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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㉙ 백제선 스님파견 사찰건립 추진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12/30 [08:53]
지금도 그곳엔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㉙ 백제선 스님파견 사찰건립 추진

지금도 그곳엔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12/30 [08:53]

백제선 스님파견 사찰건립 추진 
大和 지방 중심 백제 세력 확대
  
백제로부터 불경 불상 등을 받은 흠명왕은 백제 사자(使者)에게 “짐이 옛적부터 아직 듣지 못한바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짐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다”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서쪽나라에서 보내온 불상의 모양이 단정하고 엄숙한데 이 같은 불상을 일찍 보지 못하였다. 공경할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      

소아대신 도목숙니(稻目宿禰)가 말했다.
 “서쪽이웃 모든 나라들이 모두 믿는 바이므로 일본만이 이를 배척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물부대연미여(物部大連尾輿), 중신연겸자(中臣連鎌子) 등은 견해를 달리했다.
“우리나라가 천하에 왕이 있고 사직이 장구한 것은 180신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제사를 지냄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이를 바꾸어 번신(蕃神)을 제사 지내게 되면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이처럼 불교 전파 초기부터 숭불파와 반불파로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흠명왕은 소아 도목숙니 대신에게 먼저 믿어 보라고 했다. 도목숙니가 불상을 받아 모시고, 향원(向原)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후에 일본 내에 악한 전염병이 유행되어 치료가 어려웠다. 반불파들은 불교의 침범으로 인한 국신의 노여움이라 주장, 왕으로 하여금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했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반불파들은 불상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난후 하늘엔 한 점 구름과 바람이 없는데 홀연히 왕이 있는 대전(大殿)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한편 숭불파는 그러한 전염병의 유행은 불교박해에 대한 부처님의 반응이라 내세우고 각종 비어(蜚語)들을 유포시켰으며 또한 불교를 믿으면 악한 전염병이 그친다고 주장하니 왕이 이 역시 허락했다. 왜국은 이때부터 50년간 치열한 불교논쟁이 일어나 어지러워지기까지 한다. 이런 싸움에서 승리한 백제출신 소아씨의 세도정치가 성립돼 1백여 년간 계속된다.     

일본역사상 찬란한 비조문화 백제인이 건설

대화(大和)지방을 중심한 왜 왕조의 세력판도는 이제 백제인 들의 천지로 되어간다. 그리하여 일본 역사상 찬란한 비조문화(飛鳥文化)가 백제인 들의 손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일본서기』흠명15년 2월조에서는 ‘백제국이… 오경박사(五經博士) 왕유귀(王柳貴를 고덕 마정안(固德 馬丁安)에 대신하고, 담혜(曇惠)스님 등 9인을 도심(道深)스님 등 7인과 교체하다’고 했다. 이는 치열한 불교논쟁 중에서도 백제스님들의 왜지 파견이 계속되고 아울러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2월에는 또 역박사(易博士) 시덕 왕도량(施德 王道良), 역박사(曆博士) 고덕 왕보손(固德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나솔 왕유전타(奈率 王有悛陀), 채약사(採藥師) 시덕 반양풍(施德 潘量豊)과 고덕 정유타(固德 丁有陀), 악인시덕 삼근(樂人施德 三斤), 계덕 기마차(季德 己麻次), 계덕 진노(季德 進奴), 대덕 진타(對德 進陀) 등으로 교체시켰다. 

백제는 이들을 파견했다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정기적으로 교체시키는 관례가 있었다.      

백제세력의 당시 일본지배는 형이상학적으로는 불교를 비롯한 문화일반의 수입과 발전에 근거하였고, 그 세력의 형성은 백제목씨 즉, 소아씨 가문의 척신 세도 정치에 의거한 것이다. 그 재정적인 뒷받침은 소아씨 마지숙니(麻智宿禰) 내지 진씨(秦氏) 대진부(大津父)의 대장직(大藏職)과 그 하부조직인 전국의 세습제 사세관(司稅官: 백제인)들이었다. 그리하여 사관, 승려, 의(醫), 약, 역(易), 력(曆), 선박의 관리 등 그 지도·계몽적인 것과 그 원천·바탕적인 것은 모조리 백제인 들이 차지하게 된다. 백제인 들은 이처럼 흠명왕대에서 왜 왕조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과 세력 확장을 이룩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흠명 31년 3월 소아씨 대신 도목(稻目)이 죽고 그 아들 마자(馬子)가 대신이 됐다. 마자대신은 자택에 불전을 만드는 등 더욱 불교에 힘쓰고 백제국은 승려, 조사공(造寺工) 등을 계속 파견했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승려들이 건너가 포교활동을 개시했다.     

또한 왜지 내에 고위층 백제인 자녀들이 출가하게 되며 백제를 성지로 한 순례 내지 수도하는 일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당시 불교는 백제와 왜 간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중개 역할을 하며 따라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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