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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㊿ 불교 적통을 수호하려는 미얀마 불교의 몸부림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12/12 [08:08]
종교와 정치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미묘한 상황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㊿ 불교 적통을 수호하려는 미얀마 불교의 몸부림

종교와 정치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미묘한 상황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12/12 [08:08]

▲ 천불천탑이 있는 미얀마 바간 불교 유적지. 스리랑카 중세시대의 불교 전통이 그대로 이식된 모습.

 

남방 상좌부의 종주국이라고 하면 단연 미얀마와 태국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스리랑카(실론)가 인도 상좌부의 적통 종가여야 하지만, 현재는 미얀마와 태국이 종주국 역할을 분점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6:4 정도로 미얀마가 더 상좌부 적통에 가깝다는 평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좌부의 긴 역사를 여기서 일일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현재의 미얀마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중세시대에 전해진 상좌부 전통이다. 지금 스리랑카에 간다고 해서 이런 미얀마 상좌부의 전통을 찾기가 힘들다. 스리랑카 불교가 원조이지만, 인도에서 전해진 상좌부의 적통 승가 전통이 서구 식민지 열강에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 미얀마의 어린 사미승들이 탁발 공양을 받는 장면.

 

누누이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현재 스리랑카 불교 승가의 모습은 미얀마와 태국에서 역수입한 승가 모습이다. 남방 상좌부는 불교의 적통을 계맥(戒脈)에서 찾는다. 부처님 10대 제자로서 적통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우빨리 존자로부터 율맥(律脈)을 잇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빨리 존자로부터 수계(受戒)를 받아서 계맥이 부단하게 면면히 이어오는 적통성과 전통성을 따져 볼 때, 미얀마와 태국불교가 적통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라오스나 캄보디아도 적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들 나라의 불교 적통성이 실론(스리랑카)에 연원을 두고 있다. 다만, 실론에서 전해주었다가 실론 승가가 수계를 줄 수 있는 비구승가가 무너지자, 태국과 미얀마에서 계맥을 다시 이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남방 불교 상황은 미얀마와 태국이 그 적통성을 갖고 있는 종주국이 되어 있다.

▲ “미얀마 일부 승려들이 쿠데타 반대 시위에 동참했지만, 장군들은 합법성을 위해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카타르의 알자지라 방송 멘트.

 

불교 전파 경로사(經路史)를 다루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인도-스리랑카-동남아시아의 불교전파 역정을 소개해왔다. 이제 미얀마 불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중요 포인트는 미얀마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중세시대에 수용했다가 근대에 다시 상좌부 전통을 스리랑카에 되돌려 주었다는 점이다. 승가 공동체 운영이나 수행생활 및 빨리어 학습 등은 미얀마가 오히려 더 알차고 적극적이다. 경전결집(經典結集)도 인도에서 3번 스리랑카에서 한번 북인도에서 한번 그리고 미얀마에서 두 번이나 개최됐다. 미얀마 경전결집 회의는 전세계 불교계에서 공인을 받았기 때문에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 전통과 승가 공동체가 얼마나 공신력이 있는지 알만 하다. 미얀마 비구들을 만나면 이 점에 있어서 매우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다.

▲ 미얀마의 준 비구니 스님들인 띨라신 총회 모습.

 

 

미얀마 불교 승가는 첫째 질서가 있고, 열정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미얀마 어디를 가도 불교란 종교를 떠나서는 이야기가 안 된다. 불교 승려만도 거의 50만 명에 육박한다. 물론 사미가 포함된 통계이긴 하지만, 인구 100명 중 1명은 스님이란 말이다. ‘띨라신이란 비구니도 8만 명이다. 미얀마 불교는 아소카 대왕 시대부터 전해졌다고는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고 그 당시에는 미얀마 땅에 불교를 수용할만한 문명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기 전인 7세기에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아리불교란 밀교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11세기에 지금과 같은 상좌부 전통이 하()버마인 몬족으로부터 전해졌다. 일찍이 몬족의 불교는 남인도에서 전해졌으며, 현재의 하버마와 태국의 반도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1세기에는 이미 하버마인 타톤에 빨리어 삼장이 있을 정도로 상좌부가 널리 퍼져 있었다. 바간의 아나우라타 왕(재위:10441077)은 타톤에서 빨리 삼장을 무력으로 획득했지만, 고승 쉰 아라한의 설득으로 불교로 개종한 뒤 상좌부를 본격적으로 수용했고, 하버마의 몬족의 문화가 많이 섞여서 바간문화가 형성되었다. 이후, 바간 불교는 실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사실상 실론승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불교 센터가 되었다. 물론 11세기에는 버마에서 비구를 보내서 무너진 실론 승가를 복원시켰고, 그 후에는 실론불교가 다시 바간에 역수입되기도 했다. 상좌부를 받아들인 바간 왕국은 많은 사원과 탑을 건립하고 1279년에는 비구니 승가가 형성될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다. 1287년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 승가가 기울기 시작했고, 이 무렵 실론 숲속에서 명상을 위주로 하는 삼림파 전통이 태국 아유타야에 전해졌고, 이 삼림파가 미얀마에도 수용되었다.

▲ 양곤 쉐다곤 파고다(사원)의 위용.

 

미얀마 불교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원형불교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필자는 미얀마를 몇 차례 가서 명상수행도 하고 리서치도 했지만, 그야말로 상좌부의 진 맛을 느낄 수 있는 불교승가라고 본다. 지금 인도에서 불교 승가가 무너져버렸다가 다시 재건되고 있고, 스리랑카도 인도에서 전해졌던 그런 원형성은 상실되어 있는데, 미얀마 불교는 이런 원형불교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어서 느낌이 다르다. 사실, 미얀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은 언어적으로 티베트어와 가깝고 인류학적으로도 비슷하다. 아주 옛날 티베트 고원에서 버마의 저지대 평야로 내려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은 두 민족 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아주 옛날에는 사촌 간이었다. 상좌부 전통은 미얀마가 대승 밀교는 티베트가 주도하고 있음도 우연은 아니라고 보며, 이들 민족의 성실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필자 혼자 생각해 본다.

 

미얀마의 비구들은 학업에 충실하고 재가불자들은 명상에 집중함을 알 수 있고, 보통 일반 불자들은 공덕을 쌓는 약간의 기복에 젖어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를 후원하고 떠받치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이런 기복 불교를 무조건 배척할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 불교를 돌아보자. 이젠 기복 불교마저도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총체적인 위기라고 하겠다. 한때는 기복 불교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공사상을 너무 강조하고, 선사상을 너무 강조하여 불교를 공동화(空洞化)시켰던 것이다. 불교의 진리가 무아이고 공이고 선에서 말하는 무() 도 아니고 유()도 아니며 화엄에서 말하는 우주만상이 다 화장세계(華藏世界)임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승가가 약해지고, 신도 층이 얕아져서 외호를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가. 전부가 선원의 방석에만 앉아있으면 포교는 누가하고 불교는 누가 지켜간단 말인가. 통불교적인 다양성의 불교 풍토가 되어야 각층의 신도가 모여든다고 믿는다.

▲ 미얀마 만달레이의 가장 큰 사원에서 비구들이 아침공양을 배식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 이 사원에는 5천 명의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다.

 

미얀마 불교처럼 승가가 튼튼하고, 재가불교도들이 신심도 있고 명상도 하면서 사원을 외호하는 그런 불교 풍토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믿는다. 한국에서도 미얀마로 명상수행을 가는 것은 그만큼 분위기가 좋고 여건이 편하고 뭔가 얻는 것이 있고, 진전이 있기 때문이다. 선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진전도 후퇴도 없음을 알지만, 일단은 얻어야 하고 진전이 있어야, 얻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고 후퇴도 있음을 아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5차 경전결집회의는 1871년 민돈 왕의 후원으로 버마 만달레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만달레이를 직접 가봤지만, 현대 미얀마불교는 만달레이가 본산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역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버마 승가에서 제5차 경전결집회의를 주도할 정도였다는 것은 상좌부 권에서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의 상좌부 불교는 단연 버마가 앞서 있다는 점이다. 실론에서 이식해 온 빨리 삼장불교를 완벽하게 5백 년 간 소화했다는 점이다. 실론이나 태국 보다 버마가 인도에서 실론으로 이어지는 상좌부의 정통성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5차 경전결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승가가 건실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만달레이에 가보면 이때의 삼장 결집을 전부 대리석에 새겨서 석경으로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그 신심과 자신감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상좌부의 경전어인 빨리어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로 버마 승가는 불교의 원형성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2400명의 자격 있는 비구장로들이 모여서 결집을 했지만, 버마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대표>

▲ 담마라모(법수=法守)비구 시절의 필자 보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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