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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⑬신라 출신 연오랑이 곧 제14세 중애왕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7/28 [09:40]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기획 시리즈-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⑬신라 출신 연오랑이 곧 제14세 중애왕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기획 시리즈-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7/28 [09:40]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연오랑·세오녀 신라인 부부가 바위 또는 고기(혹 큰 거북인지도 모른다)에 업히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타고 간 것이 배가 아니며, 일월의 빛이 흐려졌고,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에 왕으로 삼았다고 했다.
 
배가 아닌 물체를 타고 간 것 역시 의심스러운 일인데, 이는 이 두 사람을 높이어 따르게 하느라 그렇게 설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를 무조건 왕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해와 달, 천지조화에 무슨 변화를 가져다 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위인 이었고 사람 됨됨이도 보통을 넘어 섰기에 하늘이 보내신 인물로 여겨 왕으로 삼았으리라 본다.
 
두 사람이 타고 간 물체도 그렇고, 신체모습과 용모가 장대하고, 가죽신을 신는 신분이라는 점에서 평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애왕과 신공왕후에 관한 부분에 여러 가지 설이 있음을 소개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명치이후 황국사관이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하여 경영했다는 주장을 펴 식민통치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우리로선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또 이 같은 주장은 알고 보면 위작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이다.
 
신라 출신 연오랑이 곧 제14세 중애왕
 
때문에 연오랑 부부의 이야기를 좀 더 계속하고자 한다.
 
이미 소개한대로 성무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태자로 봉한 사람은 일본무의 둘째아들 족중언(足仲彦)이며 나중에 중애왕이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연오랑·세오녀 편을 중애·신공왕후로 연결시키는 설(안동준 『한족과 고대왕실』)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소개하면 이렇다.
 
족중언=연오랑이 31세의 나이에 태자가 되었다. 이때는 세오녀가 미처 연오랑이 있는 곳에 당도하지 못했을 때다. 하늘에서 강림한 것같이 장대미남인 연오랑에게 딸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위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중애왕은 먼저 숙부의 딸 오호가나쓰히메(女大中姬)와 결혼, 가고사가노미고도(鹿弭坂)와 오시구마(忍熊) 두 아들을 낳았고, 또 대주주(大酒主)의 딸 오도히메(弟媛)를 취해 호무야(譽屋)를 낳았다. 그제 서야 세오녀가 찾아오므로 앞의 오호가나쓰히메(女大中姬)와 오도히메(弟媛)를 제쳐 놓고 세오녀(氣長足姬=神功王后)를 정비로 맞아들인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연오랑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세오녀는 남편 연오랑을 만나기 전에 일본국 인들을 먼저 만났을 것이다. 그들은 9척 장신의 장대 미려한 세오녀를 보고 과연 천강녀(天降女)라 했을 것이다. 남자들도 많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남편을 찾는데 목적을 둔 세오녀가 외국남자를 가까이 할리 만무하다. 『위지』‘동이전’에 나와 있듯이 연기장대(年旣長大) 하였어도 시집도 가지 않고 1천여 여비(女婢)의 시중을 받아 가면서도 남자라곤 단 한사람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하러 출입하는 사람 외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 수절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세오녀는 남편 있는 곳으로 가기 전에 구주(九州) 등지의 국난을 먼저 다스리고 어느 정도 평정되자 남편을 만나 이국땅에서 다시 부부로 결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지』‘동이전’에는 이 여인을 비미호(卑彌呼)라 했다. 중애왕은 즉위 이듬해 2월6일 쓰누가(角鹿)에 가서 행궁을 짓고 그곳에 가서 살았는데 그 궁을 게히노 미야(笥飯宮)라 했다. 지금의 쓰루가(敦賀)군 기북신사(氣北神社)가 바로 그곳이다. ‘쓰루가’나 ‘쓰누가’는 비슷한 음인데 한국 쪽으로 면한 항이며 신라 땅이었던 오늘날의 영일만과 마주 보게 되는 사이다. 이 양 항 어구에는 목출도-풍도-울릉도-오끼나와 열도가 있어서 양국 간의 주요 통항로 였다.
 
연오랑이 바위에 업히어 영일만을 떠나 도착한 곳이 이곳 쓰루가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애왕이 되어 하필이면 왜 이곳에다 궁을 짓고 살려고 했을까. 비록 그가 왜왕이 되었을지라도 연오랑 당시의 고국인 신라를 잊지 못해 자기가 도착한 곳이자 고국이 상망(相望)되는 이곳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금 신라국’은 구주내 신라계 부족국가
 
『일본서기』중애 8년 9월에 보면 군신에게 조(詔)하여 웅습을 토벌할 것을 협의했다. 이때 신이 왕후에게 부탁하여 신탁을 내리어 ‘왕은 어찌하여 웅습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십니까. 이곳은 여육(膂肉)의 한국입니다. 어찌 병사를 이끌고 가 토벌할 가치가 있으리오. 이 나라 보다 더 많은 보물이 있는 나라 즉 눈부신 금, 은, 채색이 많은 고금(拷衾)의 신라국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여기서 ‘고금신라국’은 대마도를 말한 것인지, 구주내 한민족이 할거한 나라인지 또는 일본 학자들 주장대로 한반도내 신라 본국을 뜻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문정창(文定昌)은 『일본상고사』(263쪽)에서 “고금신라국은 구주 내에 있는 신라계의 많은 부족국가들 중 한 나라의 국가명인 것이다”라고 했다.
 
신공왕후의 소위 신라 정벌설과도 관련이 있는 이 부분은 한·일 학자간의 큰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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