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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탄생지 룸비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4/10 [08:33]
불교성지를 가다(네팔)⑧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불교성지를 가다(네팔)⑧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4/10 [08:33]
▲ 룸비니 공원에 있는 마야 데비 사원과 연못.     © 매일종교신문
 
룸비니는 불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서 네팔에 소재하고 있다. 고오타마 삿다르타의 고향 인 카필라와스투 또한 네팔 땅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는 인도 땅이었지만, 현재는 네팔 땅이 되어 있는데,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네팔은 모두가 인도 땅이었고, 인도 권에 속했었지만, 현재는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분리되었다. 네팔에서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곳은 이곳 룸비니와 카필라와스투 두 곳인데, 불교도들은 룸비니를 필수 코스로 여긴다. 고타마 붓다는 기원전 563년 4월 15일(음력)에 이곳 룸비니에서 탄생하셨다.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은 불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고타마 붓다의 고향과 함께 의미 있는 성역으로 믿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주의 탄생지를 성지로 받드는 것은 이런 종교적 이유에서다. 하지만 유교의 경유, 공자나 맹자의 사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아마도 그것은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 따른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 마야 데비 사원 옆에 서있는 아소카 대왕의 석주.     © 매일종교신문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치면서 사방으로 칠보(七步)를 행했다는 전설과 함께 석가 탄생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신비적인 묘사는 종교 신화적인 상징으로 해석하고 이해했으면 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외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구호이고, 사방으로 칠보를 행했다는 것 또한 고타마 붓다가 45년간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면서 진리를 구현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마야 데비는 무우수(無憂樹:근심 없는 나무) 가지를 붙잡고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옆구리로 탄생시켰다고 했는데, 이것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사성계급 가운데 무사계급(정치)인 크샤트리아 출신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당시 인도의 풍습으로는 신생아 출산은 친정집에서 하는 것이었는데, 왕비였던 마야 데비는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로 가다가 중간지점인 룸비니 동산에서 그만 출산을 하고 말았다. 데바다하는 조그마한 공국(公國) 정도였고, 이 공국은 콜리야 족의 일원이었다. 마야 데비는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낳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죽고,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 마야왕비가 무우수 가지를 잡고 있고,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탄생 직후 칠보를 행하는 장면.     © 매일종교신문
 
룸비니는 고타마 붓다의 탄생지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야 데비 사원과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목욕시킨 연못, 무우수로 알려진 살 트리(Sal tree)와 아소카 석주 정도이다. 또한 2013년에 기원전 6세기 것으로 보이는 목재가 발견되었다. 영국 네팔 합동 고고 발굴단은 이 목재가 바로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점에서라고 하는데, 고오타마 싯다르타 탄생 때부터 건물을 지어서 기념해 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불교 고대사연구가와 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 유엔본부를 방문한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는 우 탄트 사무총장.     © 매일종교신문
 
룸비니가 성역화되기 시작한 것은 버마 출신 우 탄트(U Thant 1909–1974) 제3대 유엔 사무총장(1961-1971 재직)이 1967년 룸비니를 방문하고 네팔정부와 룸비니개발 프로젝트를 만들고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킴으로써 추진력을 발휘하게 되면서다. 우 탄트 사무총장 방문 이전에 이미 네팔 마헨드라 (Mahendra) 국왕이 1956년 룸비니를 방문하고 세계불교도우의회 대회를 개최하도록 10만 루피를 희사하여 룸비니 개발을 위하여 세계불교도들의 모임을 장려했고, 후계 왕인 故 비렌드라 왕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네팔 정부 산하에 ‘룸비니개발위원회’가 공식 기구로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세계불교도들과 국가에서 호응하여 룸비니 성역화 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룸비니는 고타마 붓다가 태어날 때 매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는데, 아소카 대왕은 기원전 249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석주를 세웠고, 중국 동진의 법현법사는 5세기 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아소카 석주와 승원을 봤다고 기록했으나, 당나라 현장법사는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하고, 아소카 석주가 벼락으로 갈라져 있고, 황폐화되어가고 있었다고 그의 여행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후 룸비니는 수 세기동안 흙속에 묻혔다가 1895년 독일의 고고학자인 퓨러(Alois Anton Führer) 박사가 우연히 아소카 석주를 발견하여 룸비니 성지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발견된 아소카 석주에는 브라미(Brāhmī)문자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있었다. “삐야다시 왕(아소카 왕의 異名)이 이곳을 방문하고 예배를 드리며, 여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했다.” 라고 씌어 진 것을 해독해 낸 것이다.
 
▲ 마야왕비가 코끼리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는 장면으로 간다라에서 제작(2-3세기CE).     © 매일종교신문

룸비니개발 프로젝트의 마스터플랜은 세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a)성역정원(聖域庭園)지대 b)사원구역 c)뉴 룸비니 마을 구역으로 3분해서 개발되고 있다.
 
a)성역정원(聖域庭園)지대에는
고타마 붓다가 탄생한 지점인데, 마야 데비 사원, 아소카 석주, 스투파들과 사당, 정원과 나무와 연못이 있는 곳이다. 룸비니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공간이다.
 
b)사원구역에는
동서(東西)사원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동쪽 구역에는 상좌부(남방불교) 권인 버마 네팔 태국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사원과 위빠싸나 명상센터 등이 들어서고, 서쪽 구역에는 한국을 비롯한 15개의 대승불교권 사원이 들어서고 있다.
 
c)뉴 룸비니 마을 구역에는
호텔 등 숙박업소와 병원 학교 우체국 박물관 도서관 국제 불교 연구소와 관광정보안내소 등이 들어 서있고 일본불교도들에 의해서 세계 평화 탑이 건립되어 있다. 1998년에는 세계불교정상회의가 열렸고, 룸비니는 ‘세계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성스러운 불교순례지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의 중심지“라고 선포한 바 있다. 2004년에도 제2차 세계불교정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0개항 평화 실천 방안이 선포되기도 했다. 룸비니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다.
 
카필라와스투는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고향이다. 29세 때 까지 양육되고 왕위계승을 위한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고 출가하기 전까지 생활했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8세기 경, 카필라라고 하는 유명한 고대인도 철학자가 살았던 곳으로, 지명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 경, 특히 히말라야 기슭에는 많은 자유 독립 국가들이 출현했는데,
 
▲ 카필라와스투 타운 입구에 서있는 문.     © 매일종교신문
▲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29세 때 출가하기 위하여 愛馬 칸탁을 타고 빠져나간 카필라와스투 왕궁 동문(東門) 터.     © 매일종교신문
▲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다른 세 명의 학동과 함께 아버지의 왕궁 툇마루에서 바라문 승려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데, 서판이 그들의 무릎 위에 있으며 과목은《베다》이지만, 무사로서의 전쟁용 도끼 활 등이 있고, 악 기도 있으며, 새장도 있고, 처마 아래는 비둘기들이 서식하고 있는 등 고대 인도의 학당의 모습이다. 아잔 타 동굴 벽화 제16호를 선(線)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6세기 CE).     © 매일종교신문


이 카필라와스투도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석가 족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부족단위의 조그마한 공국(公國)을 세워서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전 1천경부터 남쪽에는 코살라 국이 있었고, 기원전 8세기 정도가 되면 코살라 국은 강대국이 되었다. 실론의 사서《마하왕사》에 따르면 카필라와스투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 코살라 국에 정복되고 합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동진의 법현법사는 기원후 4세기 말, 이곳을 순례하고 카필라와스투가 고타마 붓다 시대에 코살라에 병합됐고, 극히 소수의 비구와 사람들이 기울어진 승원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왕궁 터를 봤다고 그의 여행기《불국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약 2세기 후 이곳을 찾은 당 현장 삼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처음 만들어진 성벽은 공고하게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들도 별로 없고, 황폐화된 마을 정도였으나, 땅은 기름지고 풍요로워 보였다고,《대당서역기》에 기록 하고 있다. 이후 이 지역은 힌두의 손에 들어갔다가 기원후 9세기가 되면 무슬림들의 손에 들어가서 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역으로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카필라와스투는 룸비니에서 북서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도-네팔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룸비니를 순례하고 바로 이곳 카필라와스투를 들려서 사위성으로 가는 코스가 되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과거칠불이 있었는데, 다섯 번째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Koṇāgamana)佛이 이곳에 주처(住處)했다고 한다.
 
상좌부의《붓다왕사Buddhavamsa 佛陀史, 佛種姓經》전승에 의하면, 구나함모니불은 29佛 가운데 26번째 佛이고, 칠불가운데는 다섯 번째이고, 현겁(現劫) 5佛 가운데서는 두 번째 佛이라고 설명한다. 불교의 현겁 시간론에서 현겁의 첫 번째 부처는 구류손불(拘留孫佛Krakucchanda), 두 번째는 구나함모니 불이며, 세 번째 가섭불(迦葉佛.Kassapa), 네 번째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이고 다섯 번째가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 慈氏)인데, 미륵불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미륵보살은 지금 보살신분이지만 성도를 완성한 다음, 미륵불로 출세(出世)하여 순수정법(純粹正法)으로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불교내세론(Buddhist eschatology)이다. 불교의 메시아사상인 미륵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서 미륵신앙으로 발전, 승화되어 최근세까지도 영향을 미쳤던 불교 내세론(來世論)이다. 이런 경전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칭 ‘미륵불’이라고 사이비들이 가끔 일어나 혹세무민하기도 했다.
 
▲ 기원후 2세기 간다라 예술시기의 미륵보살(佛).     © 매일종교신문
 
《붓다왕사Buddhavamsa》는 빨리어 경장(經藏 Sutta Piṭaka)의 소부(小部 Khuddaka)의 14번 째 책으로 고타마 붓다와 24 佛에 대해서 설명한 것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서구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고타마 붓다에 대한 전기는 아슈바고사Aśvaghoṣa 馬鳴菩薩 80–150 CE)의 《붓다짜리타 Buddhacarita बुद्धचरित仏所行讃》란 서사시 형식의 고타마 붓다 전기가 있다. 마명(Aśvaghoṣa)이란 시인이 저작한 불타전기문학이다. 마명은 고대 인도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칼리다사(Kālidāsa 5세기)가 출현하기 전, 최고의 시인으로 이 작품은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썼다고 한다. 서역 출신인 담무참(Dharmakṣema 曇無讖 385–433CE)이 한역했다.《붓다짜리타》는 인도와 동남아 등지에서 매우 인기리에 널리 익혔다고, 인도와 실론 그리고 스리비자야 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약했던 당나라 의정법사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마명은《대승기신론》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으나, 이 논서는 최근 서구 불교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 찬술된 책으로 보고 있다.
 
고타마 붓다가 카필라와스투에서 겪은 가장 극적인 일은 출가할 때 태어난 아들 라훌라(Rāhula,障碍란 의미)와의 드라마이다. 고타마 붓다가 성도한 후 1년, 카필라와스투 왕궁을 떠나서 7년 만에 돌아온 그에게 전 부인 야소다라는 라흘라에게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니 모든 유산을 물려달라고 요청하도록 하자, 라훌라는 고타마 붓다에게 다가가서 요청하자, 고타마 붓다는 답을 하지 않자. 라훌라는 계속 요청하면서 고타마 붓다를 따라 나서자, 고타마 붓다는 수제자 사리불 존자에게 라훌라를 승가 공동체에 입문시키도록 말했다. 이로써 라훌라는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미가 되었고, 7세 이상의 어린이도 승가에 입문하는 전통을 남겼고, 라훌라는 수행을 열심히 해서 고타마 붓다의 10대 제자에 올랐다. 고타마 붓다의 가족사는 모든 불교도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고, 후세에 전범이 되기도 했다.
 

네팔정부는 룸비니를 성역화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룸비니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잡혀가고 있고, 특히 평화를 상징하는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취지이다. 고타마 붓다의 평화 자비 생명 사상을 구현하는 세계평화도량으로 만들어서 불교도이건 비불교도이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환영한다는 룸비니 성역화 추진 프로젝트의 설명이다.  
▲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 불교컨퍼런스(2001년 네팔 룸비니).     © 매일종교신문
 
이런 취지아래 세계평화를 모색하는 국제 불교컨퍼런스와 세계불교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국제사원구역에는 각 나라 불교 사원이 들어서서 불교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고타마 붓다가 룸비니에 와서 본다면 스스로 놀랄 일은, “사르나트에서 법륜을 굴린 이후, 담마(法)가 이렇게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가 태어난 자리로 돌아오다니! 놀라운 일이로다.”라고 독백을 할지 모르겠다. 세계 여러 불교나라에 가지 않아도 이곳 룸비니에서 각 나라의 불교전통을 눈요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룸비니 성역이다. 한 성인의 탄생은 이렇게 인류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삶의 빛을 주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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