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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쉽게 읽기●대붕! 창공을 날아오르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1/25 [17:19]
삶을 깊이 사유하는 자만이 진리의 길 찾는다

장자 쉽게 읽기●대붕! 창공을 날아오르다

삶을 깊이 사유하는 자만이 진리의 길 찾는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1/25 [17:19]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風; 背負?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 이시헌     © 매일종교신문
아득히 펼쳐지는 검푸른 물결 일렁이는 북녘 바다에 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은 하도 커서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때인지 홀연히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거대한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도 역시 하도 커서 등의 넓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 터무니없이 큰 붕새가 한 번 온 몸의 힘을 떨쳐 공중을 향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의 한쪽을 덮은 구름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여 물결이 요동치면 그 큰 바람을 타고 다시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데 남쪽 바다란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고 했다.    

제해齊諧는 괴이한 일을 잘 아는 사람이다. 제해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대붕大鵬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가 일어 3천 리까지 퍼진다. 대붕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구만 리 상공으로 올라가면 여섯 달 동안을 쉬지 않고 날았다.”라고.

아래 땅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티끌 먼지가 날고 있다. 아지랑이나 티끌 먼지는 모든 생물들이 숨결로 서로 뿜어낸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하늘 그 자체 본래의 빛깔일까? 아니면 멀고 끝이 없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일까? 붕새가 9만 리 높이 하늘에서 이 지상을 내려다 볼 때에도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고인 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가령 마당 우묵한 곳에 한 잔의 물을 부으면 그 위에 띄울 수 있는 배는 겨자씨로 아주 작게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잔을 놓으면 뜨지 못하고 바닥에 붙어 버린다. 물이 얕으면 배가 뜨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의 부피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대붕도 커다란 양 날개를 띄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만 리 바람이 그 날개 아래에 모여 있어 불어 주어야만 그 바람을 탈 수가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앞에 명료한 시야를 얻어야만 남쪽을 향해 날아갈 수가 있다.

北冥(북명): 冥(명)은 아득하여 끝이 없다는 뜻. 北冥(북명)은 北海(북해)인데 넓고 넓어서 世人(세인)이 볼 수 없는 땅으로 玄冥(현명)한 大道(대도)를 비유함. 北溟(북명)으로 함이 옳다.

鯤(곤): 본래는 小魚(소어)의 이름인데 장자는 大魚(대어)의 이름으로 썼다.

化而爲鳥(화이위조): 변신해서 새가 됨.
鵬(붕): 전설상의 靈鳥(영조), 鳳(봉)의 옛자로 상상의 큰 새.
怒(노): 기운을 돋우다의 뜻. 喜怒(희노)의 怒(노)가 아니고 奮力(분력)하는 뜻.
垂天之雲(수천지운): 하늘에 드리운 구름.
海運(해운): 바다가 움직이면, 海氣(해기)가 동하다.
南冥(남명): 남쪽 바다.
天池(천지): 하늘의 못, 큰 바다는 자연의 조화로 만들어져 천지라 함.
齊諧(제해): 사람 이름, 책 이름이라고도 함.
扶搖(단부요): ?(단)은 빙글 돌며 날다. 扶搖(부요)는 회오리바람.
野馬(야마): 아지랑이.
塵埃(진애): 티끌, 먼지.
蒼蒼(창창): 새파란 빛.
堂(요당): 마루의 움푹 패인 자리.
芥(개): 겨자, 짚검불.
杯(배): 술잔 배.
膠(교): 아교, 땅에 닿음.
培風(배풍): 바람을 타다.
夭閼(요알): 夭(요)는 꺾음[折(절)], 알은 막힘[塞(색)]. 즉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뜻.
圖南(도남): 남쪽으로 가려함.

장자는 변신變身의 이야기로 그 첫 장을 열었다.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거대한 새인 붕鵬으로 변화하는 이 장엄한 사건은 북명北冥(북쪽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곤이라는 물고기에서 붕이라는 새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붕이라는 새가 가지는 상승과 비약에의 의지이다. 어찌 실패와 좌절이 없었겠는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대붕의 구만 리 장정을 주시해야할 것이다.

상식을 뛰어 넘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대붕은 현실 세계로부터 비약하여 이 세계를 낯설게 내려다보는 장자 본인이다. 초월의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기운을 일으켜’ 변화를 이끌어 낸다. 대붕大鵬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구만 리 상공으로 올라가는데 대붕이 타고 노는 회오리바람은 신바람이고 생기生氣이다. 대붕은 소소한 세속의 매임을 벗어나 자유로워 거침이 없다. 모든 대립 관념을 남김없이 날려버린 경지이다. 모든 사물을 높은 경지에서 바라보면서 일체의 차별상을 초월한다. 

대붕은 시공을 맘껏 휘저으며 즐겁게 노니는 것이다. ‘소요유逍遙遊’의 뜻이 바로 그렇다. 본디 모든 존재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의 날개를 붙잡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온갖 규칙에 얽매이면서 불필요하게 자신을 구속했다. 또한 명예, 돈, 권력 등 세속적 욕망을 얻기 위한 싸움에 휘말려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자는 이런 세속적 가치들을 초월하여 환상적 지평에 자신을 노닐게 하는 것이다. 대붕이 하늘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 마당 우묵한 곳에 술잔의 물을 부어 겨자씨로 만든 배를 띄우고 그것도 서로 다투며 옥신각신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대붕은 신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데…… 천지 대자연을 그려내고자 하는 화가라도 되듯이 자기 마음을 화폭으로 삼아 거대한 환상의 세계를 그리면서 거침없이 노닐고 있었다.

與學鳩笑之曰: 「我決起而飛, 槍?枋而止,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這九萬里而南爲?」 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久特聞, 衆人匹之, 不亦悲乎!

湯之問棘也是已.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脩者, 其名爲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雲氣, 負?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笑之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而下, ?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此小大之辯也. 

메추라기가 대붕을 비웃는다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 보아야 겨우 느릅나무와 다목나무 가지 위에 오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올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데, 붕새는 무엇 때문에 구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그런데 가까운 교외로 놀러가는 사람은 세 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루종일 절구질을 하여 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매미나 비둘기 같은 미물이 대붕의 큰 뜻을 어찌 알겠는가!

이렇듯 자그마한 지혜[小知]는 큰 지혜[大知]를 헤아릴 수 없고, 수명이 짧은 자는 유구한 일들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아침에 잠깐 났다가 곧 시들고 마는 아침 버섯은 저녁과 새벽을 알지 못한다. 여름 한 철 사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다. 이것은 수명이 짧아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긴 삶을 보자.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그 수명이 하도 길어 5백 년 동안은 봄이고, 또 5백 년 동안은 가을이다. 그보다 아주 먼 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큰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봄과 가을을 각각 8천 년씩이나 맞이하였다 한다. 이런 것들이 긴 삶이다.

나무만이 아니라 오래 산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간도 있다, 팽조彭祖는 7백 년이나 8백 년을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장수를 부러워하여 그와 비교하려 한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제해의 말뿐 아니라 은殷나라 탕湯임금이 현자인 극棘에게 들은 이야기도 이와 같은 내용이다. 

“북극의 초목이 나지 않는 불모지에 검푸르고 어두운 바다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못, 천지天池입니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가 수천 리쯤이고 그 길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 입니다. 그 이름은 곤鯤입니다. 거기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은 붕鵬이라고 합니다. 등은 태산 같고 날개를 펼치면 하늘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습니다. 붕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양羊의 뿔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구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구름 위로 뚫고 나가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연후에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남쪽 바다를 향하여 날아갑니다. 

메추라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몇 길을 못 올라가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니면 고작이다. 이것이 또한 내가 오를 수 있는 최상의 경지이다. 그런데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學鳩(학구): 작은 비둘기, 學(학)은 ?(학)=小鳩(소구).
決起(결기): 힘차게 날아오름.
槍(창): 닿다, 머물다.
楡枋(유방): 楡(유)는 느릅나무이고 枋(방)은 다목나무
控於地(공어지): 땅에 떨어지다. 控(공) = 投(투).
適(적): 가다[往]
莽蒼(망창): 莽(망)은 풀숲. 蒼(창)은 푸른 빛, 푸른빛으로 뒤덮은 푸른 숲으로 교외의 푸른 들판임.
三飡(삼손) : 세 끼 식사.
果然(과연): 果(과)는 果實(과실)이 둥근 것이 배부른 모양을 뜻함.
宿?糧(숙용량): 전날 밤 곡식을 찧어[?(춘);방아 찧다] 식량을 준비함.
朝菌(조균): 아침에 생겨났다가 햇빛을 보면 말라 버리는 버섯.
晦朔(회삭): 그믐과 초하루, 밤과 새벽으로 번역함.
大椿(대춘): 나무 이름, 상상의 나무
冥靈(명령): 나무 이름.
彭祖(팽조): 인명. 堯(요)임금 이래로 殷(은)나라 때까지 칠백 세를 살았다는 전설적 長壽者(장수자).
匹之(필지): 비슷해지기를 바람
窮髮之北(궁발지북): 불모지의 북쪽. 窮髮(궁발)은 황량한 不毛地(불모지).
修(수): 길이. 脩(수)와 같은 자.
斥?(척안): 메추라기.
蓬蒿之間(봉호지간): 쑥대밭 사이.
飛之至(비지지): 날아다닐 수 있는 최상의 경지.
辯(변): 차이, 구별.

탕임금의 들음과 제해의 이야기는 서로 같은 내용이나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 끌어온 이야기이다.

붕새와 대춘大椿은 큰 지혜의 비유이다. 메추라기와 세상 사람들은 작은 지혜의 비유이다. 장자는 대붕이란 허구적인 새를 고안하면서 메추라기라는 현실적인 새를 은유로 끌어들인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대붕에 의해서만 메추라기의 가능성과 한계가 보일 수 있듯이 우리는 초월론적 지점에 이르러야만 우리의 삶을 바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 현실 세계를 낯설게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로부터 비약하여 대붕의 구만 리 장정을 시도해야만 한다. 

그런데 메추라기는 현실 세계에서는 도무지 쓸모가 없는 거대한 날개를 타고 날으는 대붕을 조롱한다. “저 붕새는 무엇 때문에 저런 헛수고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장자는 메추라기에게 조롱받는 대붕이 되고자 한다. 대붕은 온 힘을 다해서 상공으로 비약하려고 매번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을 달게 받으며 끈덕지게 사유하였다. 그래서 모든 자잘한 것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바람을 타고 유유히 푸른 하늘을 활공한 것이다.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사람만이 진리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길을 찾은 자는 구만 리 먼 길이라도 갈 수 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속한 테두리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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