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⓼가인과 그의 유산 (2)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09/06 [10:06]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⓼가인과 그의 유산 (2)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09/06 [10:06]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가납한다는 어떠한 표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맹렬한 분노였습니다. 위의 말씀을 보시면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니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몹시”(심히)라는 말에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음에 대한 가인의 분노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안색이 변했다고 했는데 이 말의 원어적 의미를 보면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라는 말입니다. 얼굴을 떨구는 것은 낙심과 실의에서 비롯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의 또 다른 원어적 의미는 얼굴을 강타하다라는 말입니다. 극심한 분노나 불만에 의해 안면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본 가인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6,7)

 

가인의 부당한 분노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은 어찜이뇨....어찜이뇨”, ?”라는 물음을 던지십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할 이유가 결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가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도 자신의 범죄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숨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한 것이 반드시 가인 자체를 거절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인내로 가인에게 다른 기회를 주려고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가가셔서 가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고, 가인이 느낀 분노와 부당함을 이해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와 의논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방임하지 않으시고 그처럼 불합리하게 행동한 그 사람과 변론하셨습니다. 그의 제물이 거절된 데에는 분명히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그것을 깨닫고 다시금 가인의 생각 가운데 잘못된 요소를 제거해 버리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관용구 가운데 죄를 짓지 않는 자는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의 원어적 의미를 보면 죄가 엎드린 모양은 마치 야수가 먹이를 찾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 문, 곧 심령에 침입하여 악으로 인간을 굴복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택은 가인 자신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가 약속된 구주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한다면, 그는 그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집스럽게 계속 불신하고 죄를 짓는다면 자기가 주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여 그분께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일 3:12)

 

12절 말씀은 사실 10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사도 요한은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를 식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이 범죄치 아니하는 것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마귀의 자녀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로 증거 되는데, 첫째는 의를 행치 않는 것이고, 다음은 형제를 사랑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요한은 가인을 형제애가 결여된 최고의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무엇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가?’ 이 질문으로 요한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배후의 동기를 고찰하도록 촉구하며 더 나아가서 13절에서 가인과 같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데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가인의 살해 동기는 아벨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아벨에게는 살해당할만한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벨의 겸손한 순종이 그의 형의 시샘 어린 분노와 증오를 일으킨 것입니다. 가인의 양심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책망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됨을 너무도 잘 일깨워주는 아벨을 파멸시키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4:9)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목적은 가인의 죄된 양심을 회개하도록 일깨우고, 새 마음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하여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에게 발생된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으로 가인 스스로 죄를 고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3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를 생각나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2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아담에게 하신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에게 하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 이 두 질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전자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묻는 질문이라면, 후자는 다른 인간을 향한 관계를 묻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아담의 대답과 가인의 대답을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모든 진실을 다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310절을 보시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사실을 언급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한 마디로 말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인은 질문하신 하나님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질문이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뉘앙스입니다.

 

여기서 니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그렇지 아니하다는 부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의문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알 수 없으나, 저는 아벨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뻔뻔스럽게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인에 거짓과 불경을 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반성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말한 거짓말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반역적이었으므로 더 이상 선고는 연기되지 않았습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계속적으로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라는 책망이면서, 동시에 가인의 범죄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탄식 섞인 질문인 것입니다. 여기 무엇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를 보시면 얼마나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네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저질렀느냐?” 이런 말로 바꾸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여기서 호소한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차아크인데 이 말은 단순히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다”, “법적인 보상을 요청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피가 호소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핏소리가 호소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아벨의 피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억울한 피해자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동정을 성경은 핏소리의 외침이라는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14절에서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이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1,12)

 

회개하지 않은 가인에게 아담보다 더 날카로운 죄의 결과가 선언됩니다. 아담에게는 간접적인 어휘가 사용되었지만, 가인에게는 직설적인 표현이 사용됩니다. 땅에서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적 표현을 보시면 2가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땅에서부터라고 해석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는 하나님께서 땅을 사용하시어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둘째는 그 땅보다 더 많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 말은 네가 땅보다 더욱 저주를 받으리니라는 말이 됩니다. 지난 연재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3장에서는 땅과 뱀만 저주를 받았지만, 4장에서는 범죄한 가인에게 직접 저주를 선언하시는데, 3장에서 저주를 선언한 땅보다 더 큰 저주를 선언하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은 타락의 정도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범죄한 인간에게 3장에서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가혹한 환경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4장에서 한번 더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천연계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4장에서 한번 더 천연계가 변화를 맞이하는 결과가 생겼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땅의 생산력을 제어하셔서 가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소출을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을 잘못 사용한 가인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경작하는 가인에게 소출과 열매를 선물로 주었던 땅은 더 이상 그를 위해 풍성한 생산물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제 가인은 땅에서 피하는 자”,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피하는 자의 히브리어 도망자”, “피난자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죄의식에 사로잡혀 일생동안 심적으로 쫒기는 삶을 살 것임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또한 유리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나드라고 하는데, 이는 부링자”, “방랑자로 이해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나그네 삶을 살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인이 이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에 준하는 소산물을 얻지 못하자 다른 삶의 터전을 구하기 위해 방황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에 짓눌려 심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살인자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피의 복수를 받게 되지만 가족들 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가족들로부터 추방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가인은 관계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가족공동체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땅의 저주로 충분한 식량도 얻지 못하게 되어 양식을 찾아 헤매는 부랑자, 방랑자로서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그분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더 이상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땅의 축복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모든 접촉에서 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끝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범죄한 결과 하나님께 영원히 배척당하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공포에만 사로잡혀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기사를 보면서 죄의 참혹한 결과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죄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 그래서 인생이 부랑자, 방랑자, 도망자로 살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렇게 범죄한 가인이라도 한번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 한번 발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방황하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 늘 거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