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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51 남방상좌부 경전결집 미얀마 5차 6차 주도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12/19 [06:40]
미얀마 불교 승가, 인도 원형불교의 총본산으로 되살아 나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51 남방상좌부 경전결집 미얀마 5차 6차 주도

미얀마 불교 승가, 인도 원형불교의 총본산으로 되살아 나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12/19 [06:40]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발상지를 성지화(聖地化)하고 있다. 그 종교 창시자와 직계 제자들의 숨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불적지(佛蹟地)가 있는 불교성지임이 분명하다. 불교 주체자인 승가가 없다고 할지라도 성지로서의 인도불교는 살아 있는 셈이다. 물론 지금 21세기 인도에는 불교가 다시 되살아 나고 있다. 또한 티베트의 망명불교나 각 나라 불교 전통이 부분적으로 인도 불교성지를 중심으로 들어와 있다. 그런가 하면 라다크 시킴 부탄 네팔 등지는 티베트계 불교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정신이 어디에 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창시자나 교주의 정신이 어디에서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종교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다.

▲ 석가세존이 무상정등정각(큰 깨달음)을 성취한 인도 부다가야 대탑사원 보리수 아래의 금강보좌.

 

이런 맥락에서 석가모니의 정신이 어디에 가 있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광의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비단 인도만이 아니고 세계 도처에 부처님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에는 부처님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불교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했던 곳은 인도가 분명하지만, 적어도 석가부처님의 정신은 우주법계에 편만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소위 샤프론(가사) 혁명에 참가한 미얀마 비구들과 불자들.

 

 

그렇지만 그래도 부처님 정신을 제대로 원리원칙대로 지키면서 잘 운영해 가는 승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기준은 부처님 당시의 승가와 정신에 견주어 볼 때, 가장 가까운 근사치를 따질 때 그곳이 어디냐? 라고 했을 때, 대체로 미얀마가 주목된다. .북방을 망라해서 부처님 승가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 미얀마라고 대답하는 것은 나 개인의 판단이 아니고 세계의 많은 불자들의 대답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얀마 불교에 주목해 본다면, 왜 미얀마 불교인가? 하는 내용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얀마 국민의 거의 90%가 불교도이며 상좌부 전통이다. 상좌부 전통은 불교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을 학습하고 있으며 승가(수도원) 생활이 더 엄격한 준수를 강조한다.

▲ 쿠데타에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선 비구들의 행렬. 

 

미얀마 승가가 건실하게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은 일반 불자들의 불교 수도원 공동체인 승가에 생필품을 바침으로써 공덕을 쌓는다. 매일 아침에 비구들의 탁발에 호응해서 공양물을 제공한다는 것은 공덕을 쌓는다는 신앙의 차원이다.

 

미얀마 불교는 1044년 바칸 왕국부터 버마의 국교였으며, 1961년 우 누(U Nu) 총리가 196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잠시 국교로 복원되었다. 불교와 버마 민족주의는 일치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인들은 "버마인이 되는 것은 불교도가 되는 것이다"와 같은 슬로건 아래 집결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식민주의에 반대하고 일부는 감옥에서 죽어가는 승려들은 민족주의 운동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승가 사이에서 반대가 획일적이지는 않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수 천 명의 승려들이 정치 활동에 참여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07년 사프란 혁명이 일어났다.

 

2007년 군부 정부가 유가와 가스 가격을 인상하기로 결정하자, 불만이 확산되었고 결국 짧은 기간이었지만 샤프란 혁명이 일어났다. 불교 승려들은 이러한 시위에 중심적으로 관여했다. 색상 샤프란은 비구들의 법복(가사)의 전통적인 색상을 암시한다. 높은 유가는 이미 빈곤한 버마 국민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고난은 재가불교의 음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승가에게도 전가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정부는 시위에 대해 묵묵히 대응하면서 놀라운 재량권을 보였다. 이러한 반응은 승가의 많은 참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위의 기조는 곧 바뀌었고 본질적으로 더 정치적이 되었다. 승려들은 가택 연금 중인 야당 민주국민동맹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의 집에 들러 민주 정부를 촉구했다. 그들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여 군대는 사원 시위자들을 공격하면서 잔인하게 대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휴대폰과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하여 기록되었다. 정부가 미얀마에서 인터넷을 차단하여 이러한 이미지를 검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은 최근 몇 년 동안 위성 TV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전국의 가정에 퍼졌다. 버마인들은 스스로 정부의 폭력을 목격했고 승가에 대한 이번 공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정부는 정당성을 잃었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전 세계에 방송되어 국제적인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아웅산 수치 여사는 복권되어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당이 되었지만, 또다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실각한 상태이다.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이 이러하면서도 미얀마 불교가 정상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미얀마 불자들의 신행과 명상 운동이란 수행정신이 라고 생각해 본다.

 

미얀마의 불자들이 단순히 공덕을 쌓기 위해서 공양을 비구들에게 바친다는 정도의 단순한 신앙 행위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미얀마 불자들이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면서도 명상 수행을 한다는 종교적 습관은 매우 탁월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미얀마의 비구들은 영국 식민주의 아래서 명상은 처음으로 많은 평범한 신도들에게 가르쳐졌으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버마의 저명한 명상 스승들은 특히 위빠사나인 통찰력 명상으로 알려진 명상 스타일에서 미국과 유럽 전역의 불교 수행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 불교 참선수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미얀마 불교에 대한 소개를 마치면서 제6차 경전결집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 불교역사상 공인된 여섯 번째 경전결집(1954〜1956년)이 이루어진 미얀마 양곤의 카바아에 파고다(동굴사원)로서 일명 세계평화파고다사원.

 

미얀마에 직접 가보면, 왜 미얀마 불교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미 대승불교에서는 남방 상좌부의 정경(正經)은 소승부파의 교리나 사상 정도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상좌부에서는 이른바 띠삐띠까(三藏)는 불교 정통의 경전(經典)인 정경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경의 결집(편집)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중요한 프로젝트를 버마(미얀마)에서 이룩해 냈다는 사실이다.

 

미얀마 불교는 경전독해와 구송(口誦)을 통해서 제5.6차 경전결집(經典結集)을 이끌어 냈다. 경전결집은 상좌부 삼장 전반에 대한 편집회의이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설한 붓다와차나(佛說)에 대한 확인 점검에 의한 삼장 특히 결율(經律)에 대한 정본화(正本化) 작업이다. 불교 26백년사에서 정통텍스트 편집회의는 6차례가 공인되고 있다. 다만 제1차부터 3차까지는 남방 상좌부와 북방 대승이 공통으로 공인하고 있으며, 4차 회의는 상좌부와 대승이 각각 따로 개최했으므로 두 곳에서 열렸고, 이후 상좌부는 버마에서 5차와 6차 경전결집회의를 개최했다.

▲ 제6차 경전 결집회의(1956년 미얀마 랭군).

 

대승불교에서는 중국 한국 티베트 몽골 거란 만주 등지에서 <대장경>이란 이름으로 경전을 판각하여 집대성(集大成)하기에 이르렀으며, 근대에는 일본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을 인쇄체로 간행했으며, 현대에 와서는 대만에서 전자불전으로 집대성하였다. 또한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실론 본 빨리어 삼장을 영역화(英譯化)하여 간행, 불교학 연구의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

 

버마(미얀마)에서 이런 5,6차 경전결집회의를 주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빨리어와 경전연구가 최고점에 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섯 번째 불교경전 결집협의회는 8개 테라바다 불교 국가에서 온 2,500명의 승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공의회는 1954년 웨삭(Vesak)에서 1956년 웨삭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완성은 고오타마 붓다의 열반 2,500주년 기념일과 일치했다. 과거 불교 회의의 전통에서 제6차 회의의 주요 목적은 상좌부 전통에서 이해된 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2년 동안 여러 나라의 승려가 기존의 빨리어 경전 편집본과 관련 이후 정경 문헌을 낭독했다. 그 결과 공의회는 궁극적으로 여러 고유 문자로 기록된 빨리어 텍스트의 새로운 편집본을 합성했다.

 

6차 위원회는 우 누(U Nu) 총리가 이끄는 버마 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카바아에 파고다와 마하빠사나 구하 또는 의회 작업이 진행된 큰 동굴의 건설을 승인했다. 이 장소는 제1회 불교 회의가 열렸던 동굴(칠엽굴)과 같이 설계되었다.

 

이전 결집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제6차 결집회의 목표는 진정한 담마와 계율을 확인하고 보존하는 것이었다. 2,500명의 테라바다 장로는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 네팔 등 8개국에서 왔다.

 

미얀마의 명상 스승으로 유명한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에 대해 필요한 질문을 밍군 사야도에게 하도록 임명되었다. 인도를 제외한 모든 참가국은 빨리어 삼장을 자국어로 번역했다. 2년 동안 삼장과 모든 문자의 관련 문헌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차이점을 기록하고 필요한 수정을 하고 대조했다. 어떤 텍스트의 내용에서도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공의회가 본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후, 삼장경의 모든 책과 그 주석은 현대식 인쇄기에서 인쇄할 준비가 되었다. 이 괄목할 만한 성과는 2,500명의 승려와 수많은 신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의 작업은 1956524일 저녁 보름달이 뜰 때 끝났고, 전통적인 테라와다 연대에 따르면 붓다의 대반열반 2500주년 기념일이었다.

 

이 위원회의 작업은 불교 역사상 독특한 업적이었다. 경전은 여러 번 철저히 검토된 후 40권에 52개의 논문을 포함하여 인쇄되었다. 이 공의회가 끝날 무렵, 인도를 제외한 모든 참가국은 띠삐따까를 자국어로 번역했다. 인도에서도 나중에 힌디어로 번역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대표>

▲ 영축산 통도사 비로암 주석 원명 지종 대종사인 전 방장께서 보드가야 대탑사원 보리수 금강보좌 상당설법회. 좌측 가운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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