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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성립과 발전(上)향교의 역사와 교육과정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6/11 [09:29]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학-관료 제도 정착 위한 향교교육 필요

향교의 성립과 발전(上)향교의 역사와 교육과정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학-관료 제도 정착 위한 향교교육 필요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6/11 [09:29]

<연재순서>

()향교의 역사와 교육과정

() 향교의 기능과 입지, 공간구성

()향교의 사회교화기능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학-관료 제도 정착 위한 향교교육 필요

 

향교의 역사와 문화는 성균관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학의 범주라는 점에서 깊은 관련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학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에 최초로 태학을 세워 태학박사를 두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29(374)에 고흥이라는 사람을 박사로 삼았다는 기록과 함께 5경박사라는 명칭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국립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 지금의 경주향교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조선 성종 23년(1492)으로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신라는 진덕여왕 2(648)에 김춘수가 당나라의 국학을 찾아 석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여 신문왕 2(682) 6월에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성덕왕 16(717)에는 태감 김수충이 당나라로부터 공부자(孔夫子)10() 72제자의 영정(影幀)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의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奉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고대 학교는 기록에 따르면 이미 397(고구려 소수림왕 7)에 태학과 경당이 세워졌고, 682(신라 신문왕 7)에 국학이 있었다. 이들 태학과 국학은 관학으로서 중앙의 소수 귀족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귀족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관학의 설치가 각 지방으로까지 확대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958(고려 광종 9)에 과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과거를 통한 관료 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 각 군현에 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312목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향교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군현 단위까지 국가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향교 명칭 사용은 1220(고려 고종 8)에 창건한 백령향교가 효시

 

지방의 향교는 오늘의 공립중고등학교 정도의 격을 가진 교육기관으로 전통시대 우리나라 교육의 중추였다. 지방의 교육이 최초로 제도화 된 것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각 지역에 성립한 경당(扃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향교의 설립은 고려 태조 13(930)에 평양에 학교를 세워 6부생을 가르치고 문묘(文廟)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이다.

 

향교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기는 1220(고려 고종 8)에 창건한 백령향교(白翎鄕校) 처음이라고 하고 이후 대체적인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나 학서(學序), 상숙(庠塾), 주학(州學), 학교(學校), 이상(里庠), 향학(鄕學), 학궁(學宮) 등으로 불리워 지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교육의 중앙집권적 경향은 향교 운영에서도 나타난다. 중앙 조정은 지방 군현 단위별로 향교를 설치를 강조하였다. 향교의 설립과 운영 실태를 수령의 가장 고유한 임무 중의 하나로 제도화하여 그들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동시에 향촌사회에서의 수령권 강화를 위해, 고을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과 수령을 함부로 교체하지 않고 정해진 기간 동안 안정되게 근무할 수 있도록 근무 기간을 보장해주는 구임법(久任法) 등을 시행하여 향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수령에게 향교의 교수와 학생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함으로써 교육의 중앙 집권화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1488(성종 17) 무렵에는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가 하나씩 설립되고, 조정에서는 각 향교에 교수를 임명하여 교육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에 이르자 향교교육은 이미 그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만한 교수요원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정에서는 향교 교수직에 과거 급제자를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은 이른바 출세가 용이한 중앙부서에 청요직(淸要職)만 선호하고, 지방의 한미한 향교 교수직은 기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향교 교수의 자격도 차츰 낮아져서 결국에는 자격 없는 인물들이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향교의 교수 중에 유학 경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고, 그 수준이 학생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향교 교수들의 수준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학업에 뜻이 있는 많은 선비들은 향교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대다수 고을의 향교에서는 교육활동이 사실상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향교교육이 무력화되었다고 하여 향교의 사회적 기능까지 완전히 정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중인이나 평민에 해당하는 비양반 계층에게 향교는 신분상승의 통로로 적극 활용되었으며, 교육 외에 향교의 주요 기능이었던 의례적 기능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다.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면제(軍役免除)라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중인이나 평민들은 군역 면제를 통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향교 교생이 되고자 하였다. 반면, 양반들은 굳이 향교 교생이 되지 않더라도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교육의 질도 담보되지 않으며, 비양반 계층이 교생으로 들어오면서 향교의 구성원의 신분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 고려 성종 6년(987년) 8월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이는 나주향교. 이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대성전의 건축 양식이 조선 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유풍을 진작시키고 아울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지방의 학교 즉 관학을 의미한다. 향교가 언제 어디에 처음 설립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사학교조(學校條)仁宗五年三月 詔諸學 以廣敎導...” 즉 제주(諸州)에 학을 세워 도를 가르치라는 기록으로 볼때 인종 5(1127)에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향교 설립의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이때가 향교 설립의 처음이 아닌 것은 이미 인종 재위 이전에도 5개교의 향교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향교 교육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 충렬왕때 강릉 안렴사 이승인이 화부산 연적암 아래에 문묘를 창립하자 전국의 각 군현이 그 뒤를 따라 문묘를 만들어 어느 정도 발전을 보이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병란을 위시한 각종 내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각 지방의 향교가 크게 쇠퇴 하였다.

 

고려의 향교제도는 중국의 향교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공자를 성선으로 배사(配祀)하고 있다. 이를 조선시대 향교에도 계승되어 향교는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점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조실록에 농상(農桑)은 왕정의 근본이요,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다, 즉위 이래 여러 번의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어키는 뜻을 보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교이념의 보급을 위해 향교 설립을 왕이 직접 명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흥학 책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대부분의 향교가 태조부터 세종조 사이에 건립을 보게 되었고 세종 17(1488)까지는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어 8개도에 329개소의 향교가 설립되어 거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분포되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18년에는 335개소의 향교가 기록되고 있다. 목사가 부임을 하면 3일 안에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고 명륜당에 선비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관찰사가 주·현을 순시할 때도 이와같은 행보를 보였다.

▲ 김홍도의 ‘서당’ 풍속화     © 매일종교신문

 

조선중기 이후 서원 등장까지 800여 년 동안 국가인재양성 및 풍속 교화

 

유학자나 평민이 향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교생 10인 이상이 입학할 사람의 지학(志學)을 추천해야 했다. 그 다음에 소학(小學)과목을 강()해서 조통(粗通) 이상의 등급을 받아야 가능하였다. 향교의 교재, 수업방식과 벌, 휴가와 방학에 관한 것이다. 향교의 교재는 대부분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가례(朱子家禮)또는 의례(儀禮)가 교재로 채택되었으며, 수업은 1교시는 이전에 배운 내용을 강()을 통해 복습하고, 2교시는 새롭게 배운 내용을 토론을 통해 익혀 나가는 것이었다. 한편, 수업 중 집중하지 않거나 졸거나 할 때에는 회초리 또는 과제를 부과하는 벌이 가해졌다.

 

향교의 휴가 횟수는 각 지방향교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방학 또한 정기적인 것이 아니라 농번기나 흉년이 들었을 때 수시로 하고 있었다. 향교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인 문묘참배 행사가 있었고, 교생이 기상(起牀)하여 아침식사를 하기까지는 세 단계를 거치고 있었는데, 침상에서 일어나는 단계,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를 하는 단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단계였다. 식당을 출입할 때는 식당에 온 차례대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자 순으로 식사를 하여 장유유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교생이 수령, 사장, 향로, 선달(守令, 師長, 鄕老, 先達) 등을 대할 때는 교관과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조선 초기에 향교설립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통치이념이 바로 유교사상이었고 향교 설립을 통하여 유교 이념을 실현하고 왕의 지방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향교는 조선중기 이후 서원이 등장하면서 교육적 기능이 감소되기는 하였으나 고려중기 이후 조선말기까지 800여 년 동안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문묘선현에 봉사하고 국가인재양성 및 지역사회의 풍속을 교화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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