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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참으로 살만한 세상이다

박길수 | 기사입력 2022/04/14 [12:12]
盡人事待天命의 차분한 마음, 生滅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

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참으로 살만한 세상이다

盡人事待天命의 차분한 마음, 生滅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

박길수 | 입력 : 2022/04/14 [12:12]

오랜만에 딸과 엄마를 목욕시키기로 했다. 욕조 의자에 아내를 옮겨놓고 딸이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나 혼자 아내 손과 발, 그리고 등과 배에 낀 때를 열심히 문질렀다. 온몸에 연신 따끈한 물을 뿌려주면서 얼굴과 목도 살살 문질러댔다. 딸이 들어와 비누로 마무리만 했다. 머리는 저번에 가위로 짧게 잘랐기 때문에 따로 말려줄 필요가 없어서 바로 침상으로 옮겼고. 나는 아내의 젖은 면 목줄과 목관 면 거즈를 갈아주었다. 새 위생 매트와 기저귀를 깔아주고, 아내가 좋아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핑크 무늬 면 환자복을 입혀주었다.

 

거의 2주만에 목욕을 시키고 났더니, 아내는 한결 개운한 듯 무척 차분하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감추고 있던 긴장이 나도 풀렸던 모양이다. 소꿉놀이를 하듯 그녀 침상 옆 방바닥에 내 자리를 따로 나란히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손을 뻗어 아내 손을 살포시 잡고 누웠는데. 나도 모르게 잠깐 곤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푹 잔 듯 온몸이 개운하다. 내 사랑하는 천사는 여전히 편안하고 느긋한 모습을 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똥말똥 뜬 두 눈은 저 신비로운 우주를 유영하는 희망의 여신이 깜박이는 그 까만 눈동자와 똑같았다.

 

2주전 아내는 갑자기 기침을 했었다. 그녀 목에서는 가래도 심하게 끓었다. 석션할 때 그만 실핏줄이 터졌던 모양이다. 가래와 함께 목에서는 피가 덩어리져 따라 나왔고, 덩달아 아내 온몸은 불덩이였다. 입안을 닦아줄 때 생긴 상처로 세균에 감염된 아랫입술은 마치 필러 성형한 듯 심하게 부풀어 올랐었다. 거의 열흘 간 아내와 나는 완전히 전쟁터 속에 있었다.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신세와 매우 흡사하거나 오히려 더 한 듯 했다.

 

귀신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놓지 않으면 산다. 먼저 곪았던 아랫입술이 항생제의 적기 투입으로 다행히 많이 가라앉았다. 천만다행히 불덩이 같던 체온도 제때 해열제를 먹여 거의 정상이 되었다. 가끔씩 심한 재채기를 했는데, 해열제 투입시 기침약도 같이 복용시킨 일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침이 잦아들면서 가래도 적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들어옮겨 목욕을 시켰다. 온몸을 마시지하듯 부드럽게 누르면서 골고루 밀어주었다. 쓰러지려는 머리를 내 허리에 살짝 받치고 배와 등을 문질러 주었다.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내 정신이 아니었고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으나, 인간의 강한 생명력에 어찌 작은 병마가 대항할 수 있겠는가. 아내와 나는 오히려 약간 침착했고 의연했다. 우리 둘은 이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차분한 마음이라, 지금 별 걱정 없이 살고있는 것이다. 生滅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다만 최선을 다해 서로 끝없이 사랑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普施하면서, 애착 없이 살기로 하지 않았는가. 오늘 저녁은 아내와 내 몸 모두 참 쾌적한 듯싶다. 버릴수록 얻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참으로 살만한 세상이다.

 

박길수

1952년 광주 출생, kt퇴직, 요양보호사, 6년전 부인이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 재택 간병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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