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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종교개혁자들●마르틴 루터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5/01/01 [21:05]
“그리스도 은혜는 돈 아닌 회개함으로써 받는 선물”

주목할 만한 종교개혁자들●마르틴 루터

“그리스도 은혜는 돈 아닌 회개함으로써 받는 선물”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5/01/01 [21:05]

▲ 보름스회의에 참석해여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는 루터     ©

지난 번 죽음으로써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 외에도 주목할 만한 종교 개혁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시작으로 10명의 약전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10월 11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독실한 가톨릭(로마 법왕교) 신자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키워보려고 열망했다. 루터는 18세 때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했다. 1502년 7월 2일 친구와 함께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를 향해 가던 중 벼락을 맞아 친구는 죽고, 루터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어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의 바람인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에서 뜻을 바꾸어 수도사(修道士)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루터에게 ”나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장차 진리를 전파하는데 유용한 인물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드렸다.
 
루터는 대학입학과 동시에 모든 환경이 훨씬 좋아졌고, 장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은 그로 하여금 성실과 인내, 지혜로움과 진리추구에 대한 열망,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그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더하게 했다. 그는 화평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고 매일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기도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지도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도를 잘 하는 것은 공부의 절반 이상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느 날 루터는 대학도서관에서 서적을 조사하다가 라틴어 성경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예배시간에 회중에게 복음서와 편지서 일부를 읽어주는 것을 들어왔을 뿐으로 그것이 성경의 전부인 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두렵고 놀라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때때로 멈추고 “오! 하나님, 나에게 이런 책을 주셨으면!”하고 부르짖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시는가 하는 생각으로 두려워했다.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자 간절히 소원한 나머지 그는 마침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수도원에서는 그에게 비천한 일들이 맡겨졌으며 문전걸식도 요구하였다. 자존심 강한 연령에 심한 굴욕감을 참으며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일도 필요한 것이라 믿었다.
 
한편 틈나는 대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 한권이 수도원 한쪽 벽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주 그곳으로 갔다. 또한 죄에 대한 자각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그는 자기의 행위로 용서와 평안을 얻고자 애썼다. 그는 가장 엄격한 생활과 금식과 철야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악한 성격을 극복하려고 자신을 채찍으로 때려 보기도 했으나 죄에서 해방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겁내지 아니하였다.
 
후일 그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실로 나는 경건한 수도승이었다. 만일 이러한 수도로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히 그러한 자격을 얻었을 것이다. 만약 그 일을 조금만 더 했더라면 아마 나는 죽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친구 스타우피츠(Staupitz)를 나의 조력자로 보내주셨다. 그는 나에게 ‘자기 자신을 보지 말고, 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 받는 영원한 형별을 생각지 말고, 오직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오류에 사로잡혀 씨름하던 루터는 진리를 깨달은 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루터는 신부로 임명되어 수도원에서 나와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의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원어로 된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성경강의를 시작하였다. 루터는 1510년에서 1511년 겨울까지 로마로 도보여행을 하였다. 숙식은 여러 수도원에서 해결하며 로마로 향했다. 그들은 너무나 부유하고, 사치했으며, 신성해야할 성전에서조차 하나님을 모독했다. 로마에서 강행되는 죄악과 파렴치한 행동은 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로마는 필시 그 위에 건설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곳은 온갖 죄악이 생겨나는 무한 지옥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루터가 빌라도의 계단(층계)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문득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 우레처럼 들리는 듯 하였다. 그는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급히 일어나서 그곳을 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구원을 얻는 것에 사람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믿어야 함을 깨달았다.
 
루터는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자 로마법왕교의 거짓에 미혹되지 않고 진리의 길을 가고자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로마에서 귀국한 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진리를 찾고자 주리고 목말라 하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은 어떠한 교리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확고하게 천명하였다. 루터는 사람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존중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청중들의 마음을 철학자나 신학자의 궤변에서 돌이켜 사도들이 말한 영원한 진리로 안내하고자 정성을 다하였다.
 
루터가 시무하고 있는 비텐베르크교회에 수도승 테첼이 찾아와 면죄부판매를 하면서 “이 면죄부(사죄권)는 현재 살아있는 자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구원할 효능이 있으며, 돈이 궤에 떨어져 소리를 내는 즉시 속전을 내 그 사람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을 보증한다”고 선동하는 것을 본 루터는 분연히 일어나 청중들에게 “죄의 무서움과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악을 경감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다만 죄를 회개함으로써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고 말했다.
 
루터는 더욱 효과적인 항의를 하려고 결심했다. 비텐베르크성교회에는 여러 가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특정한 축제일에 그것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관습이 있었다. 마침 축제일 중 가장 중요한 제성제(諸聖祭)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터는 교회의 문에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항의문을 써 붙여 놓았다. 루터는 논제에 대한 토론을 제의했으나 아무도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이 1517년 10월 31일이다. 그가 제시한 논제(문제)들은 며칠 사이 온 독일에 퍼졌고,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각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전파됐다. 이때까지 교회 안의 무서운 죄악과 부패상을 알면서도 그 기세를 꺾을 방법을 알지 못했던 많은 경건한 로마법왕 교도(로마 가톨릭교도)들은 큰 기쁨으로 읽고 하나님의 음성이 이 안에 있음을 인정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만하고 부도덕한 무소불위의 로마 교황의 타락을 막기 위한 주님의 자비의 손을 펴신 줄로 생각했다.
 
왕후(王侯)들과 지방장관들은 로마 교황청을 쳐부수게 된 것을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미신적인 행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면죄부사업의 방해로 수입이 줄게 된 승려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루터의 대적들이 관례와 유전, 그리고 법왕의 권위와 주장을 가지고 대항해 올 때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 대항했다. 그는 1518년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로마 법왕교 추기경의 공식 사절단인 카제탄과 자신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논쟁하였으며,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에크 박사와 논쟁하였다.
 
이들은 한 결 같이 루터의 주장을 무조건 취소하라는 압력을 가할 뿐이었다. (이 무렵 멜란히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 또한 종교개혁자가 된다) 1521년 루터는 황제 카알5세의 명령으로 국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견해에 대해 답변했다. 그는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용기와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답변석에 섰다. 그는 황제의 심문에 성경의 진리의 말씀으로 지혜롭고 담대하게 답변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격받지 않고 전파될 수 없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 굴종하는 것은 사실상 예배행위이므로 그것은 온전히 창조주께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는 파문당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으나 사람들의 간청으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두겠다고 맹세한 적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터를 죽이려고 포고령이 고시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셨다. 작센선후(選候) 프리드리히의 신하에 의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위장 압송되어 1522년 봄까지 그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소책자로 만들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였고, 또한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여 독일 국민에게 봉사하였다. 1546년 루터는 자신의 출생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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