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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㉑소아씨 가문 이룬 백제사람 목만치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9/25 [00:55]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㉑소아씨 가문 이룬 백제사람 목만치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9/25 [00:55]

여기서 일본 상고역사상 지대한 역할을 한 가문이 있으니 바로 소아씨(蘇我氏)이다. 이 소아씨는 원래 백제사람 목만치(木滿致).
 
목만치는 백제 8대성의 하나인 목씨로서 소아씨 일문의 시조이다. 이 목만치의 아버지는 백제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 어머니는 신라여인이다.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신라여인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백제사람 목만치 도일, 유명한 소아씨 가문 이뤄
 
백제목씨의 내력을 잠깐 살펴보자. 백제로부터 궁월군이 일본에 귀화할 때 120현의 인부(人夫)들을 이끌고 귀화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영을 통과하지 못하고 모두가 가라(加羅)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일본 조정에서는 가쓰라기노 소쓰히고(葛城襲津彦)를 보내 가라에 있는 궁월의 인부들을 데려오라 하여 파견했다.
 
그러니 그 역시 3년이 경과하여도 오지 않았다. 이는 필히 신라가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 헤구리노쓰구(平群木菟)와 이꾸하노도다(的戶田)에게 정병을 주어 급히 보냈다. 신라왕이 그 죄를 겁내고 이에 따르매 궁월의 인부와 더불어 소쓰히고(襲津彦)가 같이 왔다고 한다.(『일본서기』응신왕 14년기)
 
이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이 신라에 갈 때 통역관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이 없는바 그가 한민족어를 잘 하는 귀화해 살던 일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백제목씨에게 가쓰라기(葛城)라는 성을 하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이 곧 백제목씨이다. 그도 그럴 것이 ‘葛城(가쓰라기)’의 ‘城(기)’은 ‘기(木)’로 읽으므로 ‘葛木(갈목)’과 통하기 때문이다. 『성씨록』섭진국(섭진국:세쓰노구니) 제번하(諸蕃下) 신조(神條)에 ‘갈목습진언(갈목습진언)’의 기록이 있는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로 쳐 들어가 그곳의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가운데 하나가 목만치(목만치(木滿致)요 이 이가 일본에 건너가 소아씨(蘇我氏)로 개명한다. 따라서 목만치와 소아씨는 다 같은 백제목씨이며 ‘만치(滿致)’와 ‘습진(襲津)’은 동기간인 듯하다. 둘 다 한민족인데 신라는 외가이며 백제는 친가이다. 그리고 백제 장수의 후예들이다.
 
갈목습진언에게는 이미 언급한데로 반지원(磐之媛: 이와노히메)이란 훌륭한 딸이 있었고 이 여인이 인덕왕비가 된다.
 
소아씨는 갈성(葛城)지방에 집단 거주한 것 같다. 인덕왕이 왕비를 위해 갈성부를 두고 처가로 하여금 갈성조 신(葛城朝 臣)이 되게 한 것 등이다.
 
제17세 이중왕(履中王) 역시 백제목씨의 외손이다. 이중왕은 평군(平群)의 목토숙니(木菟宿禰), 소아(蘇賀=蘇我)의 만지숙니(滿智宿禰), 물부(物部)의 이거불대연(伊莒弗大連)·원대사주(圓大使主) 등으로 이른바 4두 정치를 펴 나간다. 이때까지도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보다는 여러 부족의 연합에 의한 일종의 공화제가 실시된 것이겠다.
 
이 4집권세력 가운데 소아의 만지숙니, 목토숙니, 원대사주 등은 갈성의 백제목씨인 것이다.
『고사기』에선 목토숙니에 대해 ‘목각(木角)숙니자 원본 목신(木臣)’운운 한 것으로 이를 증명하며, 물부의 이거대불연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요속일(饒速日)의 후예이고, 원대사주 역시 백제목씨의 귀화인 갈목씨의 후예인 것이다. 이중왕이 한민족이기에 한민족을 측근에 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중 5년 광개토왕에 함락, 반정왕 고구려계 설
 
이중왕에 이어 제18세 반정왕(反正王)도 인덕왕의 아들로 나와 있다. 이중왕의 친동생인 것이다. 인덕왕비 반지원(磐之媛)이 그를 담로(淡路)에서 낳았다고 한다. 반정왕을 담로에서 낳았다는 것은 한편으로 반정왕이 담로도에서 승리한 세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영락 14년(서기 404년) 3월 왜(倭)가 불법으로 대방(帶方)에 침입함으로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발하여 왜군을 대파하고 왜군을 무수히 참살했다’한 대목이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이중왕기에는 ‘이중 5년(서기 404년) 9월 담로도에서 수렵하던 왕비가 갑자기 죽고 다음해 3월 왕이 치앵궁(稚櫻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두 기록을 비교종합해 볼 때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수군이 담로도에까지 쳐 들어가 먼저 왕비를 죽이고 그 다음에 이중왕을 죽이고 나서 그 왕권을 고구려 세력(반정)이 빼앗았을 것으로 보아 반정왕을 고구려계로 주장하는 측도 있다.
 
고구려·백제계가 서로 정권 차지하며 세력화
 
‘반정원년(서기 406년) 1월2일 저군(儲君)이 왕위에 올랐다’(『일본서기』)한 ‘저군’이란 용어를 쓴 것은 오직 반정기(反正記) 뿐이다. ‘저군’이란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란 뜻이다. 반정(反正)은 ‘부정을 정도로 돌린다’, ‘다시 바르게 한다’는 등의 뜻으로서 세상을 뒤집는 난을 일으켰다가 다시 정(正)으로 돌이킨다는 용어라 하겠다.
 
또 이를 달리 풀이하면, 고구려 승리군의 우두머리가 임시 왕좌에 올랐다 하더라도 이에 충심으로 승복치 않은 반대세력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반정왕’이 생길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반정왕이 고구려계가 아닌 백제계가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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