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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9/24 [09:42]
장자 쉽게 읽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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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9/24 [09:42]
南伯子葵問乎女?曰: 「子之年長矣, 而色若孺子, 何也?」 曰: 「吾聞道矣.」 南伯子葵曰: 「道可得學邪?」 曰: 「惡! 惡可! 子非其人也. 夫卜梁倚有聖人之才而無聖人之道, 我有聖人之道而無聖人之才. 吾欲以?之, 庶幾其果爲聖人乎? 不然, 以聖人之道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三日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 而後能入於不死不生.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其爲物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也, 無不成也. 其名爲?寧. ?寧也者, ?而後成者也.」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에게 물었다.
“선생은 연세가 많은데도 얼굴빛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으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나는 도를 들었습니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도라는 것이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아! 어찌 배울 수 있으리오, 당신은 도를 배울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량의卜梁倚 같은 사람은 성인의 재능은 가지고 있지만 성인의 도는 없고, 나는 성인의 도는 지니고 있지만 성인의 재능은 없습니다. 내가 복량의에게 성인의 도를 가르쳐 주고 싶지만 과연 그가 성인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인의 도를 성인의 재주가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기는 역시 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진리를 말해 주었는데, 그는 3일이 지난 뒤에 천하를 잊어버렸습니다. 이미 천하를 잊어버리자 내가 또 그를 지켜보니 7일이 지난 뒤에 모든 사물을 잊어버렸고, 이미 모든 사물을 잊어버리자 내가 또 그를 지켜보니 9일이 지난 뒤에 자기의 삶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미 삶을 잊어버린 후에는 아침 햇살이 어둠을 뚫는 것처럼 마음이 밝게 트이는 경지에 도달하였고, 마음이 맑고 밝게 트인 후에는 홀로 우뚝 선 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홀로 우뚝 선 절대적인 도를 본 뒤에는 시간의 흐름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후에는 곧 죽음도 삶도 없는 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삶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은 없고 삶을 살려는 자에게 삶은 없습니다. 이러한 도는 모든 것을 보내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이룩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변화 속의 안정이라고 하지요. 영녕이란 만물이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번거로움 속에서도 늘 평안하고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南伯子葵(남백자규): 인명. 「제물론」편의 南郭子?(남곽자기)와 「인간세」편의 南伯子?(남백자기)는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女?(여우): 인명. 옛날 도를 지니고 있던 사람인 듯함.
色若孺子(색약유자):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음.
惡惡可(오오가): 아! 어찌 되겠는가. 앞의 惡는 감탄사. 뒤의 惡는 어찌.
卜梁倚(복량의): 인명.
庶幾其果爲聖人乎(서기기과위성인호): 바라노니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猶守而告之(유수이고지): 그래도 차근차근히 지켜보면서 일러 줌.
外天下(외천하): 천하를 잊어버리다. 外(외)는 도외시함.
朝徹(조철): 아침 햇살과 같은 경지. 어둠을 뚫는 아침 햇살과 같이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는 뜻으로 도를 깨우쳤음을 형용한 표현.
見獨(견독): 홀로 우뚝 선 도를 봄. 바로 도와 만났다는 뜻.
無古今(무고금):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렸다는 뜻.
入於不生不死(입어불생불사):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도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
殺生者(살생자) 不死(불사) 生生者(생생자) 不生(불생): 살아있는 것을 사면시키는 존재[道(도)]는 그 자신이 사멸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을 생성하는 존재는 그 자신이 생성되지 않음. 무엇에 의해 사멸되거나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 도의 절대성을 표현한 말.
無不將也(무불장야) 無不迎也(무불영야): 보내지 아니함이 없고 맞이하지 아니함이 없다. 사물이 가면 가는대로 내버려 두고 사물이 오면 맞이한다는 뜻이다.
無不毁也(무불훼야) 無不成也(무불성야): 허물어지는 것은 허물어지게 놓아두고 이루어지는 것은 이루어지게 내버려 두어서 인위적인 편견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寧(영녕): 외부의 사물과 어지럽게 얽히고설켜서 함께 어울리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함. 변화 속에서도 안정된 경지를 뜻함.
?而後(영이후) 成者也(성자야): 사물과 어지럽게 어울린 뒤에 편안한 관계를 이룸. 
 
잠잘 때 꿈도 꾸지 않고, 호흡이 깊고 고요한 지인이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안색이 투명하여 어린아이 같은 지인이 도를 배우는 과정을 단계별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지인으로 가는 길은 기르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잊어서 덜어내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천하를 잊고, 사물을 잊고, 삶을 잊었더니 거기에 아침 햇살과 같은 깨달음이 오고, 대립이 없는 절대적인 경지인 도를 보았노라”고 했다.
 
조철朝徹은 도로 진입하는 수양을 한 후의 정신 상태로서 마음이 청명해진 상태이다. 이래야만 절대적인 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우는 우선 천하나 만물과 같은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인 대상들을 잊은 후에 삶 자체를 잊고 이후 시간성까지 잊어버리며 마지막에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삶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죽음이란 없다. 삶에 집착해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 자에게는 진정한 삶이 없다. 현실에만 매몰되어 매사를 바쁘게 서둘러 사는 사람은 묘지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스스로 재촉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도는 모든 것을 스스로 가는 것에 맡기므로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스스로 오게 놓아둠으로 모든 것을 맞이하지 않는 것도 없다. 그 길을 걷는 걸음은 파괴의 걸음이 창조를 밟고 창조의 걸음이 파괴를 밟아 걷는 걸음이며 그 걸음이 창조 곧 변화이면서 안정인 것이다. 대립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걸음이므로 변화하지만 안정된다.
 
장자는 도의 인식방법을 이렇게 설파說破하고 있다. 먼저 세상일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다음에 모든 사물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도 벗어나야 비로소 도를 통찰할 수 있다고 한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보태야 하는데, 도를 하려면 날마다 덜어 내야 된다. 덜고 덜어서 무위에 이르면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장자의 인식방법은 다분히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의 통찰은 존재와 인식이 하나의 빛 속에 열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또는 마음은 본시 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감각이나 개념적 분별이 이를 가리고 있다는 전제이다. ‘이 세상과 사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함은 대상에 대한 모든 주관적인 선입관은 물론 독단적으로 규정한 모든 종류의 자아관념으로 부터도 그 정신이 벗어남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인식의 근원적 자기반성과 정화를 거쳐서 도는 통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의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므로 혼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 혼란 속에 일정한 질서가 있다. 겨울이 추웠다 따뜻했다 무질서하게 되풀이 되지만 봄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바로 혼돈 속의 질서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편안함이 바로 혼란 속의 편안함이란 뜻의 영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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