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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노랑나비와 인생의 최고 행운

신민형 | 기사입력 2021/07/13 [00:02]
하늘소풍길 단상

행운의 노랑나비와 인생의 최고 행운

하늘소풍길 단상

신민형 | 입력 : 2021/07/13 [00:02]

 

수십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행운의 노랑나비가 이젠 광교산, 호수공원 산책 때마다 나를 찾아온다. 코로나 4차 유행으로 사실상 외출금지령 내렸으니 얘들과 놀아야겠다.

 

젊은 날 세월, 뭔 욕망에 대한 갈구로 하염없이 노랑나비의 행운을 기다렸던 걸까? 이런 생각들을 느긋하게 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최고의 행운 아닐까.

 

<하늘소풍길 단상 후기>

-자아도취의 자뻑’, 반성과 참회의 자학을 벗어나게 한 노랑나비 행운

 

광교산과 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간혹 끄적였던 단상을 두달 여 쓰지 않았다. 쓰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단상 쓰기에 한창 열심일 때와 비교하면 너무 마음이 편해져 마음을 정리하고 위로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편 마음 편하니 이것저것 카메라에 담으며 카톡 등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런 단상이 너무 많이 쌓여 그를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은 이유도 있다.

 

100수 넘기신 친구 어머니의 빈소 조문, 먼저 떠난 친구 딸 결혼 축하를 비롯해 손주 셋 포함한 아홉 가족 남해 여행 등은 하나하나 많은 생각을 떠올렸고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 아내 걷기 독려 위한 호수 산책길, 한여름으로 가는 광교산 변화 관찰, 9가족의 남해여행 등 하나하나 스마트폰에 담아놓은 사진들은 모두 단상의 좋은 소재였다. 그러나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것들이 '자랑'이나 '자학'으로 포장되는 것 같아 두달여 단상정리를 하지 못했다. 노랑나비의 행운을 다시금 깨달기 전에는...     © 매일종교신문

 

오전 일 마무리하고 광교산 갔다가, 저녁엔 아내의 걷기 독려를 위해 호수산책을 함께 하는 일과에서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쌓였다. 한여름 다가서며 아카시아와 연꽃 피고 지고, 보리수 열매 익어 사람들 손길에 사라지는 모습, 고사목에 무성하게 자라나는 단풍잎 등을 보면서 수많은 상념들이 스쳐갔다. 아마도 생활이 고통스러웠다면 그 속에서 위로와 낙을 찾는 작업이 이루어졌을 하나하나의 장면이다. 숲속 거닐고 앉아 있다가 벌레에 두차레 물려 병원서 주사맞고 일주일씩 고생하던 건 니나칠수 없는 대사건이랄 수도 있다.

 

가만 따지고 보면 그사이 사소한 일로 인한 마음의 번거로움도 한번쯤 관찰하고 정리할만한 단상이었다. 지나고 나면 하찮은 일들이지만 눈앞에 닥치면 성가시고 귀찮은 게 일상생활들이다. 경영이랄 것도 없는 신문 유지책 구상, 종합소득세 절세 요령을 연구하다 보면 내가 만드는 종교신문의 의미, 한걸음 나아가 삶의 의미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는 일과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통 크게 마음을 먹는다지만 하찮고 사소한 매듭에 휘말린다.

 

건강한 산책과 명상. 그리고 기도로 다 극복했다고 믿던 일상생활의 번민이 불현듯 꼬여진 매듭으로 등장한다. 무언가 부족하고 아쉽고 꺼림찍하여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풀어버린 고르디아스 매듭과 같은 거라 생각하면서도 주어진 칼로 내쳐치질 못한다. 생로병사를 초탈한 경지라 잠깐 자부하는 순간에도 사소하고 막연한 불안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상 정리, 매듭 풀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두달이 휙 지나갔다. 쓰려고 하는 절실함이 부족했고 너무 많은 메모 거리에 정리할 엄두를 못낸 이유 이외에도 쓰지 않고, 쓰지 못한 이유가 더 있다.

 

글쓰기는 포장이다. 단상 정리와 매듭 풀기를 위한 포장을 해야 하는데 그 포장이 자아도취의 자뻑’, 혹은 반성과 참회의 자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테마는 부지불식간에 자랑으로 드러내는게 되었고 또 다른 주제는 성찰과 자의식 과잉으로 자학의 지경까지 이르렇다. 상극의 포장 모두 역겹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러다가 산책 때마다 찾아오는 노랑나비를 보며 자아도취의 자뻑’, 반성과 참회의 자학을 벗어난 자유를 생각하게 됐다.

 

지난해 이곳 광교로 이사와 난생처음 노랑나비를 보며 느낌 감회가 다시 떠올랐다. 평생 행운의 노랑나비를 기다려 오다가 막상 노랑나비를 보는 순간 기다렸던 행운의 실체는 없었고 바로 그 행운이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은 거였다. 

 

그리고 노랑나비를 보며 다시금 그 깨달음을 되새김으로써 풀리지 않는 매듭을 단칼에 내려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자뻑자학을 벗어난 단상의 포장을 만든 것은 아닐까. 여하튼 노랑나비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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