 기독교 선교에 불교는 맥을 잃고 말았다. 물론 아주 이른 시기에도 인도에서 대승불교 전통이 한동안 유입되기도 했으나, 줄기차게 상좌부 전통을 유지했었는데, 16세기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무역전쟁에 불교가 피폐해져버리는 비극이 오고야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12세기부터 미얀마 태국에 전해줬던 상좌부 불교가 이 지역에서 살아남았고, 전성을 이루고 있었던 덕분에 19세기에 다시 태국과 미얀마에서 상좌부 전통의 계맥을 이어온 것이다.  

▲ 스리랑카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불교축제의 모습을 화란인 화가가 그린 그림(1672년).  

 

지금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불교 종파가 있는데, 가장 큰 종파는 태국에서 나머지 두 개의 종파는 미얀마에서 다시 계맥을 전해 와서 승단을 다시 복원하게 됐다. 기독교의 스리랑카 선교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기보다는 실패에 가깝지만 불교와 기독교의 교류측면에서는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그것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영국의 관료 학자들이 불교라는 종교를 발견, 제자리를 찾는데 협력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업적은 빨리 삼장의 영역화이다. 빨리어로 된 경율론 삼장을 영어로 번역하고 영어권 학자나 일반인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차회에서 좀 더 소개하기로 하겠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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