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㉘백제가 최초 불교전파 日 문화형성에 모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12/29 [10:20]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㉘백제가 최초 불교전파 日 문화형성에 모체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12/29 [10:20]
백제가 최초 불교전파 日 문화형성에 모체
성왕과 백제는 일본문화사상 위대한 은인

선화왕이 향년 73세로 사망한다. 그는 대마도(임나)를 점령하고 있는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29대 흠명왕(欽明王)의 이름은 이미 소개한데로 천국배개광정(天國排開廣庭: 아메구니오시히라끼히로니와). 계체왕의 적자이며 응신왕의 7대손이다. 생모는 계체왕의 왕후 수백향(手白香: 다시라가). 그가 백제 무령왕의 딸이니 흠명왕 역시 한민족의 혈통이다.    

그는 어렸을 때 몽시를 받았는데 ‘천황이 만약 진대진부(秦大津父)를 사랑하면 장성 후에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입니다’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씨는 중국 진시황의 진씨가 아니다. 진시황의 성은 영(嬴)이다. 한민족계의 진씨를 말한다. 응신왕 14년기에서 본 바 궁월군(弓月君)이 데리고 온 기국(己國) 120현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출생지가 진한(辰韓=秦韓)이었으므로 진민(秦民)=진씨(秦氏)라 불렀던 것이다.    

흠명왕이 즉위하기까지 백제계 진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 진씨의 출신지가 산배국(山背國) 기이군(紀伊郡)이며, 이 지역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흠명왕의 이름 첫 자에 ‘천(天)’자가 붙은 것은 고대 일본의 한민족계 집권자들이 그 본국을 천(天)이라 지칭한데서다. 이는 그 종주국 백제계 세력이 뻗어가는 때라 할 것이다. 따라서 흠명왕은 백제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요, 또 백제왕실의 외손임을 말해준다.

이로써 왜국의 왕실은 종래의 북부여계로부터 백제계 왕족의 피가 점차 농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일본서기』흠명원년 2월조에 보면, ‘백제인 기지부(己知部: 고찌부)가 투화(投化)하여 왜국 첨상(添上: 소노우가미)군 산촌(山村)에 배치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이가 산촌기지부(山村己知部)의 선조이다.    

기지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대화지(大和志)에서는 대화국 첨상군 기지산에 백제 기지부의 택지(宅地)가 지금도 남아있다. 기지부로 인해 이곳 산명과 지명이 ‘기지’로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흠명은 2년 3월 5명의 비(妃)를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제목씨 출신 소아도목(蘇我稻目: 소가노 이가메) 대신의 딸 견염원(堅塩媛: 가다시 오히메)으로서 7남6여를 낳았다고 한다.    

흠명왕은 부왕 계체왕이나 어머니 수백향 왕후 그리고 한민족계 비를 맞아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그들이 다시 자손을 퍼뜨리는 계산을 할 때 당시 일본의 왕족과 측근 호족들은 한민족계와 얽히지 않은 가문이 없었다 할 것이다.     

흠명 6년 9월(545년, 백제 성명왕 22년) 백제국이 장육불상(丈六佛像: 높이 16자<尺. 484.8㎝>, 둘레 7자<21.1㎝>가 되는 크기의 불상)을 만들었다. 불교가 백제에 처음 들어온 것은 384년 침류왕 원년이다.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한 것이다. 왕이 궁중에 맞아들여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시행하니 이때부터 불교가 왕성했다.    

이 불교를 백제가 처음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 된지 168년 후인 성명왕(聖明王. 고친 이름은 성왕) 30년(서기 552년, 흠명 13년)에 해당된다. 백제의 일본에 대한 불교수출은 일본국의 문화형성에 모체가 되었으며, 그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로 성왕과 백제는 일본문화사상 위대한 은인인 것이다.      

성왕 佛心·동족애로 비용 들여 불상·불경 보내
日‘조공’이라 왜곡 기록, 시대흐름상 어불성설    

『일본서기』에는 흠명 13년 10월조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10월 백제 성명왕이 서부희씨달솔(西部姬氏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보내 석가불 금동상 1구와 번개(幡蓋) 약간과 약간의 경론(經論) 서적을 보내 왔다(헌<獻>하다). 그리고 그 유통과 예배와 공덕을 찬양하다.’     

이것이 백제 성왕 30년에 일본에다 불교를 전하면서 금동불상도 함께 보낸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 이전 일본에는 불교를 전혀 알지도 못했고 불상 역시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불교경서와 함께 많은 경비를 들여 금동불상을 제작해 보낸 것은 포교하려는 불심(佛心)과 동족에 대한 애착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흠명13년 10월조에는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조공을 바친 것처럼 그릇된 관념으로 ‘헌(獻)’자를 사용해 기록한 대목이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은 백제와 고구려가 도륭성(道隆城)과 독산성(獨山城)을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때였다. (기획특집본부장)

  • 도배방지 이미지

  • 역사연구 2017/04/17 [09:04] 수정 | 삭제
  •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에 의하면, 진(秦)나라 진시황제의 조상은 순임금이 진시황제의 선조에게 영성을 사성한 이후 하나라와 상나라 때까지 영성(?姓)이었고, 주나라 효왕은 진시황제의 선조인 비자에게 다시 영성을 사성하였고, 주나라 평왕은 진시황제의 선조인 진중(秦仲)의 손자 양공을 제후로 임명하면서 진(秦)나라는 제후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시황제의 선조는 영성(?姓)이자 진씨(秦氏)입니다. 따라서 진시황제의 후손들도 영성(?姓)이자 진씨(秦氏)입니다.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