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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②아소카 대왕 전쟁과 살생 후회, 불교로 개종 전도 결심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1/10 [08:23]
죽은 형의 아들 니그로다 비구에게 감명,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 만나 존경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②아소카 대왕 전쟁과 살생 후회, 불교로 개종 전도 결심

죽은 형의 아들 니그로다 비구에게 감명,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 만나 존경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1/10 [08:23]

죽은 형의 아들 니그로다 비구에게 감명,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 만나 존경

아소카 대왕 아들 딸, 스리랑카에 불교전파 현재까지 불교전통 살아남아

 

오늘날 불교는 출생지인 인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불교 발생지인 인도 마가다에서 인도 대륙 남단 스리랑카 섬에 전해진 불교는 지금도 건재하다. 23백년의 불교 역사를 자랑하는 스리랑카 불교는 본바닥 인도에서 해내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해 내고 있다. 첫째는 입으로 전해오던 삼장(三藏, 경율론)을 문자화하여 띠삐따까(Tipiṭaka)로 완성했는데, 영어식으로 해석한다면 Triple Basket(3부로 된 바구니)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불경집(佛經集)을 말한다. 후대에 많은 경전(經典)이 집대성되었지만, 초기불교의 순수한 불경은 이 삼장(띠삐따가)이 기초가 되고 있다.

▲ 아소카 대왕 때의 불교 전도(傳道) 지도(기원전 3세기).   

 

불교는 현재 4대 경전어(經典語 canon)가 존재한다. 불교 4대 경전어는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불교한문이다. 붓다 샤카무니의 설법체계가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어는 빨리어(Pali)였다. 빨리어는 붓다 당시의 인도 마가다 지역의 상용어였다. 빨리어는 인도아리아어군의 쁘라크리트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쁘라크리트어군은 베다 산스크리트어가 각 지역에 퍼지면서 방언화된 인도아리아 방언어들의 총칭이다. 빨리어는 성전어(聖典語)라는 뜻이다. 붓다의 설법이 빨리어로 구전(口傳)되다가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기록되어서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는 현재에도 실제로 불교 신행 활동에 사용하는 주된 언어이다.

 

빨리어는 고유 문자가 없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문자로 기록되었다. 상좌부 불교 전파에 따라 싱할라어, 태국어, 라오어, 버마어, 크메르어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근대에는 서구에서 로마자로 표기하였다. 이중 가장 오래된 싱할라어 사본들을 우선시하며, 학술연구에는 로마자 표기를 많이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사어화(死語化)된 언어이지만, 학술적으로는 중요한 경전어로 연구되고 있으며, 남방 상좌부 비구(승려)들은 율장(律藏)의 계본(戒本,Pāṭimokkha)을 빨리어로 암송하고 있다. 계본은 비구가 지켜야 할 계율에 관한 조항을 모아둔 것으로 빠띠목카라고 하는 대승불교권에서는 목차(木叉)로 줄여 부르거나, 계본(戒本)이라고 한다. 다른 경전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인도 마가다에 머물러 있던 붓다의 가르침은 아소카 대왕을 만남으로써 인도 대륙의 여러 지역과 스리랑카에 전파되는 기회를 갖게 됐다. 아소카(기원전304232)대왕은 붓다가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 죽음)한지 200년 후쯤 태어나서 인도 아 대륙을 통일한 대왕이다.

▲ 제3차 불교 경전결집회의에 참석한 아소카 대왕이 목깔리뿌따 띠싸 대장로(당대 승단최고지도자)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아소카 대왕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황제로서 인도 아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전륜성왕으로 까지 일컬어진다. 아소카 시대 마우리아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참회하는 뜻에서 자비의 종교인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과 탑을 세우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소카 대왕의 내력은 아소카와다나Ashokavadana(阿育王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아소카 대왕이 불교로의 개종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왕궁이 있던 도시의 길거리에서 걸식을 하던 한 비구의 두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모습에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왕자의 난 때, 자신이 죽인 형의 아들이었다. 아소카 대왕은 즉각 법명이 니그로다인 그에게 믿음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니그로다 비구는 아쁘라마다(Apramāda)라고 하는 명상 수행법을 알려주었다. 아소카는 깊은 감동과 인상을 받고 니그로다 비구에게 은화 40만 잎과 매일 쌀 8인분을 공양하기로 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그 도시 안에 있던 사원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고, 아소카 대왕은 니그로다 비구의 안내로 당대의 최고의 선지식(승단 지도자)인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를 만났고, 자연스럽게 아소카 대왕은 영적 스승인 목갈리뿌따 띠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아소카와다나에 의하면 많은 스토리가 있다. 짧은 지면에 일일이 다 소개 할 수는 없다. 불교로의 개종을 한 다음, 불교 전도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일별해 보자. 아소카 대왕이 당시에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던 바라문교, 자이나교, 아지비카 종교 등이 있었지만,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경도되었다.

 

아소카의 할아버지는 자이나교, 아버지는 아지비카교를 신봉했었지만 그 자신은 바라문교나 자이나교로부터 불교를 택했던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비와 지혜였다. 그가 칼링가 전투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고, 15만 명의 포로를 노예로 만든 데에 대한 일말의 후회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 할 때, 형제의 난 때 친형을 살해했고, 살해한 친형의 아들인 조카가 출가하여 붓다의 승단에 귀의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화를 찾은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던 것 같다.

▲ 산치 대탑(大塔), 중앙에 있는 사리탑은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대왕 때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인 마하왕사 Mahāvaṃsa 大史)란 책이 있는데, 5세기경 빨리어로 쓰인 일종의 서사시이다. 스리랑카의 건국이 있었던 기원전 543년 인도 벵갈 서부의 라르 지방으로부터 비자야 왕자가 스리랑카로 왔을 때(277304)부터 아누라다뿌라 왕국의 마하세나(Mahasena) 왕의 죽음(302)까지 스리랑카 역대 왕들의 이야기를 빨리어로 읊은 서사시로써, 서기 5세기경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마하비하라(大寺) 사원의 승려가 지은 일종의 역사서이다.

 

마하왕사아소카와다나에 따르면, 아소카 대왕은 불교로 개종하여 붓다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던 8곳 중 7 곳 군데에서 수집한 사리를 분골하여 84천 사리탑을 인도 전역에 세우고 불적지를 순례하고 제3차 경전결집을 후원하고 불교 전도단을 파견하기로 작정하여 실행에 옮겼다.

 

불교 전도단 파견은 불교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아소카 대왕의 불교 전도가 없었다면 불교의 역사는 어쩌면 인도 아 대륙 내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가정을 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9개 지역에 불교 전도단을 파견했는데, 스리랑카에는 아들 마힌다(기원전285205) 비구를 직접 보냈다. 스리랑카 섬의 왕통사(王統史)라고 할 수 있는 디파왕사, Dīpavamsa,(島史)마하왕사(大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보다 상세하게 소개하겠다. 아소카 대왕은 아들만이 아니고 딸인 비구니 상가미따(Saṅghamittā, 慈僧, 기원전 282203)를 보내서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단을 개설하도록 했다. 마힌다가 빨리 경전을 구송으로 전했다면, 상가미따는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했던 장소의 보리수 가지를 직접 가져가서 이식했으며 11명의 비구니들이 스리랑카에 가서 여성들에게 비구니 계맥을 전수해서 비구니 승단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비구니 승단은 중세시대에 단절되어 천여 년 간 비구니가 없었는데, 19996128일 인도 녹야원(사르나트)에서 한국불교승단에서 비구니 계단을 부활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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