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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나라 바벨론의 영광과 패망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3/14 [08:45]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 -역사 그분 이야기 8

황금의 나라 바벨론의 영광과 패망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 -역사 그분 이야기 8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3/14 [08:45]
바벨론에는 두 무리의 유대인 포로가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한 포로로 이중 바벨론에 의한 포로는 귀국을 했지만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된 북방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성경 다니엘서는 바벨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왕은 곧 금 머리니이다”바벨론은 ‘금(金)’으로 묘사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루도투스는 느브갓네살이 죽은 지 1세기 후에 바벨론을 방문하였을 때, 그때까지 많은 금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신전, 제단, 사당 등 모든 귀한 것이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금잔이라” 말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열국의 영광”이라 했다. BC605년 느브갓네살왕의 군대는 유대를 침공하여 많은 포로와 각종 보물을 가져간다. 이때 18세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함께 포로가 되어 간다. 이때 귀족들과 유명인사, 기술자들과 여호와 하나님 성전의 성물인 금, 은 기명과 기구들도 가져간다. 느브갓네살왕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만세의 통치자로 영원한 제국을 꿈꾸며 황금문화를 이루어 고대 최고의 도시 바벨론을 건설한 것이다.

▲ 신비의 바벨론이 있는 일곱 언덕의 도시.     ©
이 성의 성벽은 두께가 12피트에서 26피트까지의 성벽을 2중, 4중 겹겹이 둘러친 바벨론 성을 유프라데스 강위에 건설하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안에는 장엄한 복합 신전인 에사길라와 300피트의 고탑 신전 에테멘난키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느브갓네살왕이 메디아에서 출가해온 왕비 아뮤티슈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건립한 것)을 비롯한 각종 건축물로 가득 찬 세계의 골드컵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강한 나라의 통치자 느브갓네살왕도 근심이 없을 수 없었다. 그가 하루는 장래 일을 염려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었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자 하였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꿈을 술사들에게 알아내서 해몽을 하라는 엄명을 내리지만, 그의 꿈을 해몽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유대인 포로 중에 소년 다니엘이 왕 앞에 나가 꿈의 뜻을 밝혀주자 느브갓네살왕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란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자신의 장래 일을 보여주신 것을 알고 다니엘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니엘을 존귀하게 대해 준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얼마 가지 않고 인간적인 교만이 나타났다. 느브갓네살왕은 유대를 멸망시킨 지 24년만인 BC 562년에 죽고, 뒤를 이어 에월무로닥왕(BC 562년~560년), 네르갈샤르우수르(BC 560년~556년), 라바쉬마르둑(BC 556년), 나보니더스(BC 556년~539년)와 벨사살(섭정왕 552년~539년)까지 23년간 5명의 왕의 치세로 황금의 제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 무렵 나보니더스왕은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자신의 장남 벨사살을 BC 552년에 섭정왕으로 임명하고 제국의 치안과 수도 바벨론 성 사수의 임무를 맡겼다. BC 539년 나보니더스왕은 메대, 페르샤 연합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아라비아의 북부 테마로 떠나면서 벨사살에게 후방, 특히 수도 바벨론성 사수를 부탁했지만, 메대 페르샤 연합군에 패하여 10월 10일 보르시파성으로 퇴각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수도 바벨론성은 메대 페르샤 연합군 사령관 고레스(CYRUS) 장군의 총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성안의 벨사살왕은 두려움을 이겨 보려고 자신의 왕비와 후궁과 왕족과 귀족, 대신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배설하고 허세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유대에서 탈취해온 성소의 성물인 금, 은 기명에다 술을 부어 마시고 있었다.

이 연회를 배설한 자리는 공중정원 중앙의 남궁(南宮)이었다. 이 때 벨사살왕이 앉은 맞은편 벽에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저 손과 손가락은 무엇이며 저 글자는 무슨 뜻인가의 두려움으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베사살의 할머니 고 느브갓네살의 미망인의 제의에 따라 유대인 포로 다니엘을 불러 벽에 쓰인 글자와 뜻을 말해 달라고 한다.


만찬장 벽에 쓰여진 묵시록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5:5)
즉, 메네=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우 바르신(U Pharsin)=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바사(페르샤)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다. 다시 말하면 벨사살과 그의 나라가 헤아려 보고 무게를 달아본 결과 기준미달로 더 이상 존재할 가치를 상실했음으로 지금 포위하고 있는 메대․바샤에게 나라를 주겠다는 최후의 통고였다.

한편 성 밖의 메대․바샤 연합군은 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찾던 중 이 성이 유프라데스강 위에 건축된 사실에 착안하여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상류에서 돌려 강물의 수위를 낮추어 성을 함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성안으로 진입한 메대․바샤 연합군은 벨사살왕을 죽이고 바벨론 성을 점령함으로써 황금의 나라 바벨론은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다니엘이 전한 예언이 적중하여 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BC 539년 10월 13일이었다.


유대백성들의 바벨론에서의 생활


포로로 잡혀간 유대백성들은 군인들의 잔학성과 달리 일반 백성들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농업에도 종사할 수 있었고, 차츰 도시 거주도 허용되었다. 이들은 바벨론 생활에 적응하여 생활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페르샤의 발흥으로 BC 539년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다음해 유대인의 귀국을 허가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유대백성들은 생활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귀국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들 중 42,000명 정도가 귀국을 결정했다. 이때의 귀국은 전체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그룹별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제일 처음 귀국자들은 고향을 그리며 바벨론 강변에서 울던 열성파 그룹과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귀국하여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합심 협력하여 성전 재건축을 시작했다(BC 537년 고레스 왕명에 의한 예루살렘성 재건축은 사마리아와 주변국의 방해로 실패한다). 
 

유대백성들의 귀국허가


페르샤의 다리오왕은 포로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조국으로 귀국을 허락하고 예루살렘성 재건축과 성전재건축을 촉구한다. 이때 귀국한 사람은 70만 명이었다고 하니, 실제로 포로 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때 귀국한 포로 중에는 느헤미야, 에스라, 모르드개, 스룹바벨 등 유명인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500마일 정도로 걸어서 4개월여 동안 사막의 길을 걸어야 했다. 유대 포로들이 바벨론을 출발한 것은 유대력 니산월 정월초하루였고 도착한 날은 5월 1일이었다(에스라 7:9).


귀국 포로들의 탄식


돌아온 귀국 포로들은 폐허가 되어 방치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통탄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돌아갔으니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며, 우리 어미는 과부이고, 우리의 원수는 우리의 복을 누렸도다. 저들은 시온에서 부녀자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시온은 황폐하여 여우가 노나니”(애 5:l~8)


유대인들의 의식변화


북방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대 백성들은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멸망할 무렵 동물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부패와 정의를 저버리는 행위가 정말로 죄라고 생각하게 되어 제사장들에 의한 성전예배에서 탈피하여 선지자들과 랍비들에 의한 유다이즘교육으로 대체되었다.

이들 선지자들에 의한 새로운 사상에 영향을 받은 바벨론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을 개조한다. 이는 성전 대신 종교행사를 위한 집회소인 시나고그를 세우고 번제 대신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로서 성전 없는 이국땅에서 종교행사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한편 귀국한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축을 끝내고도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가 힘을 합하여 유대인사회를 개혁한다. 개혁의 주된 내용은 ①이방인과 결혼금지, ②토라(모세5경) 완성, ③율법준수, ④안식일 준수, ⑤토라 읽기 운동이었다. 이들은 선민사상으로 자부하고 자위하고 있었다. 선민사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토라를 받도록 선택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유대교는 전도의 종교가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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