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가정사의 왜곡, 우리 역사의 왜곡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8/04 [18:10]
광복 70년을 맞아 생각해보는 ‘독자노선’ 고집한 의자왕의 한계

가정사의 왜곡, 우리 역사의 왜곡

광복 70년을 맞아 생각해보는 ‘독자노선’ 고집한 의자왕의 한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8/04 [18:10]
금년은 우리에게 뜻깊은 한해다. 일제로부터 광복된 해를 기념하는 ‘광복 7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광복 70년은 단순히 해의 바뀜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약속의 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가해자인 일본과 대한민국은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 미래를 향해 새로운 약속을 담는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큰 걸림돌은 양국의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차이점이다.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어떤 조상으로 그릴 것인가 하는 것은 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고민이다.
 
갑오개혁으로 반상의 차별이 없는 만인평등이 이루어지기 전 당시 사회는 극소수 양반과 대다수 노비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신분구조가 어느 순간 전국민의 양반 후손화가 되면서 저 멀리 신라, 가야의 왕족 후손까지 대량 배출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실례가 우리 성의 분포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대 성씨로 김이박이란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우리국민 상당수가 자신들의 조상을 부정하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을 조상으로 제사지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각자의 가정사의 왜곡이다. 작은 왜곡의 역사는 스스로 자기 역사를 부정하는 일에 둔감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해 역사의 진실을 추궁하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연출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사인식이다.
 
▲ 당시 45.000여명의 인구가 살던 부여에서 3천의 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3천 궁녀설’이 터무니없는 역사가 되었다.     © 매일종교신문
 
지난 해 여름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 부소산성을 다녀왔다. 오래전 돌아본 산성은 백마강을 따라 떠다니는 유람선에서는 ‘백마강’(작사 손로현 작곡 한복남 노래 허민) 노래가 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사벌에서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이 노래에는 두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계백장군, 백제 멸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지는 궁녀의 이야기다. 그 배경에는 백제 마지막 의자왕이 있다. 그는 왕에 오르기 전 해동증자라 불렸으나 서기 641에 ‘왕위에 오르자,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는 기록이다. 3천 궁녀설은 고려말기에 활동한 이곡이 부여를 회고하며 쓴 시에 ‘천척 푸른 바위낙화라 이름했네’라고 표현한 것이 ‘삼천’이란 숫자가 들어간 첫 기록이다. 조선시대인 15세기 후기에 김흔이 낙화암에 대한 시를 쓰며 ‘삼천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 라고 표현했으며 16세기 민재인의 「백마강부」에서 ‘구름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양종국, 『백제멸망의 진실』,도서출판 주류성, 2006, p.108)에서 3천 궁녀설이 확고한 역사적 기록이 된다.
 
‘궁녀 수 삼천’이라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쓴 시가 어느 순간 의자왕과 3천 궁녀설로 정착되었다. 당시 수도에는 45.000여명의 인구가 살았다. 그 인구에 3천의 궁녀의 의식주를 해결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천 궁녀설은 역사가 된것이다. 백제 백성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타사암(墮死岩, 떨어져 죽은 바위, 곧 낙화암을 말한다. 부여 부소산 북쪽 금강 언덕에 높이 100여 m의 절벽으로 곧 낙화암을 말한다.)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의 여인들이 침략자들로부터 정숙함을 지키고자 함께한 것이며 그 숫자 역시 많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일부 단체에서 치러지는 ‘부여 삼천궁녀 진혼제’는 우리가 역사의 왜곡이라고 할 3천궁녀설을 뒤바침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의자왕이 여러 후궁들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역사의 주체인 의자왕은 소정방에 이끌려 중국 황제에게 흴문을 듣고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의 여러 후궁 여럿이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궁녀와 다른 신분의 여인들이며 그를 따르던 궁인들이 따랐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3천 궁녀설을 통해 의자왕의 정치적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백제사 전체를 왜곡하고 있다.
 
의자왕은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갑자기 항복한 것과 관련 668년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소정방 전에는 의자왕이 항복하던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다. “웅진성의 그 장군(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했다.” 구당서 기록을 인용하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를 데려와 항복했다. ”는 대목이 나온다. 의자왕이 최후의 일전으로 믿고 들어간 웅진성의 장수에 의해 사로잡혀 항복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게 된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고집한 의자왕의 자주적인 노력이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국제관계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당이라는 외부세력을 적절히 활용한 신라에 의해 비운의 왕조사를 남긴 것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